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뇌리에 각인된 수신제가

[태종 이방원 73]이방원의 이념

등록 2007.04.12 16:50수정 2007.04.13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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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 상징 남색 요대는 어디 갔나?

태조 이성계의 3인방 정도전, 남은, 심효생의 비밀 아지트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검붉은 화염은 밤하늘을 붉게 물들었고 땅은 선혈이 낭자했다.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3인방은 미쳐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무너졌다. 이직은 지붕위에 올라 불을 끄는 이웃주민으로 위장하여 죽음을 모면 했고 남은은 수하의 도움으로 도성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사지를 빠져나온 남은은 수구문을 통하여 성 밖 포막에 숨어들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갓은 벗겨지고 권위의 상징 남색 요대는 간곳이 없었다. 그렇지만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그런 것을 따질 경황이 없었다. 남은은 갈등을 느꼈다. 자진하여 방원에게 나설 것인가? 잠적할 것인가? 크게 악한 짓이 없기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다. 방원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받았던 까닭으로 참형(斬刑)을 당하였지만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수하 최운과 하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군옥(巡軍獄)으로 발길을 돌렸다. 실낱같은 생명의 희망이었다. 허나, 순군문에 도착한 그는 혁명군의 칼날 앞에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살벌한 혁명의 와중에서 자만은 금물이다. 불타는 화염 속에서 빗나간 화살을 뚫고 뛰어나오던 이무는 혁명군이 죽이려 하자 방원의 저지로 생명을 건졌다.

정도전의 아들 정유(鄭游)와 정영(鄭泳)은 수송방 집에 있었다.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취월당으로 뛰어가다 혁명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담(鄭湛)은 집에서 자기의 목을 찔러 자결했다. 살아남은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정진이다. 정진은 훗날 태종 이방원의 배려로 나주 목사와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여장부, 살육의 현장에 나타나다


방원을 전장 아닌 전쟁터로 보낸 부인 민씨는 불안한 마음에 순화방 사저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서있는 남편과 운명을 같이 하고 싶었다. 종을 앞세우고 살육의 현장 송현으로 나왔다. 최광대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극력 만류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방원과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다. 종 김부개가 정도전의 갓과 칼을 보여주자 부인은 그때서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취월당의 살육이 마무리되었다. 절반의 성공을 확인한 방원은 노상에서 긴급 구수회의를 열었다. 다음 공격목표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대궐로 진공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정도전을 비롯한 척결 대상의 핵을 제거했으니 더 이상 살상은 자제해야 한다고 하륜이 건의했다. 특히 원로대신들은 동조세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송현에 치솟는 불길을 보고 대궐이 발칵 뒤집혔다. 송현과 경복궁은 바로 길 하나 사이다. 궁중을 호위하는 군사들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고함을 쳤다. 비상사태에 돌입한 것이다. 시종의 보고를 받은 태조 이성계는 병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진상은 알 수 없었다. 누구의 집인지 화염의 원인은 무엇인지 보고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궐의 긴급 연락을 받은 이천우가 수하 2명을 거느리고 대궐로 가는 길목에서 마천목과 부딪쳤다. 이천우는 이성계의 조카로서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무공을 세운 문신이다. 마천목이 안국방(安國坊) 동구까지 뒤쫓아 가서 말했다.

"천우 영공(天祐令公)이 아니십니까?"
이천우가 대답하지 않고 대궐 쪽으로 잰걸음을 놓자 마천목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영공(令公)께서 대답하지 않고 가신다면 화살이 두려우실 겁니다."
"그대가 마사직(馬司直)이 아닌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가?"
"정안군께서 여러 왕자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길에서 마천목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나?

사태를 짐작한 이천우가 달려와 방원에게 말했다.
"이번에 이 일을 일으키면서 어찌 일찍이 나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살벌한 분위기를 파악한 이천우는 방원에게 줄을 섰다. 순간의 판단이 정사공신에 책록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길에서 마천목을 만난 것이 행운이 되었을 것이다. 마천목을 만나지 않고 입궁하여 이성계 옆에 섰으면 그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방원이 박포와 민무질을 보내어 좌정승 조준을 불러 오게 했다. 조준이 망설이면서 점(占)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거취를 점치게 하고는 즉시 나오지 않았다.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 점을 치는 것이었다.

성질이 불같은 이숙번이 뛰어 들어 갔다. 꾸물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방원에게 소개한 하륜이 원로대신들은 깍듯이 모셔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 꾹꾹 눌러 참았다.

이숙번의 불화 같은 재촉을 받고서야 조준이 나왔다. 조준이 우정승 김사형과 더불어 오는데 갑옷을 입은 수하들이 많이 따라왔다.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직감한 조준과 김사형이 두려워하면서 말 앞에 꿇어앉았다.

"경등은 어찌 이씨(李氏)의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는가?"

방원이 호통을 쳤다. 여기에서 우리는 방원의 얘기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방원은 조선국 국가의 명운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씨의 사직을 걱정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방원의 뇌리를 관통하는 중심사상이다.

의외로 고지식한 성리학 신봉자

함길도 후주에서 태어난 방원은 개경으로 유학 왔다. 유학자 원천석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개경 바닥에서 꼬장꼬장하기로 소문난 스승 원천석은 야생마 길들이듯이 그를 호되게 가르쳤다. 호랑이 같은 스승에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그 순서를 바꾸어서는 안 되는 불변의 진리입니까?'라고 물어 꾸지람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 순서가 옳은 길이라고 옛 선현들이 말씀 하셨느니라"

스승의 원천석의 이 말이 방원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자신의 몸을 갈고 닦은 사람만이 가정을 이룰 수 있고 가정을 잘 건사 한 사람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는 스승 원천석의 가르침은 방원의 전 생애를 지배했다.

등극 후 민무질 민무구 형제의 숙청과 양녕대군 폐위파동 그리고 세종에게 선위하고 심온을 처단하며 아들 세종의 치세를 지켜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이 비록 성리학 근본주의를 벗어난 편협한 자기중심적 사고 일지라도 그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방원에게 있어서 칼을 빼든 변란은 국가적인 혁명이 아니라 치국(治國)의 전 단계 즉, 제가(齊家)의 틀로 봤던 것이다. 방원은 의외로 고지식한 성리학 신봉자였다. 어릴 때 학습이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골수에 맺혀있는 서모에 대한 원한

"정도전과 남은 등이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워 나와 동모형제(同母兄弟)들을 제거하고자 하므로 약자가 선수를 쓴 것이다."

방원의 어투에서 생모 신의왕후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한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저주의 감정이 골수에 맺혀있다. 배다른 동생 방석을 서자로 보고 동복형제와 이복형제의 색깔을 극명하게 노출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은 훗날 그가 등극 후 신덕왕후의 능을 파헤치고 신장석을 뜯어다 쳥계천에 다리를 놓은 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저들의 하는 짓을 우리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조준 등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였다.

"이 같이 큰일은 마땅히 국가에 알려야만 될 것이나 오늘날의 일은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알리지 못하였으니 공(公) 등은 마땅히 빨리 합좌(合坐)해야 될 것이오."

원로대신들을 모아 국가 원로의 대표로서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앞장서 달라는 얘기다. 칼을 뺀 다음에 문인을 앞세우는 혁명의 수순이다.

덧붙이는 글 | 삽화를 그려 연재를 같이하실 분을 찾습니다. 선이 굵은 화풍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기자 이름을 클릭하시면 쪽지를 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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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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