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국경마을 수탉은 울음도 다르다

[내가 만난 아프리카 34] 끝없는 초원을 달리는 아프리카 길

등록 2007.06.23 18:00수정 2007.06.2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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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마을에서 발이 묶이다

르완다와 국경을 가르는 루수모 폭포 다리를 건너 5분 정도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가자 탄자니아 국경사무소가 나타났다. 미국 돈 50달러를 주자 바로 탄자니아 여행 비자를 내주었다.

국경사무소에서 탄자니아 국경 마을인 베나코(Benako)까지는 대중교통수단이 없었다. 나는 40대 아주머니와 아들, 딸 등 모두 4명인 탄자니아인 가족과 함께 택시를 타야 했다. 30km 정도 떨어진 베나코 마을까지는 30분 정도 걸렸다. 르완다 시간으로는 오후 2시쯤 도착했으나 탄자니아는 한 시간이 빨라 현지 시간으로는 오후 3시였다.

아루샤로 가기 위한 두 가지 경로인 카하마와 므완자로 가는 대중버스가 모두 끊겨 꼼짝없이 하루를 베나코에서 묵어야 했다. 아프리카의 두메에서는 대부분 교통편이 아침 일찍 한편 밖에 없어 대낮에 도착해도 이처럼 꼼짝없이 발이 묶이는 경우가 자주 있다. 여행은 때로는 기다림이다.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특히 그렇다.

나는 할 수 없이 허름한 숙소를 구해야 했다. "유툴리부(Utulivu)"라는 이름의 민박집 같은 여행객 숙소였다. 사각형의 간이 시멘트 건물에 침대 하나만 달랑 놓은 곳이다. 작은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방이 배치되어 있어 교도소 같은 느낌마저 준다. 시설 자체가 워낙 허름한데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조그만 국경마을의 여인숙이다 보니 가격은 2500탄자니아실링(2000원)에 불과했다.

내가 밤새 공포에 떨어야 했던 에티오피아 랄리벨라의 미니로하 호텔 가격의 절반도 안 되었다. 미니로하 호텔은 에티오피아 돈으로 40비르(4700원) 정도였다. 물론 베나코 국경마을의 숙소도 방 안에는 전기가 없고 세수도 커다란 물통에 담은 물을 작은 세숫대야에 떠서 고양이 얼굴 씻듯이 해야 하고, 화장실도 조그만 시멘트 구멍에 잘 맞춰서 일을 봐야 했다.

국경마을인 베나코는 관광지가 아니라 단지 다음 목적지를 가려는 뜨내기 여행객의 하룻밤 거처이기 때문에 굳이 좋은 숙박시설이나 편의시설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숙소의 화장실에는 "코조와 하파(Kojowa Hapa)"라는 글씨가 벽 중간에 쓰여 있고, 밑으로 화살표 표시를 해놓았다. 화살표를 따라 가니 시멘트 바닥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아마도 이 구멍에 생리현상을 해결하라는 뜻인가 보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어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숙소에서 나와 도로를 따라 산책을 하는 데 마을 어린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모두 맨발로 축구를 하고 있었다. 남자어린이와 여자어린이 7~8명이 검은 비닐봉지를 똘똘 말아서 축구공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국경마을의 두메에는 제대로 된 축구공 하나 없다. 나도 어울려 그들과 함께 축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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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라 강을 기준으로 사진 오른쪽 언덕 위가 탄자니아 루수모 국경사무소이고 왼쪽은 르완다 국경 ⓒ 위키피디아


아프리카 국경마을에서는 수탉의 울음소리도 굵다

100여 가구가 채 안 되는 베나코는 전형적인 국경마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래전에 깔린 아스팔트 도로 옆으로 허름한 식당이 선술집처럼 3~4개 정도 있고, "머리 자름(Hair Cut)"이라는 영어로 된 이발소 간판이 한 개 있고, 하드록 카페도 있고, 맥주집도 있다.

길거리 옆에는 짐을 실어 나르기 위한 3대의 대형 트레일러트럭들이 쉬고 있었다. 지난 1994년 르완다 대학살 때는 은가라와 함께 베나코에 르완다 난민촌이 건설됐던 곳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이 적막한 산악마을이다.

