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73회

등록 2007.04.13 10:11수정 2007.04.1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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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운중보의 모든 일은 철담 어른께서 처리해 오셨습니다. 이 안에서 흉수가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운중보의 기존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담 어른부터 시해했고, 지금 상황으로 본다면 아주 놀라울 정도로 흉수의 의도대로 되어간다는 것이 제 우견(愚見)입니다."

추 태감은 고개를 끄떡였다. 추 태감으로서는 뭐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심드렁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주 좋은 의견이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그 흉수가 누군지도 짐작하고 있겠군."

광나한은 바로 대답하고 싶었지만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저 같은 무명소졸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들입니다. 이 운중보 내에서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추 태감 역시 굳이 묻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빙긋이 웃으며 광나한의 말을 경청하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탁자 위에 올려놓은 검지와 중지로 장난치듯 탁자를 쳤다. 그것은 이제 되었다는 그만의 독특한 버릇이었는데 광나한은 알지 못했다.

"잘 알겠네. 본관 역시 그렇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었네. 내일 결전을 위해 술도 삼가고 일찍 돌아가 푹 쉬게."

추 태감의 말에 광나한은 자신의 의견에 추 태감이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추 태감과 중의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가 몇 걸음 뒷걸음질치자 추 태감이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자네… 지금 만보적에게 가본다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태감."

"물론 만보적에게도 알려주어야지. 가거든 만보적에게 말을 전해주게. 내일 조반은 이곳 청룡각에서 본관과 같이 하자고 말이네."


"알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가는 광나한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매달린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나한 역시 추 태감과 상만천의 관계가 조금은 껄끄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잘 이용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예상보다 빨리 이룰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추산관 태감이 있는 기척조차 내지 않고 뒤에 앉아있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철교두가 이길 것 같소?"

삼재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옆에 앉아 있던 중의에게 물은 것이었다.

"글쎄…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오. 그간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모르지만…."

중의로서도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현격한 실력 차이가 난다면 모르지만 고수들의 승부란 의외로 승부에 임하는 자세나 기세에서 결정되는 수가 많다. 또한 승부 당일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쪽이 승리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허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중의는 광나한이 이길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나한의 무위는 듣기는 했지만 본 적이 없었고, 젊은 시절 좌등의 무위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보는 것에 믿음이 더 가는 법이다.

"그것보다 태감께서는 재보가 내일 아침 이곳에 올 것이라 생각하오?"

추 태감이 운중보에 들어왔음을 뻔히 알면서도 지금까지 찾아오지 않는 상만천이 내일 오겠느냐는 부정적인 물음이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지금 자신의 처지를 한번쯤 따져 보겠지요. 자신이 있다면 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없다면 오지 않겠소?"

그의 말은 분명했다. 온다는 것은 자신과 동조하자는 것이고 오지 않는다면 적이 된다는 의미다. 혼자서 헤쳐 나갈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올 것이란 말이었다. 이미 추 태감은 상만천의 의도와 목적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만천의 목적은 자신과 같은 것이어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고 둘 중의 하나가 포기하고 고개를 숙여야만 손을 잡을 수 있는 관계다.

추 태감으로서는 자신의 목적을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상만천 역시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간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허나 이제 그런 애매한 관계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상만천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에 다름이 없었다. 이곳의 수하를 시키지 않고 광나한에게 전하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답변이나 변명은 필요 없고 오직 올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라는 것이다.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니오?"

중의는 상만천이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이제 회란 종기가 난 몸과 같았고 그것은 점차 피부 안에서 그 부위가 점차 넓어지고 있었지만 도려낼 생각보다는 잠시 가라앉히는 임시방편으로 견디어왔다. 이제 그 종기를 터트리려 하는 것이다. 고름은 절대 살이 되지 않는 것이어서 빨리 제거하는 게 무엇보다 현명한 일이지만 그 시기가 있는 법이다. 중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자 추 태감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띠었다.

"더 이상 미룰 때가 아니지요. 본관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소. 이곳의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북경에 가서 마지막 결정을 해야 하오. 지금이 그 시기요. 오히려 언제 흉기로 변할지 모르는 것을 가슴에 보듬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

추 태감의 미소는 중의를 안심시키려는 것이었는데 웬일인지 중의에게는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추 태감은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이제 칼을 빼들었으니 무엇이 겁나느냐는 태도여서 중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경첩형… 게 있는가?"

추 태감이 밖을 향해 부르자 경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속하… 준비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을 들어오시라 하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운중보의 경비를 맡고 있는 곽정흠과 엽락명이었다.

"추 태감을 뵈오이다."

두 사람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고 예를 취하자 추 태감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모습을 보면 추 태감이 권세만 믿고 사람을 마구 다루는 인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서들 오시게. 바쁜 분들인 줄 알고 있지만 부득이 이렇게 오시라 한 것을 양해해 주시게."

"별 말씀을… 사건이 벌어져도 허수아비처럼 두 눈 멀쩡히 뜬 채 제대로 흉수조차 감지하지 못해 죄송스런 심정입니다. 문책을 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엽락명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한 말이었다.

"허허… 그렇게 생각하면 문책 받을 사람이 한둘이겠나? 자… 이리로 와 앉으시게."

추 태감이 자리에 앉으며 두 사람이 맞은편에 앉기를 기다렸다. 단단히 각오하고 들어왔는데 뜻밖에도 추 태감의 태도가 부드러워 보이자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바쁜 두 사람을 부른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닐세. 이곳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두 사람만큼 아는 사람들이 없을 것 같고, 겨우 오늘 오후에야 들어온 본관으로서는 이곳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네."

엽락명과 곽정흠은 또 다시 안도의 숨을 돌렸다. 이제야 부른 목적이 분명해졌고, 자신들을 문책하기 위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아내가 어제(12일) 수술을 받게 되어 연재기사를 늦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아내가 어제(12일) 수술을 받게 되어 연재기사를 늦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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