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이족에 노예가 없는 이유

[내가 만난 아프리카 39] 마사이족 마을과 '인류의 고향' 올두바이 계곡

등록 2007.07.14 12:44수정 2007.07.1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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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4일의 세렝게티 사파리를 모두 마치고 아루샤로 돌아가는 날이다. 돌아가는 길에 마사이부족 마을과 올두바이 계곡을 방문하게 되어 있었다. 세렝게티 공원의 매표소를 막 벗어나는데, 초원에는 하이에나가 어슬렁거리고 독수리들이 썩은 고기를 먹고 있었다.

마사이 부족 마을과 올두바이 계곡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렝게티 국립공원과 응고롱로고 분화구 사이였다. 킬리만자로 산을 중심으로 한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 보호구역은 수백 년 동안 마사이족이 소와 염소, 양 등을 치며 살아온 고향이다.

작은 마사이 마을은 지나치고 가장 크다는 마사이 마을을 찾았다. 아카시아 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초원에 초라한 20여 채의 집들이 모여있었다. 마사이 마을을 방문하는 데는 약간의 입장료를 내야 했다.

마사이족이 집을 쇠똥으로 짓는 이유는?

마사이(Masai)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목에 하얀 접시 같은 둥근 목걸이를 건 아이들 5명이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뒤로 20여명의 여자들과 15명 정도의 남자들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란히 나눠 서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환영했다. 마사이 전통의 손님맞이 행사인 셈이다. 남녀 모두 키가 큰 것이 다른 아프리카 부족과 달랐다.

쇠똥으로 지은 집과 이들이 입고 있는 옷만 봐도 마사이족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남자들은 붉은 색과 자주색의 천 같은 담요를 걸치고 한 손에는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붉은 색과 파란 색의 천을 걸친 여자들은 구슬 장식의 하얀색 접시모양의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모두 어른들과 같은 옷을 걸치고 장식을 하고 있었다. 마사이의 특징은 남녀 모두 화려한 치장과 구슬모양의 장식을 한다는 점이다. 부족의 표시로 두 귀에 구멍을 뚫어 귀걸이를 하는 전통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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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똥과 풀로 지은 마사이족 집 ⓒ 김성호

남성들은 막대기를 들고 차례로 돌아가며 하늘 높이 뛰면서 춤을 추고, 여자들은 무릎만 살짝 구부린 채 춤과 노래를 불렀다. 남자들이 껑충껑충 하늘로 뛰는 춤을 추는 데에는 용맹을 과시하면서 하늘과 가까워지려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남성미를 과시하여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몸짓이라고도 한다.

마사이 마을의 집들은 울타리 안에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마을 둘레에 쳐진 가시가 달린 나무 울타리는 다른 부족이나 야생 동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다. 집은 쇠똥과 진흙을 섞어서 만든다.

집 지을 때 쇠똥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 소를 기르다 보니 쇠똥을 구하기 쉬운데다 쇠똥에는 섬유질과 기름기가 있어 우기에 비바람에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날씨가 서늘해지는 때에는 건축 재료로 썼던 쇠똥을 뜯어내 불을 피우는 연료로 사용할 수도 있다. 쇠똥은 이처럼 마사이족에게는 다목적 재료다.

마사이족은 노예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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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높이 뛰는 춤을 추며 여행객들은 맞는 마사이족 남자들 ⓒ 김성호

마을 안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는 3명의 마사이족 여자들이 소에서 짠 우유를 길쭉한 호리병 모양의 가죽 통에 담고 있었다.

이처럼 소는 마사이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우유는 매일 매일의 양식으로 사용되고, 피는 영양보충으로 활용하고, 쇠똥은 집을 짓거나 연료로 사용하고, 오줌은 아픈 곳의 살균소독제나 머리를 감는 데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죽은 소는 고기로 이용된다.

마사이족과 가축과의 관계는 탄생신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은가이(Ngai)'라는 신이 하늘나라에서 마사이족을 지상으로 내려 보낼 때 소와 양, 염소를 같이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마사이족은 애초부터 유목민으로 살도록 태어났다.

유목민으로 계절에 따라 물과 초원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가축을 지켜야 하는 마사이족들이 용맹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부족으로 널리 알려졌다. 남성들은 평소에도 칼과 창으로 무장해 다니는 전사다.

