혁명의 설계자, 혁명에 쓰러지다

[태종 이방원 72] 펼쳐보지 못한 정도전의 꿈

등록 2007.04.11 09:41수정 2007.04.1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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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 밝힌 위장전술에 넘어간 왕당군

방원이 소수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삼군부(三軍府) 문 앞에 이르렀다. 궁 밖 방원 군사들의 움직임이 대궐에 즉각 알려졌다. 깜짝 놀란 세자 방석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대적하기 위하여 군사 예빈소경(禮賓少卿) 봉원량으로 하여금 동태를 파악해 오도록 했다. 봉원량이 남문에 올라 살펴보고 방석 앞에 부복했다.

"광화문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군사들의 횃불이 즐비합니다."
"으음."


방석은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봉원량의 보고를 받은 방석은 잔뜩 겁을 먹고 대궐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방원의 전갈을 받고 급거 한양에 도착한 하륜은 수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위장전술을 썼다. 진천에서 데리고 온 군사들로 하여금 남산 일대에 흩어져 횃불을 밝히도록 했던 것이다.

전열을 정비한 방원이 이숙번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간당(姦黨)이 모인 장소에 쳐들어가 군사로써 포위하고 불을 질러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력으로는 저들을 대적할 수 없으니 정도전과 남은 등을 목 벤 후에 우리 형제 4, 5인이 삼군부(三軍府) 문 앞에 말을 멈추고 나라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아서 인심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한결같이 따른다면 우리들은 살게 될 것이다. 정도전이 있는 곳으로 가자."

"수적으로 열세다. 권력의 핵을 기습하라"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은 깊어 이경(二更-21시~23시)이다. 사위(四圍)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도성에는 통금이 발효되어 지나는 행객은 하나도 없고 방원 군사들의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다.

송현(松峴)을 지나 정원수가 아름답게 가꾸어진 집 앞에 이르러 이숙번이 말했다.


"여기가 정도전이 들어 있는 남은의 첩 집입니다."

소나무 숲 사이에 아담하게 지어진 취월당에는 환하게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술자리가 파하지 않았는지 간드러진 기생들의 목소리와 사내들의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담장 밖으로 넘어왔다. 방원이 말을 멈추고 보졸(步卒)과 소근으로 하여금 그 집을 포위하게 했다. 안장 갖춘 말 두서너 필이 그 문 밖에 있고 노복(奴僕)들은 모두 졸고 있었다.

취월당을 포위하고 있던 이숙번이 주변의 집 세 곳에 불을 질렀다. 칠흑 같은 깜깜한 밤에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불이야! 불이야!"

누구인가 모를 외마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정원에서 술을 마시던 정도전 일행이 혼비백산 기겁을 하고 문 밖으로 뛰어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칼날 앞에 심효생과 이근 그리고 장지화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꼬꾸라졌다.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내가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불길이 치솟고 동네가 소란스러워지자 이웃 주민들이 뛰쳐나왔다. 정도전으로 오인한 방원은 소근으로 하여금 그 사내를 체포하도록 했다. 횃불을 들이대고 자세히 살펴보니 정도전이 아니었다. 이웃에 살고 있던 전 판사(判事) 민부였다.

끌려나온 정도전, 천하를 호령하던 기백은 어디 갔나?

민부의 안내를 받은 소근이 민부의 집을 샅샅이 수색했다. 정도전은 침실에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그러나 소근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소근이 큰소리로 나오라고 고함을 치자 정도전이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칼이 쥐어져 있었다. 칼을 버리라고 소리를 지르자 판세를 읽은 정도전이 칼을 버렸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소근이 끌어내어 방원의 말 앞으로 가니 정도전이 말하였다.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권력과 병권을 한 손에 쥐고 천하를 호령하던 정도전의 기백은 온데간데없다.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모습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마지막 말이 참인지 방원의 거사를 합리화하기 위한 왜곡인지 알 수 없다. 오직 정도전과 이방원 두 사람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자는 말이 없고 기록만 남아 있다. 정도전은 패자이고 기록은 승자의 손에서 요리된다.