내가 묵은 숙소 입구 옆에는 포켓볼 2대가 놓여 있었는데, 아프리카 젊은이들이 놀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은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희미한 전등 밑에 포켓볼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포켓볼 경기에서 진 젊은이가 이긴 상대방에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리무케"라고 소리치며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탄자니아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아프리카 젊은이들이 포켓볼에 열중하는 것을 보았다. 특별한 놀이 기구가 없는 아프리카 젊은이들에게 포켓볼은 인기 있는 놀이로 자리 잡고 있었다.

수많은 별들과 초승달이 베나코 국경마을의 지붕 위에 떠 있는 것을 보면서 자정쯤 잠이 들었다. 삐거덕거리는 침대에 누웠는데, 새벽닭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때가 새벽 5시쯤. 새벽 6시에 맞춰놓은 자명종이 울리기 전에 닭 울음소리에 일찍 일어난 것이다.

국경 수탉들의 울음소리는 에티오피아 랄리벨라의 닭들보다도 왜 그리도 크고 굵게 울어대는지 모르겠다. 베나코의 닭소리는 "꼬끼오, 꼬꼬"가 아니라 "꾸끼우, 꾹꾹"처럼 바리톤으로 들린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수탉들은 자신들이 깨우지 않으면 여행객이 새벽 첫차를 놓칠까봐 그렇게 크게 우나보다.

수탉의 울음소리에도 어둠은 물러가지 않았다. 컴컴한 국경의 밤은 어둡기만 하다. 촛불로 방안을 밝힌 뒤 밖으로 나왔다. 새벽별이 여전히 내 머리 위에 비추고 있다. 어두운 하늘과 암흑의 땅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광채이다. 플래시를 들고 나와 대충 얼굴을 씻었다. 국경마을의 밤하늘에 여전히 별이 총총한데 새벽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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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와 탄자니아의 국경을 가르는 루수모 폭포 다리 ⓒ 김성호


새벽별을 보고 떠나는 아프리카 여행

르완다의 국경을 넘어 국경마을 베나코를 거쳐 사파리의 도시인 탄자니아 아루샤로 가는 2박 3일은 아프리카 여행 중 최악의 길이었다. 험하고 힘든 여정과 피곤함이 겹쳐서 다시 여행한다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추억이다.

새벽 6시 30분에 카하마로 떠나는 봉고버스에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모두 현지인이다. 전날 르완다 루수모 국경을 넘는데도 외국 여행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부분 여행객들이 르완다에서 다시 도로가 좋은 우간다로 돌아간 뒤 케냐 나이로비를 거쳐 탄자니아의 아루샤로 가기 때문이다.

내가 간 르완다의 루수모에서부터 탄자니아 베나코, 카하마. 싱기다를 거쳐 아루샤로 가는 길은 대부분 비포장도로로 길이 험하고, 교통편도 부족하고, 볼거리도 많지 않아 여행객들이 거의 가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지도상의 위치만으로 '단계별 여행'을 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역시 교통수단 등의 정보를 고려하지 않아 생고생을 해야 했다.

단계별 여행이란 장거리 여행에서 한 번에 직접 이동할 수 없는 경우 여러 번 경유지를 끊어서 쉬어가며 이동하는 방법. 길이 너무 멀거나 험해서 한 번에 이동하는 것이 무리거나 교통편이 없을 때는 단계별 여행을 할 수 밖에 없다.

아침 6시 30분에 출발한다던 버스는 한 시간이나 늦은 7시 30분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11인승 버스에 15명 정도 꽉 채우고서야 떠난 것이다. 다시 승객이 꽉 차야 출발하는 '아프리카 버스'로 되돌아 온 것이다. 케냐에서는 마타투라고 부르는 미니버스나 봉고버스 같은 서민들의 대중교통수단을 탄자니아에서는 달라 달라(Dalla Dalla)라고 불렀다.