19세기에 성행한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빅토리아 호수와 탕가니카 호수, 말라위 호수 등 내륙지역 깊숙이까지 손길을 뻗쳤으나 마사이족이 살고 있는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까지는 진출하지 못했다. 마사이족의 용맹성이 노예상인들의 노예사냥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사이족이 노예로 끌려간 경우도 거의 없다.

이 곳 마사이 마을에서도 남자들은 모두 긴 막대기를 들거나 나무 막대기 끝에 철제로 만든 창을 들고 있었다. 전사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족장인 키가 큰 젊은 마사이가 쇠똥 집 안으로 나를 안내한 뒤 방 구조를 설명했다. 방 안에는 남편과 부인 침대, 아이들 침대 등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가운데는 추위를 덜기 위한 화로가 놓여 있었다. 침대라고 해봐야 땅 바닥에 나뭇가지를 깔고 그 위에 가죽을 덮은 정도다.

마사이 집의 특징은 아예 방문이 없다는 것이다. 이웃 사람들과의 소통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개인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도시 사람들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문화다. 마을 울타리에는 전통 목걸이와 팔찌, 악기 등을 매달아 놓고 팔고 있었는데 목걸이와 팔찌는 미국 돈 10달러를 받고 있었다. 마사이족은 화려하고 뛰어난 예술전통을 갖고 있다.

초원에서 영어 배우는 마사이족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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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 갈대와 나무로 만든 마사이 학교의 선생님과 학생들 ⓒ 김성호

방안에서 나온 족장은 나를 마을 뒤쪽의 나무집으로 안내했다. 마사이 학교였다. 어린이 30여 명에 한명의 남자 교사가 있었다. 어린이들은 내가 들어서자 일제히 "잠보! 탄자니아"라고 인사했다. 어린이들은 마침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교사가 한 학생을 칠판 앞으로 불러내어 "11~30"까지의 아라비아 숫자를 영어로 크게 읽도록 했다.

칠판에는 스와힐리어도 함께 적혀 있었다. 아프리카 대초원에서도 세계화 시대에 맞는 현대적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표정도 진지했다. 마사이족에게 불어 닥치는 현대화 바람의 현장이다.

족장은 "여행객들의 입장료는 어린이 교육과 환자 치료비용으로 사용된다"며 "점점 살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족장은 현재 이곳 마을에는 20여 가족에 125명의 어른아이들이 함께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사이족들이 유목을 하던 대평원은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국립공원과 동물보호 구역으로 지정됐다. 이에 따라 유목할 곳이 사라지고 있다. 탄자니아 정부의 대대적인 마사이족 재정착 정책 등으로 응고롱고로 분화구의 유목민 등 일부만 반유목 생활을 하고 대부분은 도시로 진출하거나 농업이나 반농반유목의 정착생활을 하고 있다.

자연과 공존해 온 마사이족은 이제 도시와 공존하는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마니아라 호수의 은자케 캠핑장의 여직원 크리스티나처럼 여행객 숙소 직원으로 취업하든 장사든 사무직이든 사업이든 농업이든 정착의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정착생활을 하면서 남자의 성인식이나 여성의 할례, 다른 부족의 가축 약탈 등의 전통은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 마사이족의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은 삭막한 환경에서 끊임없이 집단 이동해야 하는 유목생활이 빚어낸 결과인데, 이제 이것이 사라지니 그 전통도 사라지는 것이다. 여성의 음부 일부를 잘라내는 여성할례는 케냐와 탄자니아에서도 모두 야만적인 행위로 불법이다.

유목민의 만성적인 기아 극복과 야생동물보호를 위해 마사이족의 정착은 불가피하겠지만 야만적인 여성할례 등을 제외한 고유한 부족의 정체성과 전통문화는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의 머나먼 고향 올두바이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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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류화석이 발견된 올두바이 계곡 ⓒ 김성호

마사이 마을에서 나와 30여분 정도 달리다 왼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인류의 고향 중 하나인 올두바이(Olduvai) 계곡이 있다. 올두바이 계곡은 여행객이 특별히 가자고 하지 않으면 사파리 차량이 그냥 지나치는 곳이다.

