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어민 교사 헤더와 친해진 이유

가을, 걸어서 어딘가 갈 수 있어 좋다

등록 2007.09.05 21:42수정 2007.09.0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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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코스모스(?)가 핀 길 ⓒ 안준철


가을에는 걸어서 어딘가를 갈 수 있어서 좋다. 가령, 우체국에 볼일이 있을 때 나는 집을 나와 방천길을 걸어 우체국까지 걸어가곤 한다. 걸어서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신도시까지도 별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여름에는 그것이 힘들다. 억지로 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가을에는, 가을에는 걸을 수 있다. 걸어서 어딘가를 갈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모른다. 걸을 수 있다는 것. 걸어서 어딘가를 갈 수 있다는 것. 마치 옛사람들이 그러했듯 당연히 걸어서 어딘가를 다녀올 수 있다는 것.

걷는 것이 왜 좋을까? 걸으면 건강에 좋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생명평화운동을 하시는 도법스님은 자기 존재를 걸고 걸어보라고 하셨는데, 그 말뜻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다. 존재를 건다는 것은 어떤 수단으로서의 걷기가 아니라 걷기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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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낙엽을 떨어뜨리는 방천둑길 벚나무들 ⓒ 안준철


걷다 보면 존재가 충만해진다. 또한, 걷다 보면 존재가 덜어지는 것을 느낀다. 존재가 덜어진다? 쉽게 말하면 내 존재의 크기가 10이었다면 9나 8로 덜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존재감이 약해진다는 것이 아닌가. 맞는 말이다. 다만, 나의 존재감이 덜어지는 대신 내가 아닌 수많은 타자들의 존재감이 더 커지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나의 존재가 충만해진다. 나와 타자의 존재감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에 이른다고나 할까?

오늘도 나는 길을 걸었다. 학교 문예지 발간을 위해 인쇄소에 원고를 맡기러 가는 길이었다. 차가 없어서 택시를 타고 가거나 동료 교사에게 부탁을 해야 할 처지인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가을에는, 가을에는 걸어서 어딘가를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을만이라도 걸어서 다니다 보면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가로수들이 조금은 덜 괴로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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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사람 원어민 교사인 그녀도 나처럼 걷는 것을 좋아한다 ⓒ 안준철



어제도 나는 길을 걸었다. 어제는 화요일, 화요일엔 원어민 헤더(Heather)가 우리 학교에 오는 날이다. 우리 학교는 전문계(실업계) 학교라서 그런지 아직 원어민 교사가 없다. 대신 인근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헤더가 화요일마다 우리 학교에 온다. 그녀가 오는 화요일은 화색이 돈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그건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헤더를 좋아하고, 헤더와 친한 것은 그녀가 걷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그녀와 두 시간을 함께 걸었다. 그제 아내와 함께 저녁 산책을 나갔던 바로 길이었다. 아내의 사진을 찍어준 그곳에서 헤더의 사진도 찍어주었다. 노란 코스모스가 핀 길이었다. 그 꽃이 금계국인지, 노란 코스모스인지, 아니면 황금 코스모스인지 아직 확실치가 않다. 아마도 노란 코스모스가 맞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 꽃들로 인해 길이 퍽 아름다웠다. 빗방울을 머금고 있어서 더욱 예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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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비 간간이 비를 뿌리는 날씨에도 나비는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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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생명, 그것은 다른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다 ⓒ 안준철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은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영어교사로서 영어회화 실력이 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친한 동료교사들과도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그녀와는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 아이들 얘기는 동료교사들과 나누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부족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교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면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억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교사의 타자는 학생이다. 타자인 학생이 내 존재 안으로 들어와 나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억울한 것이 당연하다. 아이에게 미움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니니까. 내가 더 중요하니까. 나는 할 도리를 할 만큼 했으니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자기 안으로 들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어쩌면 그래서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나를 덜어 내기 위해서. 내 존재감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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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은 비에 젖어 더 예쁘다 ⓒ 안준철



내일은 칠팔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방천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지난 화요일부터 3박4일 동안 나와 인연을 맺은 아이들이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수학여행을 못 간 아이들의 임시담임을 맡은 것이다. 내일 그들과 오전 10시에 순천문화예술회관에서 뮤지컬 '인어공주'를 보고, 그리고는 어느새 낙엽이 지는 벚나무 길을 지나 노란 코스모스가 핀 길로 아이들을 데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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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풀잎, 그리고 빗방울 아이들이 내면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면 아름다운 것을 자주 보여주어야한다. ⓒ 안준철


아이들의 내면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면 아름다운 것들을 자주 보여줄 필요가 있다. 벌써부터 내일이 기다려진다. 아, 내일도 가을이다. 모레도 글피도….
#꽃길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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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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