나는 전날 베나코에서 므완자를 거쳐 아루샤로 갈까하는 고민을 했으나 결국 므완자행을 포기했다. 므완자에서 아루샤로 가는 교통편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세렝게티 공원에서 므완자에서 아루샤로 가는 대형버스를 보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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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국경 근처의 나무에 지은 새집 ⓒ 김성호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 위를 달리는 버스

베나코에서 카하마(Kahama)까지는 도로가 잘 깔려 있었다. 아침 해가 뜨면서 드러나는 탄자니아의 들판은 온통 사바나 초원이었다. 작은 나무와 거친 풀들로 덮인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달려도 달려도 긴 사바나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지평선이 끝나면 초원도 멈출 줄 알았는데, 그 초원 너머에 또 다른 지평선이 나타났다. 내가 탄 버스와 지평선은 초원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달리고 멀어지는 지루한 싸움을 계속 했다. 끝내 승부는 나지 않았다. 도로도 이제는 한 줄의 선처럼 지루하게 늘어졌다.

간혹 소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장면만이 여행객의 지루함을 달랜다. 사자나 기린 등 야생 동물들만 있다면 세렝게티 초원이 따로 필요 없을 것 같다. 탄자니아 전체가 세렝게티니까.

지루한 초원의 도로에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버스가 중간에 내릴 때마다 삶은 계란과 바나나, 구운 땅콩, 생수를 파는 행상들이 몰려들었다. 두 마리의 소가 수레에는 고구마를 가득 담은 자루가 20여개나 실려 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는 이 수레를 능숙하게 끌고 가고 있었다. 땔감으로 팔기 위해 큰 자루에 담은 숯이 길거리에 높이 쌓여 있었다.

3시간 정도 달리자 영어로 "교도소(Prison)"라고 쓰인 팻말도 있는데, 아마 근처에 교도소가 있나보다. 또 다른 대형 거리 광고판에는 남자가 여자를 등 뒤에서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는 장면과 함께 "살라마 스터즈(Salama Studs)"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탄자니아의 대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큰 도로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고판이다. 콘돔 상표이름이다.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을 예방하고 건강한 성생활을 위해 콘돔을 사용하라는 광고이다.

갑자기 복통증상이 일어났다. 배가 슬슬 아프고 장염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어제 저녁 국경마을 베나코에서 저녁으로 생선을 먹은 것이 탈이 난 것이다. 그렇잖아도 냉장고도 없는 국경마을의 허름한 식당에서 생선을 먹어도 되나하는 걱정이 앞섰는데 역시 탈이 났다.

마침 차가 초원의 작은 마을에 섰다. 마을 뒤편의 넓은 초원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했다. 아프리카 여행 중 생리현상은 마을이나 들판에 차가 잠시 머물 때 요령껏 해결해야 한다. 생선에 놀란 나는 그 이후 여행 내내 생선은 거의 입에 대지 않고 닭고기로 때웠다. 음식을 조심하다보니 아무런 탈 없이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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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농촌의 모습 ⓒ 김성호


시골 생활은 어디나 고달프다

베나코에서 출발한 버스는 루사훈가와 니아카나지, 부콤베를 거쳐 낮 12쯤 카하마에 도착했다. 4시간 30분 정도 걸린 셈이다. 시간상으로는 싱기다 지역까지 더 갈 수 있는데, 카하마에서 아루샤까지 직접 가는 버스가 내일 새벽 6시에 있단다. 카하마에서 하루를 묵은 뒤 바로 아루샤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카하마 버스터미널은 조용한 르완다와는 전혀 달랐다. 시끌벅적한 에티오피아 버스터미널에 다시 온 것 같은 느낌이다. 먼지가 휘날리고 호객꾼들이 달라붙었다. 한 젊은이가 나를 버스 사무실로 이끌어 다음날 아침 아루샤 직행 버스표를 예매했다.

배가 고파 우선 버스터미널 근처의 식당부터 찾았다. 대부분이 먼지가 날리고 지저분한 식당뿐이어서 터미널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니 깨끗한 식당이 보였다. '쿨 브리즈 바(Cool Breeze Bar)'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원두막 형태로 야외에 나무그늘 집 같은 식탁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다.

닭고기와 밥으로 식사를 한 뒤 식당 직원에게 숙소를 소개시켜달라고 하자 근처의 깔끔한 여행객 숙소로 안내했다. 록 랜드 롯지(Rock Land Lodge)라는 이름의 숙소였다. 버스정류장 주변은 허름한 여인숙과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저녁에도 다시 그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야외 식탁에서 맥주를 마시고, 젊은이들이 포켓볼에 열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에게 숙소를 소개시켜준 20대 중반의 베나트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 직원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나는 지방도시의 삶이 궁금했다.