올두바이 계곡은 세계에 가장 오래 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곳이자 인류 진화를 보여주는 고대 화석이 발견된 현장이다. 인류의 먼 조상들이 이곳 계곡에서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살았던 것이다. 지금은 황량한 사막 계곡이지만 수백만 년 전에는 호수와 푸른 나무들이 울창한 인류와 동물들의 지상낙원이었다.

올두바이 박물관 앞쪽에는 여행객들을 위한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전망대에서는 고대 인류화석이 발견된 올두바이 계곡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박물관 안내자가 여행객들을 상대로 이곳에서 발견된 화석과 인류의 진화과정 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안내자는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한 가운에 세워져 있는 작은 돌기념판이 1959년 메리 리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라 불리는 고대 인류화석을 발견한 장소라고 말했다. 전망대의 오른쪽 검은 계곡에서는 코끼리 등 동물 화석이 대량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전망대 바로 아래의 계곡 가운데에는 우뚝 솟은 퇴적암이 성곽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올두바이 계곡의 벽은 여러 겹의 다른 색깔 옷을 입은 듯 뚜렷한 단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내자는 "벽에 나타난 5개의 단층에서 시대별로 수많은 인류와 동물의 화석이 발견되었다"며 "우리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은 4번째 단층"이라고 말했다.

오래전 화산재로 뒤덮였던 올두바이는 50만 년 전 지진활동에 의해 땅이 갈라지면서 지층이 단면을 드러낸 것이다. 올두바이는 바로 에티오피아에서 케냐를 거쳐 내려오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중간지대.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나선 리키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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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하빌리스(위)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 화석(아래) ⓒ 김성호

내가 지금 내려다보는 이 곳 올두바이 계곡에서 영국의 고고인류학자인 루이스 리키와 메리 리키 부부가 1930년대부터 인류 진화를 연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마운틴고릴라의 어머니로 불리는 다이안 포시가 1963년 루이스 리키 박사를 찾아와 유인원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된 곳도 바로 이 계곡이다.

리키 부부와 가족들이 이 곳에서 거둔 쾌거는 놀랍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와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등 인류 진화 과정의 중요한 '잃어버린 고리'들을 발견한 것이다.

부인 메리가 1959년 두발로 서서 걸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라 불리는 180만 년 전의 인류화석을 발견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강한 턱뼈와 어금니로 '호두 까는 사람'이란 뜻의 진잔트로푸스라고도 불린다. '보이세이'는 자신들의 연구를 지원했던 미국의 사업가인 찰스 보이세(Charles Boise)에서 따온 것이다.

1960년에는 큰아들인 조나단이 석제 도구를 제작한 최초의 선행인류인 호모 하빌리스를 발견하고, 루이스 리키는 최초로 불을 사용하고 사냥을 시작한 호모 에렉투스 화석을 찾아냈다. 그들의 둘째 아들 리처드는 1972년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에서 190만 년 전의 호모 하빌리스와 비슷한 호모 루돌펜시스를 발견했다.

인류는 600만 년 전 침팬지에서 갈라져 직립보행을 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시작으로 300만 년 전 도구를 사용하는 구석기 시대의 호모 하빌리스, 150만 년 전 불을 사용하는 호모 에렉투스(자바원인과 베이징원인), 10만 년 전 생태계를 정복한 호모 사피엔스(네안데르탈인), 4만 년 전 동굴의 벽화 등 예술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의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크로마뇽인)로 진화를 해왔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은 뒤 나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방은 올두바이 전시관으로 올두바이에서 발견된 고대 인류 화석과 동물 화석, 돌기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리키 박사 부부의 발굴과정 사진과 고대 화석, 돌 기구, 동물 뼈 등이 있었다. 올두바이 문화라고 불리는 구석기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전시실이다.

인류 최초의 직립보행 증거인 라에톨리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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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에톨리 발자국(아래)과 주인공의 가상도 ⓒ 김성호

두 번째 방은 라에톨리 전시관이다. 올두바이 전시관과는 달리 인간의 발자국과 동물의 발자국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어 관심을 끌었다.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사람의 발자국 화석이다. 라에톨리(Laetoli) 유적지의 화산재에서 발견된 초기 인류의 발자국 화석을 그대로 본 뜬 석고 틀(Cast)이다.

