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71회

등록 2007.04.11 08:05수정 2007.04.11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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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은 듯 보이는 저녁식사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대화는 거의 없었다. 아마 처음 함곡 일행을 안내했다고는 하나 외인이랄 수 있는 모가두가 끼어 있어서인지 아니면 한사코 합석을 마다하다가 좌등의 반 강제적인 권유에 마지못해 합석한 진운청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음식에는 반드시 술도 따라 오는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술을 권하거나 많이 마시는 사람도 없었다. 서로 무슨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닌데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더구나 혈녹접은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톡톡 건들거나 입에 넣은 음식을 씹지 않고 한참 물고 있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더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자네 한 잔 더 하려나?"

함곡이 입에서 잔을 떼어놓는 풍철한을 보며 물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돌려보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술을 마다하지 않는 풍철한도 이제 겨우 두 잔째였다. 함곡은 술병을 들어 아직 술이 반 정도 남아있는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나를 취하게 하면 여러 가지로 곤란해진다네. 수전증(手顫症)이야 없지만 혹시 손이 떨릴지 몰라서 하는 말이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나중에 온 좌등 일행은 몰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좌등이 잔을 들면서 물었다.

"식사 후에 특별히 하실 일이 있소?"


좌등이 잔을 치켜들며 묻자 풍철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함곡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 두 손으로 잔을 치켜 올렸다.

"뭐 특별히 할 일이 있겠소? 도대체 주어진 시간에서 반이나 까먹었는데도 감조차 하지 않으니 술 먹을 기분도 아니라서 그렇소."


말과는 달리 치켜든 잔을 좌등과 눈을 맞추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의 태도는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한 기색이었다. 좌등 역시 두 손으로 잔을 치켜들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두 사람이 술을 나누자 어색했던 분위기가 다소 나아지는 듯 했다.

"그래… 맞아!"

갑자기 생선살을 조금 떼어내 자신의 앞 접시에 놓고 깨작거리던 혈녹접이 젓가락으로 접시를 탁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지고,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해결했다는 표정이었다.

"이제야 알겠어… 왜 진즉에 생각나지 않았을까?"

혈녹접은 자신의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다른 사람이 곁에 있는지 조차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혼잣말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중얼거림이 아니라 탄성에 가까웠다.

"뭐가 말이냐?"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반효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혈녹접에게 쏠려 있는 것을 보며 툭 쳤다. 그제야 혈녹접은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듯 주위의 시선을 느끼며 묘한 미소를 입에 베어 물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좌중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호들갑스럽게 음식을 자기 앞에 놓인 접시로 옮겨 담으며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시작된 지 거의 반시진이나 흘러 다른 사람들은 이미 먹을 만큼 먹은 상태였는데 그녀는 갑자기 식욕이 도는지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주 요염한 여자가 이미 식은 음식을 저리도 맛있게, 그리고 많이 먹는다는 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매우 신기하게 보였다. 이제 그녀는 정말 다른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자칫 콧노래라도 나올 표정이었다.

풍철한이 그녀를 주시하다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의남매가 된지도 꽤 오래되었는데도 가끔 소유향은 이해 못할 행동을 보여주어 풍철한을 당황하게 하거나 어이없게 만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중요한 뭔가를 알아낸 듯은 보였다. 어차피 이런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것이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연청께 한 가지 여쭈어보아도 되는지…."

그 때였다. 함곡이 드디어 내심 품고 있었던 의문에 대해 물어 볼 기회를 잡은 듯 말을 꺼냈다. 좌등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청하면서 반드시 연청 진운청과 동행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진운청이 젓가락을 놓고 고개를 끄떡였다.

"말씀하십시오."

표정 하나 변화가 없었다. 그의 태도는 언제나 예의가 바르고 흠잡을 데가 없어 오히려 말을 걸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쇄금도와 진가려란 여인이 살해되던 날 밤에 연청께서…."

좌등도 합석한 상황에서 추궁하거나 신문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말을 끌면서 조심스럽게 물으려 하자 진운청이 약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제가 그곳을 지나다가 추공자를 본 일을 말씀하시는군요."

진운청이 오히려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함곡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운청의 태도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듯 진운청이 말을 이었다.

"아마 해시(亥時) 말경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여기 계신 좌 대주와 술을 한 잔 나누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본 것뿐입니다."

"나중에 쇄금도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은 아셨을 텐데…."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을 왜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으셨소?"

그러자 진운청이 머뭇거리더니 좌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좌등이 함곡과 풍철한을 보면서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어… 내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 말씀드렸다고 생각했는데… 말씀드리지 않았다면 정말 죄송하오. 보 내에 너무 여러 가지 일들이 터지다 보니 내가 착각한 모양이오."

좌등의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풍철한으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정말 좌등이 착각했기 때문에 알려주지 않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착각할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그런 일을 착각할 수 있는가? 하지만 좌등의 태도나 말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할만한 부분이 없어서 따지기도 어려웠다.

"죄송하게 되었소."

더구나 포권을 취하며 정중히 사과하는 좌등에게 어찌 더 이상 따질 수 있으랴! 함곡 역시 더 이상 따지기 어려웠던지 말을 돌렸다.

"헌데 여기 오기 전 무슨 일이 있었소?"

힐끗 모가두를 보며 좌등에게 물은 말이었다. 아무리 모가두가 아무렇게나 입고 행동한다 해도 지금 모가두의 행색은 이곳에 올 차림이 아니었다. 어깨 부근의 옷가지가 찢겨져 나가고 혈흔이 내비치는 차림으로 왔다는 것은 여기 오기 바로 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미친개에게 물렸소."

모가두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미친개?"

풍철한이 모가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얼거리자 모가두는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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