"요즘 장사가 잘 되느냐?"
"경제가 어려워 살기 어렵다. 우리 지역은 쌀과 면화가 주생산물인데 면화사업이 사양이어서 무척 어렵다."
"다른 일할 공장은 없나?"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다. 농사 이외에 다른 재주가 없어 살기가 힘들다."

탄자니아의 주요 수출작물은 커피와 면화, 차와 사이잘인데, 아프리카 시골은 아직까지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오니 텔레비전에서 'ITV'라는 방송이 나왔다. 독일 월드컵 중계는 영어로 방송을 하고, 뉴스는 스와힐리어로 방송하는 이중 언어 방송을 하고 있었다. 위성방송이라고 하는 이 채널은 탄자니아 뿐 아니라 에티오피아와 케냐, 우간다, 르완다 등지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범아프리카 방송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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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농촌의 야산 ⓒ 김성호


버스표가 있는데도 버스를 타지 못하는 아프리카

카하마에서의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새벽 5시30분 서둘러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어두운 길이어서 숙소직원이 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 이미 버스는 승객들로 가득했다. 승객이 꽉 차자 6시 출발 버스가 5시 50분에 출발했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버스가 출발시각보다 먼저 떠난 것도 처음이다. 조금 늦게 나왔으면 차를 놓칠 뻔했다. '초음속 버스(Super Sonic Bus)'라고 버스 옆면에 써 붙여 놓았으나 크기만 컸지 속도나 중간에 자주 서는 것은 달라 달라와 마찬가지였다.

30분쯤 달리자 마을입구에 학생 등 60여명이 한꺼번에 차에 올라탔다. 월요일 아침 학교에 가는 학생들이었다. 이미 출발할 때 꽉 찬 좌석에다 입석으로 60여명이 더 탔으니 버스가 터질듯 하다. 40여명이 차에 올랐으나 더 이상 탈 공간이 생기지 않아 20여명이 타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젊은 남자 차장이 차 뒤쪽으로 와서 입석 승객들을 안으로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나머지 20명이 탈 공간이 만들어진 것. 마치 가을걷이를 한 볏단을 세우듯 승객들을 차곡차곡 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내가 앉은 자리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창문이 떨어져 나가 없었다. 새벽의 차가운 바람이 그대로 얼굴에 부딪히는 것이 겨울의 찬바람을 쐬는 것 같이 날카롭다. 그렇게 3시간을 달려 은제가(Nzega)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어제 아루샤 가는 직행버스 표를 팔았던 젊은이가 같은 버스를 타고 와서 은제가에서 아루샤로 직접 가는 버스를 다시 태워주겠다고 한다. 카하마에서 아루샤 가는 직행버스가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 오전 10시께 아루샤로 가는 버스가 오긴 했으나 이 버스도 탈 수가 없었다. 이미 좌석과 입석이 모두 차서 더 이상 승객을 태우지 않고 그냥 출발해 버렸다.

어떤 승객은 터미널에 있는 여자 경찰관에게 버스가 그냥 갔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나에게 아루샤 직행버스 표를 팔았던 젊은이는 싱기다(Singida) 가는 버스를 잡아 줄 테니 싱기다에서 다시 아루샤 가는 직행버스를 타라고 한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직행버스로 해서 표 값을 모두 지불했던 것이다.

이 젊은이는 이번에는 싱기다 가는 버스가 도착하자 먼저 올라타 운전석 뒤의 짐 싣는 자리에 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젊은이는 불안해하는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차에서 내린 뒤 창문으로 "킴"이라고 내 이름을 다정스럽게 부르며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젊은이의 얼굴에서 낯모르는 여행객이지만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버스 표 때문에 약간의 금전적 손해를 봤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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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루수모 국경에서 탄자니아 아루샤까지의 2박 3일 코스 ⓒ 미 CIA


먼지 속을 달리는 죽음의 길

은제가에서 출발한 버스가 싱기다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좌석도 짐칸에 임시로 만든 자리다 보니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싱기다까지 오는데 무려 3번이나 경찰관이 검문을 했다. 범인 수색이 아니라 승객정원 초과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형버스인 시외버스의 경우에는 대도시에 가까워 올수록 정원 초과를 단속하고 있었다.