메리가 1978년 올두바이 계곡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라에톨리에서 발견한 고대 인류의 발자국은 인류의 진화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무려 360만 년 전의 인류 발자국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라에톨리 발자국의 주인공은 지난 1974년 도널드 요한슨이 에티오피아 하다르 지역에서 발견한 320만 년 전 인류 최초의 어머니 루시와 같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이다.

라에톨리 발자국은 루시와 달리 두발로 서서 걸은 직립보행의 최초의 직접적 증거라는 점에서 놀라운 화석이다. 루시는 직립보행에 적합한 신체구조라는 점에서 두발로 서서 걸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지만, 라에톨리 발자국은 그 자체가 초기 인류가 두발로 서서 걸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직접 증거이기 때문이다.

라에톨리 발자국은 모두 3명의 것인데, 두 명은 앞서 나란히 걸어갔고 세 번째 사람은 그들의 발자국을 밟으며 뒤따라갔다. 발자국이 화석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근처의 화산활동으로 인한 화산재가 물렁물렁한 상태에서 우연찮게도 세 사람이 그 위를 걸어가면서 흔적을 남겼고, 그 뒤에 비가 내려 시멘트처럼 굳어진 흔적이 그대로 땅에 묻히면서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있는 석고 틀을 보더라도 지문처럼 선명하게 남은 발자국의 흔적에 놀라게 된다. 360만 년 전의 발자국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고, 바로 엊그제 사람이 지나간 것처럼 생생하다.

라에톨리 발자국과 에티오피아의 루시는 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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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두바이 계곡에서 발견된 동물의 화석 ⓒ 김성호

라에톨리 발자국의 석고 틀 위에는 당시 세 사람이 어떻게 걸어갔을까를 상상해 그린 그림이 있어 여행객의 이해를 돕고 있었다. 석고 틀의 발자국과 그림을 보니 세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이 머릿속에 다가왔다.

화석에 남은 발자국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발뒤꿈치를 먼저 땅에 딛고 깊게 누른 다음, 발바닥을 뒤에서부터 차례로 대었다가 마지막으로 엄지발가락을 힘차게 누르면서 걸어갔다. 인간과 같이 엄지발가락이 다른 발가락과 나란히 찍혀있고, 균형을 잡으며 일직선으로 걸어갔다는 점을 통해 인간의 발자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침팬지는 엄지발가락이 인간의 손과 같이 검지 등 다른 발가락과 붙어 있지 않고 벌어져 있다. 침팬지의 엄지발가락은 나무에 오를 때 잡는 힘으로 사용하기 위해 벌어져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두 발로 서서 상체의 균형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터벅터벅 걷는 등 걸음걸이도 다르다. 박물관에는 석고 틀 옆에 이해를 돕기 위해 원숭이의 발과 사람의 발을 비교한 사진도 걸어 놓았다.

루시와 달리 라에톨리 발자국은 그 주인공의 나이와 성별을 알 수 없다. 신체구조나 DNA 검사를 할 수 있는 뼈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자국 흔적만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발자국의 크기와 보폭 등을 통해 두 개는 키 155㎝ 정도의 남자이고, 다른 작은 하나는 키가 작은 120㎝ 정도의 여자라고 추정할 뿐이다.

앞에서 나란히 걸은 큰 발자국과 작은 발자국은 남자와 여자 짝이고, 뒤에 홀로 따라오면서 앞의 발자국 위를 밟고 간 세 번째 발자국은 성인 남자로 보인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 이들은 물웅덩이를 찾아 나선 핵가족으로 추정할 뿐이다.

라에톨리의 작은 여자 발자국은 에티오피아 하다르 지역에서 발견된 루시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아닐까. 라에톨리를 떠난 여자 발자국의 주인공이 에티오피아 하다르 지역에 정착해 40만 년 뒤 루시의 화석으로 환생했을지도 모른다. 라에톨리의 여성은 발자국만 있고 뼈는 없는데, 루시는 뼈만 있고 발자국은 없으니 둘을 합치면 완벽한 '두발 서서 걷기'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상상의 날개를 달아보았다.