예전이란 태조 즉위년 임신년을 가리킨 것이다. 정도전이 나주 유배와 투옥 끝에 처형의 위기에 몰려 있을 때가 있었다, 이때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일이 있었다.

방원은 만감이 교차했다. 한때는 삼촌이라 부르리만큼 혁명동지 이상의 인간관계였다. 학문이 깊어 존경했던 인물이다. 손을 맞잡고 아버지를 도와 혁명에 성공했다. 부패한 고려를 떨쳐버리고 새 나라를 만들자고 약속했었다. 그 혁명을 다시 혁명해야 하는 자신이 불행한 혁명 전사처럼 보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는데도 무엇이 부족하더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방원은 정도전의 목을 치도록 명했다. 무엇이 악한 짓인지 알 수 없다. 선과 악의 잣대는 때론 칼끝에서 나오기도 한다. 선과 악의 질량을 계량하기보다는 칼이 손쉽고 단순하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은 이렇게 스러져 갔다.

출생 의혹에 대한 권력자들의 견제와 박해를 받으며 유배와 죽음의 문턱을 오갔던 정도전. 하층 백성들의 참담한 생활을 목격하며 재상 정치를 꿈꾸었던 개혁사상가 정도전. 변방을 떠돌던 장수를 찾아가 혁명을 결의했던 선비. 그가 꿈을 펴져보지도 못하고 또 다른 혁명에 의해 사라져 갔다.

병권을 쥐고 있던 정도전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창이 예리했을까? 방패가 허술했을까? 기습을 준비한 방원이 치밀했을까? 사병을 혁파한 정도전이 자만했을까? 승패의 분수령은 정보력이었다. 공적인 정보라인을 장악했던 정도전이 사설정보팀을 가동했던 이방원에게 허를 찔린 것이다.

정도전은 개혁사상가였나? 현실을 요리한 기득권층이었나?

학자는 논한다. 정도전의 신권중심주의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도전의 재상정치는 시대를 앞서가는 위대한 개혁사상이다. 정도전이 죽지 않고 그의 정치사상이 펼쳐졌으면 백성들의 삶의 질은 한 단계 업 되었을 것이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충돌점은 시각의 차이다. 정도전은 국가의 주인을 백성으로 봤고 이방원은 군주로 봤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정도전의 주장이 옳지만 그 시대엔 너무나 시대를 앞서갔다.

학자는 논한다. 이방원은 권력의 화신이 아니라 국가주의자다. 왕권이 뿌리 내리지 못한 개국 초기에 그의 강력한 국가주의가 아니었으면 국체(國體)가 518년 동안 이어져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역사의 죄인이 되면서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역사는 꼭 발전하는 것만이 아니다. 때론 후퇴하기도 한다.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은 왕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간과한 정도전도 개혁의 대상 범주에 드는 기득권층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강박 관념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다. 현실정치가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의견에 갑론을박 논쟁을 하거나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 단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의 중심에 서서 되새겨 볼 필요는 있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국교로 존경받던 불교가 권력과 유착하여 국가를 위기를 몰아넣은 것을 목도한 정도전은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그의 신념으로 굳혔다. 조선을 설계하던 그는 신생국 통치 이념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구현했다. 그가 남긴 '불씨잡변(佛氏雜辨)'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만물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기(氣)가 모아지고 흩어지는 것에 있다. 사람이 죽은 후에 윤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피해 화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은 심성수양을 통해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불교는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로 겁을 줘 사람들이 득실을 따지며 억지로 착하게 살도록 한다." - 불씨잡변

정도전은 윤회설(輪回說)을 부정했지만 윤회하여 정도전이 다시 태어난다면 뭐라고 말할까?

덧붙이는 글 | 지금까지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 정도전이라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소감을 아래 댓글로 남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금까지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 정도전이라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소감을 아래 댓글로 남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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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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