2시간가량 포장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비포장도로로 빠지더니 한 마을에서 사람들을 내려 놓은 뒤부터 계속 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세켄케(Sekenke)라는 지역이었다. 이곳부터 싱기다를 거쳐 아루샤까지 가는 길은 정말 지옥의 도로였고, 죽음의 길이었다.

두 갈래 길이 나타나자 운전사도 잠시 당황하더니 언덕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급경사의 높은 산언덕을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나마 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10여분 동안 꿈쩍도 않고 기다렸다. 좁은 언덕길을 내려오던 대형 트럭이 굽잇길에 빠져 한쪽 차선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대형 트럭 때문에 오고가는 차량들이 번갈아 가면서 올라가고 내려가야 하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싱기다까지 오는 길은 내내 먼지를 뒤집어 써야 했다. 곳곳에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반대 차선에서 오는 옆 차나 뒤에서 오던 차가 앞지르기를 할 때면 흙먼지가 마치 황사 현상처럼 누렇게 날리면서 차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날씨는 덥고 먼지가 모래바람처럼 들어오니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다.

등받이 없는 짐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몇 시간을 오다보니 온몸이 마비가 되는 것 같았다. 먼지 숲 속을 달려가는 느낌이다. 세켄케에서 싱기다까지의 2시간 30분은 최악의 먼지 길이었다.

은제가에서 출발한 차는 세켄케를 거쳐 4시간 30분이나 걸려 오후 3시쯤 싱기다에 도착했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싱기다에서 아루샤로 가는 버스가 없으면 하루를 묵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그때 20대의 젊은이가 "아루샤, 아루샤"하면서 아루샤로 가는 승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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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루샤 가는 길에 있는 하낭 산의 모습 ⓒ 김성호


아루샤로 가는 요철의 길

나는 막 출발하려는 대형 버스에 올라탔다. 좌석은 맨 뒤쪽에서 첫 번째 오른쪽 복도 쪽이었다. 이미 차에는 승객들로 만원이었다. 차 천장에서 "쿵, 쿵"하는 소리가 들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차 지붕 위에 예비용 타이어를 4개가 싣고 있었다. 차 지붕 위에 실은 타이어를 떨어지지 않도록 밧줄로 창문 틈새에 꽁꽁 묶은 뒤 출발했다. 그때가 오후 3시 20분쯤.

내 앞자리 창가 쪽에는 핸드폰을 든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탔다. 아프리카에서도 핸드폰은 돈 많은 젊은이들의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핸드폰은 아직 널리 사용되지 않았으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는 듯 했다.

땅이 넓고 열대우림의 숲이 우거진 아프리카에서 무선의 핸드폰만큼 좋은 통화수단은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처럼 넓고 이용객이 적은 곳에 유선 전화를 까는 것은 몽골의 초원에 전화선을 설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이 떨어질 테니까.

탄자니아 버스를 타고 오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달리는 차안에서 쓰레기를 길거리에 함부로 버린다는 것이다. 핸드폰을 든 젊은이뿐만이 아니었다. 음료수나 생수를 마신 다음 그냥 차안에 두면 버스터미널에서 한꺼번에 치우면 될 텐데, 모두가 차창 밖으로 길거리에 그냥 버리고 있었다.

싱기다에서 아루샤로 가는 길은 먼지뿐만 아니라 험한 산악 길이서 더욱 힘들었다. 잘 포장된 수도 도도마를 거치지 않고 지름길로 가려다보니 산길을 따라 비포장도로를 가고 있었다. 내 길은 싱기다에서 카테쉬와 은다레다를 거쳐 바바티와 음부그웨, 마쿠유니를 거쳐 아루샤로 가는 노선이었다.

은제가에서 싱기다가 '먼지의 길'이라면 싱기다에서 아루샤의 길은 '요철의 길'이었다. 처음 2시간 황톳길을 달리던 버스가 비탈길에 들어서면서 버스가 하늘에 닿았다가 다시 땅에 떨어지는 등 흔들림이 보통이 아니었다. 두 손은 앞 등받이를 꽉 잡고 차가 튀어 오를 비상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뒷좌석에 앉았기 때문에 언제 갑자기 차가 튀어 오를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베나코 #카하마 #싱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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