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권에 지분이 있소, 주주로 대접해 주오"

[태종 이방원 86] 태종과 여자들

등록 2007.05.14 11:10수정 2007.05.14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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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도 여자입니다, 투기를 자극하지 마세요

혁명 피로감이 누적되었을까? 정상 정복을 위한 긴장감이 풀려서일까? 왕위에 등극한 태종이 술과 여자에 빠져 들었다. 좌명공신들이 사냥과 연회를 줄이라고 소를 올렸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야망의 길로 줄달음치던 그도 인간이기에 스트레스도 쌓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이자 혁명동지인 민부인을 제쳐두고 민부인의 몸종이었던 효빈 김씨를 총애하니 부인 민씨가 눈이 뒤집히는 것은 당연했다. 침전에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정비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전하, 전하는 이제 일국의 군왕이십니다. 옥체를 돌보셔야 합니다."

나직한 목소리였다. 왕비가 임금의 건강을 구실 삼았지만 정비의 핵심은 여자였다. 왕과 왕비를 떠나 지아비를 섬기는 아낙으로서 여자에게 빠져드는 지아비를 바라보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불만이 있거나 부탁하고 싶은 건수가 있을 때면 나직이 목소리를 까는 민부인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태종이었다.

"알았소이다. 내 몸은 내가 챙길 터이니 중전은 중전의 마음이나 지키시구려."

잔소리가 싫다는 뜻이다. 군왕으로서 정도는 지킬 터이니 의연하게 중전의 본분을 지키라는 주문이다.


"전하와 소첩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 어연 20년이 다 되었습니다. 험난한 길 헤쳐 전하께서 군왕에 오르고 소첩이 중궁전에 들어앉은 것이 광영입니다만 한편으로는 추동 옛집이 그립습니다."

여자에게는 '첫'이 아련한 추억 속에 항상 살아 있나보다. 2살 연하 꼬마신랑을 맞이하여 신접살림을 차렸을 때가 좋았다는 얘기다. 그땐 이방원도 과거에 급제하여 갓 출사한 초보 관료였고 순진한 젊은이였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대궐이 싫다는 말씀이오?"
"꼭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전하께서 아랫것을 가까이 하시니 소첩이 민망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랫것과 윗것에 차이가 있을까

아랫것들을 핑계 댔지만 자존심 상한다는 얘기다. 부인 민씨는 사저에서 몸종으로 데리고 있던 김씨를 태종이 가까이 한다는 사실을 시녀들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아랫것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게요?"

태종은 켕겼다. 하지만 먼저 이실직고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에 소첩이 몸종으로 데리고 있던 김씨 말입니다."

부인 민씨는 정곡을 찔렀다. 왕비도 여자이니만큼 질 줄 모르는 것이 여자의 한계다. 말을 마친 정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종 김씨가 하인으로 들어오던 날. 그렇게 예쁘지는 않지만 요기(妖氣)가 서려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치고 싶었지만 심성이 고와 받아들였던 것이 발등을 찍는 일이 되고야 말았다. 후회는 언제하나 늦다. 가슴을 치며 후회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군왕도 사내인 이상 처음부터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랫것도 여자이고 윗 것도 여자입니다. 위 아랫것 따지는 것은 천한 것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대단한 사고방식이다. 평등으로 봐주면 고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하향 평등으로 치마만 걸치면 여자라는 것이다. 틀린 말도 아니다.

상전은 여자 종을 가리지 않았지만 남자 종은 주인댁 딸이나 양가집 규수를 여자로 생각하는 것은 불경으로 생각했다. 스스로 천(賤)하다 선을 그어놓고 언감생심 넘겨다보지 못했다. 그러니 윗것 아랫것 가리는 것은 천한 신분의 전유물이라는 태종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천한 것들이라니요? 소첩이 천하면 전하도 천하여집니다."

정비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정비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격정이 섞여 있었다. 이러한 성격이 훗날 태종으로 하여금 폐비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했고 그 자신 폐비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것이오? 과인을 능멸하려 드는 것이오?"