아카시아 나무에 훼손될 뻔 한 라에톨리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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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흙으로 메워 보존 중인 라에톨리 발자국 발견 장소 ⓒ 위키피디아

이처럼 인간이 남긴 작은 흔적도 이렇듯 역사에서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인류의 유산 중 화석으로 남지 않는 유일한 것은 언어다. 언어를 화석으로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록뿐이다. 고대 4대 인류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기록문화의 전제요건인 문자를 가졌다. 이집트 문명의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설형문자), 인더스의 그림문자, 황화의 갑골문자 등.

어렵게 찾은 인류 최초의 발자국인 라에톨리 발자국을 우리는 영원히 잃을 뻔 했다. 라에톨리 발자국을 발굴한 메리는 나무의 진(수지)을 이용해 원형의 발자국 본을 뜬 뒤 다시 흙으로 메웠다. 발자국 원형의 부식과 파괴를 막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않았던 아카시아 등 각종 나무의 뿌리들이 화산 응회암으로 된 발자국 유적지까지 뻗어 흔적이 심각하게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 탄자니아 문화재청과 미국의 학자들이 나서 아카시아 뿌리 등을 제거하고 원형을 복원한 뒤 다시 흙으로 메워 잘 보존하고 있다.

라에톨리 전시관에는 인류의 발자국 뿐 아니라 코끼리와 물소, 원숭이 등 20여종의 다양한 동물의 발자국도 전시하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또 1997년 당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현 상원의원이 딸 첼시와 함께 이곳을 방문한 사진도 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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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두바이 계곡에서 발견된 각종 구석기 돌 기구 ⓒ 김성호

박물관을 나오자 바로 옆에 기념품 판매점이 있었다. 나는 올두바이와 라에톨리 유적 발굴과정을 담은 팸플릿 형태의 <올두바이와 라에톨리(OLDUVAI and LAETOLI)>라는 소형 책자를 샀다. 이 책자에는 라에톨리 발자국과 1969년 인간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국 우주사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 사진을 '인류 최초의 두 발자국'이라는 제목으로 비교해 놓았다.

재미난 비교라고 생각했다. 지구와 달에 각각 새겨진 최초의 발자국이기 때문이다. 수백만 년 후 지구가 멸망한다면, 우주의 주인이 될 제3의 생명체가 달에 남겨진 암스트롱의 발자국 화석을 보며 인류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게 될지 누가 알랴. 라에톨리 발자국을 보며 360만년 뒤의 우리가 인류의 진화를 연구하듯이.

올두바이 계곡에는 오늘도 전 세계의 여행객들이 몰려든다. 자신들의 먼 조상의 고향을 찾아온 여행이다. 올두바이 계곡을 보니 라에톨리 발자국에서 시작된 인류의 기나긴 여행이 수백만 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류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후 방랑자의 기질을 가졌기 때문일까.

우리도 아프리카에 도로를 깔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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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가 갈라진 원숭이와 엄지가 붙은 인간의 발자국을 비교한 사진 ⓒ 김성호

올두바이 계곡을 떠나 아루샤로 가는데 산 중턱에 응고롱고로 경찰서가 보인다. 황톳길이 다져져서 아스팔트처럼 단단해진 길을 달리자 분화구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응고롱고로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에는 2층짜리 표지석을 설치해놓았다.

표지석 2층에는 "코뿔소를 구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이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아프리카 검은 코뿔소는 현재 2,000여 마리에 불과할 정도로 멸종위기 종으로 분류되어 있는 동물이다. 1층 표지석에는 응고롱고로와 세렝게티에서 야생동물 보호 활동을 하다 숨진 동물보호운동가나 밀렵감시원 등 6명의 이름을 기록해 추모하고 있었다.

응고롱고로 보호구역의 로도아레(Lodoare) 매표소 입구에서부터 아루샤까지 돌아오는 길은 잘 포장되어 있었다. 1시간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일본 정부가 지난 2004년 탄자니아와의 우정을 위해 포장해준 도로이다. 도로 중간에 있는 팻말에는 '일본-탄자니아 우정의 도로'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중국이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서 잠비아의 카피리 음포시까지 타자라 철길을 놓아주었듯이, 일본은 도로 포장을 통해 아프리카로 진출하고 있었다. 우리도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한-아프리카 우정의 도로'라는 팻말을 보면 얼마나 뿌듯할까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도로는 모든 소통의 기본이다. 우리나라의 도로건설과 포장 능력은 세계 최고수준이니 아프리카에 도로를 놓아주는 것은 그리 어려울 일이 아닐 것이다.