태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신하가 임금에게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아비를 섬기는 아낙이 지아비에게 드리는 하소연입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궁지에 몰리면 남자라는 권위를 내세우는데 이제는 아니 됩니다. 소첩도 이제 지아비의 아들을 넷이나 낳은 지어미입니다."

정비의 목소리는 냉정을 되찾으며 절규에 가까웠다. 이 때 정비는 양녕, 효령, 세종에 이어 성녕을 낳고 심하게 앓고 있었다. 태종 못지않은 혁명 피로감에 지아비의 바람기마저 겹치니 지쳐 있었다. 아마 현대 의학을 공부한 의사가 진찰했다면 신경쇠약이나 산후 우울증으로 진단했을 것이다.

남자들의 배꼽 아래를 거론하지 마시오

"아녀자가 사내들의 배꼽 아래를 거론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다시는 그런 말 입 밖에 내지 마시오."

정비도 맘먹고 덤볐지만 태종 역시 단호했다. 이것이 자연인 이방원의 여성관이었고 당시 사대부들이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정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태종은 여기에서 물러서거나 늦춰주면 한없이 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들의 배꼽 아래에 대한 생각이 어쩌면 이렇게 일치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무력으로 권좌에 오른 군인이 2명이 있다. 그 중 한명의 육군소장은 유신으로 장기집권을 꾀하던 그의 재임 18년 동안 태종 이방원을 언론이나 학회에서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자신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부인 민씨와 한판 붙은 태종은 별거 아닌 별거에 들어갔다. 침전에 들지 않고 경연청에서 10여일 거처한 태종은 정비전(靜妃殿)의 시녀와 환관 20여 명을 내쳤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정비(靜妃)에게 일러바쳤다는 이유였다. 이것도 모자라 자신이 취한 궁녀들을 궁주(宮主)와 옹주(翁主)로 책봉하는 제도를 만들어 부인 민씨와 대립각을 세웠다.

여기에서 잠깐,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자식을 제일 많이 둔 임금 1위가 태종이다. 원경왕후 민씨를 비롯하여 제2부인 효빈 김씨, 제3부인 신빈 신씨, 제4부인 선빈 안씨, 제5부인 의빈 권씨, 제6부인 소빈 노씨, 제7부인 숙의 최씨, 제8부인 정의궁주 안씨, 제9부인 소의 최씨, 제10부인 명빈 김씨, 제11부인 소혜궁주 이씨, 제12부인 신녕궁주 고씨다.

공식 부인이 열 두 명이며 비공식 부인이 2명 더 있다. 기록마저 없는 후궁은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슬하에 12남 17녀 합 29명이다. 대단한 정력에 왕성한 생산력이다. 그의 아들 세종도 아버지 못지않다. 부인 6명에 18남 4녀 합 22명을 두었다. 태종에겐 무소불위의 힘도 있었지만 남자들이란 몰아세우면 고무공처럼 튀어나가는 성질이 있나보다.

그렇다고 물러설 원경왕후가 아니었다. 비록 여자 문제를 들고 나왔지만 자신은 혁명의 동반자요 이 정권에 일정부분 지분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을 한낱 아녀자로 취급하지 말고 주주로 대접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낱 동북면 촌뜨기에 불과했던 이방원을 오늘날 이 자리에까지 밀어올린 친정아버지 민제의 역할과 두 동생의 노고를 간과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현재 자신은 그 때의 이방원이 아니라 군주 이방원이라는 것이다. 한낱 아녀자의 지아비가 아니라 일국을 다스리는 군왕이라는 것이다. 왕권을 세우는데 최대의 걸림돌은 척신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자꾸만 자극하지 말라는 것이다. 왕비의 자리에서 의연하게 앉아만 있으면 그 자리를 지켜갈 수 있을텐데 무덤을 파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건드리면 다친다는 뜻이다.

태종 이방원과 부인 민씨의 생각은 판이하게 달랐다. 같지 않고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 상생의 길이 펼쳐지련만 서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러한 민부인과의 갈등이 훗날 민무질 민무구 등 처가로 비화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낌새를 눈치 챈 민무구가 매형을 도와 공을 세운 대가로 꿰어 찬 중군총제(中軍摠制)직을 사임했지만 희생의 칼날은 피해갈 수 없었다.
#원경왕후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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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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