응고롱고로 보호구역 매표소에서 20여분 달려가자 현대적 건물에 여행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선 도시가 보였다. 카라투(Karatu) 지역이다. 길옆의 주택에는 트랙터가 보이고 집들도 개량한 듯 깨끗해 보였다. 밭에는 옥수수와 해바라기를 기르고 길옆에는 코스모스도 자라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마침 도로 옆에는 토요시장이 서서 옷들을 팔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서자 마니아라 호수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개코원숭이 30여 마리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왼쪽에는 고급 숙소인 세레나 롯지(Serena Lodge)가 있는데, 운전사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비싼 호텔"이라며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묵는다"고 설명했다. 마니아라 호수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래로 그림처럼 펼쳐지는 멋진 장소에 위치한 숙소이다.

마니아라 호수 근처의 논에서는 벼농사도 짓고 있었다. 다른 곳에 비해 물이 풍부하다보니 쌀농사를 짓는 것이다. 오는 길에는 세스나 비행장도 보였다. 오후 4시쯤 아루샤에 도착했다.

여행을 즐겁게 만드는 아프리카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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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루샤까지 도로가 잘 포장된 응고롱고로 보호구역의 로도아레 매표소 ⓒ 김성호

나는 요리사였던 리처드와 함께 아루샤 시내의 음반가게로 가서 아프리카 시디(CD)를 한 장 샀다. 내가 사파리가 끝난 뒤 세렝게티 초원의 텐트 안에서 김광석의 시디를 듣는 것을 보고 리처드가 "가장 유명한 아프리카 노래만을 모은 시디가 있다"고 강력히 권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케냐 그룹인 사파리사운드밴드(Safari Sound Band)의 '더 베스트 오브 아프리칸 송'이었다. 케냐 출신 6명의 남성 가수들로 구성된 사파리사운드밴드가 오래 전에 발표한 시디를 2004년에 다시 발매한 것이었다. 이른바 '잠보송'으로 알려진 "잠보 잠보"와 "폴레 폴레" "케냐 사파리" "나쿠펜다 웨웨" "킬리만자로" "말라이카" "아샨테 사나" "마마 소피아" 등의 노래가 들어 있었다. 여행과 자연, 사랑을 노래한 흥겨운 가사들이다.

가사는 스와힐리어이지만, 곡은 콩고와 케냐 등의 아프리카 전통 리듬에 중동의 이슬람 음악, 레게와 힙합 등 서구음악의 영향을 받아 경쾌하고 즐거운 노래들이었다. 리처드는 "스와힐리어를 쓰는 케냐와 탄자니아, 우간다 등 동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널리 불리는 노래들"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경쾌한 여행음악인 사파리사운드밴드의 아프리카 음악 시디와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김광석의 조용한 시디를 번갈아 들어가면서 여행을 했다. 사파리사운드밴드의 노래는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서 음베야까지의 타자라 열차 여행과 탄자니아 잔지바르,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나미비아의 스와콥문트 및 웰비스 베이, 잠비아의 빅토리아 폭포와 마다가스카르의 모론다바 같은 해안가에서 나를 즐겁게 했다.

반면, 김광석의 노래는 킬리만자로 산과 말라위의 말라위 호수, 보츠와나의 오카방고 델타, 나미비아의 소수스블레이 사막을 오를 때, 그리고 적막한 아프리카의 밤에 나를 차분하게 해주었다.

나는 여행을 마칠 때 김광석의 노래 뿐 아니라 사파리사운드밴드의 노래를 모두 흥얼거리며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홀로 여행하는 아프리카의 밤에는 하늘의 달과 별을 보고 조용히 사색하는 일 말고, 음악을 듣는 것 이외에 달리 할 것이 없다. 대부분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마사이족 #올두바이 계곡 #루이스 리키 #메리 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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