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까지 고쳐주는 장인정신이 있다

[자전거 세계일주 58] 멕시코 로스모치스(Los Mochis)

등록 2008.03.01 13:47수정 2008.03.0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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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장인이란 타이틀은 시간이 거저 주지 않는다. ⓒ 문종성


"글쎄."

갸웃거리는 그의 시선이 불안하기만 했다. 하긴 패니어(자전거 짐가방) 고리가 산산조각 났는데 시카고에서 구입한 거라 애초에 그걸 대체할 부품도 없었거니와 또 그런 가방을 처음으로 대하던 그였다. 플라스틱 고리라면 남아 있는 여분이 있기에 어떻게 내 선에서도 해보겠지만 그나마 깨진 건 철로 된 고리라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기대한 건 확실히 'No'가 아니었다. 패니어 고리를 고치지 못하는 이상 출발을 할 수가 없다. 가방을 짐받이에 걸어야 하는데 이미 앞뒤 좌우에 짐이 가득 달려 있어 다른 공간에 가방을 실을 공간도 없었고 또 안전을 위해 무게의 균형을 맞춰야 했기에 반드시 수리를 해야 했다.


얼마 동안 부러진 고리 이음새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가 마침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없이 작업을 시작한 그의 액션은 장황한 말로 사태를 설명하는 그것보다 더 믿음직하고 기대가 갔다. "해볼게"라는 말 대신 그는 먼저 손을 움직인 것이다.

일단 자동차 정비소에 있는 쓸만한 부품을 가져와 부러진 부분에 이리저리 맞춰보았다. 하지만 스케일이 다른 만큼 꼭 맞는 부품을 찾는 게 쉽지는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한 부품 끼워 맞추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작업장 구석에 음침한 공구실로 들어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작업기술의 노하우가 있을 연륜에 선하지만 특유의 뚝심이 보이는 그의 눈매에 나도 모르게 의심없이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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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질 두드려라, 그러면 구부러질 것이다 ⓒ 문종성


그는 작심한 듯 공구실에서 꺼낸 부품을 들고 선반으로 다가가더니 불꽃을 튀기며 쇠를 갈기 시작했다. 크고 날카로운 굉음을 내며 다듬다가 쇠를 구부리고 다시 선반으로 깎기를 여러 번. 그의 계획은 기존의 고리를 아예 포기하고 가방을 잇는 지지대를 분리시켜 다른 철들로 대체해 아예 새로운 패니어용 고리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돌아가더라도 조금 더 확실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한 번 두 번 고리를 지지대에 거는데 실패할수록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연신 매만지고 다듬어나가 마침내 최적화된 사이즈의 고리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숙련된 수리공이라 하더라도 작은 부품 하나 새로 만들기까지 노력이 결코 작지 않았다. 결코 시간만으로 익지 않았을 숙련된 솜씨로 갈고 자르고 두드려서 완성시킨 것이다. 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끼워보니 딱 들어맞았다. '옳거니!' 동시에 내 마음도 만족함으로 딱 들어맞았다.
'안 되는 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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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작은 것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 ⓒ 문종성


내가 마이더스의 손으로 존중하는 분야는 세 개가 있다. 컴퓨터를 만지는 손, 그림을 그리는 손, 그리고 기계를 다루는 손이 그것이다. 감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는 그 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깊은 탄복과 함께 4차원의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황홀한 감동을 느낀다. 어떻게 그 복잡한 언어를 산수 셈 하듯 가뿐하게 해석하고 똑같은 도화지 위에 어쩜 그리 다른 풍경이 사실처럼 그려질 수 있으며 복잡다단한 기계를 마치 소꿉장난 하듯 다룰 수 있는지.


'마이너스의 손'. 나는 언제나 내 손을 가리켜 이렇게 부르곤 한다. 학창 시절 극악의 붓놀림과 거친 4B의 동선으로 그림으로는 A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가 히브리어보다 더 난해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오죽하면 매번 컴퓨터 프로그램을 조작하다 화끈하게 고장을 내 동생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니 자판과 마우스에 손을 함부로 놀리기가 두렵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 사람과 기계 사이에도 기가 통하는 건가 몇 번을 의심한 사건들이 있었는데 내가 기계만 만지기만 하면 무조건 고장은 먹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 중에도 캠코더와 렌즈가 고장 나 거금을 들여 수리를 했었고(물론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간 내가 집이나 공공장소에서 고장 내 먹은 기계만도 여러 대이다. 최고의 악몽은 군대 시절 교회 시설 관리를 맡자마자 바로 온풍기와 난로, 전등이 시차를 두고 차례로 고장난 적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스스로에게 심각한 회의에 들며 매커닉 포비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이너스의 손은 기계 앞에만 서면 한없이 초라해지기만 했고 실수와 잘못, 우연한 사고가 겹치면서 회복불능의 자신감 결여로 지금까지 열등감에 가까운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또 좋지 않은 습관을 하나 가지게 되었는데 긁어 부스럼이 부담스러워 기계의 어떠한 조그만 하자에도 남에게 의존하며 돈으로 해결하려는 습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러게 되기를 방관하지 않았으니 나름 큰 맘 먹고 도전해 본 소소한 수리들도 몇 개 있었지만 성과가 없었다는 것이 나를 더욱 깊은 좌절의 수렁으로 빠트려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마이너스 손의 저주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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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않지만 흘린 땀은 결과가 말해준다. ⓒ 문종성


시험적으로 고리를 짐받이에 걸어 보았는데 기존의 것보다 오히려 더 튼튼하고 안정감 있게 수리가 되어 대만족이었다.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고 그는 여행자의 필요조건에 대해 큰 도움이 된 하나의 작은 성과를 이룬 것에 만족해 하는 듯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불안한 것도 있었으니 그가 부를 수리 가격이었다. 극빈프롤레타리아 버전으로 여행 중이었기에 혹시 터무니없는 액수를 요구하면 줄 수야 있겠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모습 때문에 들뜬 이 기분을 망칠까 마음에 상처가 남을까 염려된 것이다.

"얼마예요?"
살짝 근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는데 그는 손을 내저었다. 그리곤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출발했어?"
"네? 아, 멕시코는 티후아나에서 했구요. 처음 시작은 뉴욕이었어요."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렸는데?"
"여덟 달 정도요."
"휴~. 끔찍하군."

그는 호흡을 이 사이로 새어내면서 휘파람 비슷한 소리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자네 고생하는데 수리비를 어떻게 받나? 그냥 로스모치스의 만남을 기억해줘."

서툰 영어와 몸짓으로 건넨 불완전한 그의 말을 듣자 마음에 공명을 울리는 감사함과 잠시나마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 내 자신의 옹졸함을 느꼈다. 매번 이렇다. 자꾸 내 방식대로 기준을 잡아두고 예상하지만 벗어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때마다 반성과 배움의 기회로 삼지만 뒤돌아서면 또 망각하는 게 인간의 습성.

늘 기억하고 있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느끼기 전에 미리 판단하지 말 것. 내가 보기를 원하는 걸 보게 되고 만나기 원하는 것을 만나게 되는 것. 여행은 생각한 것보다 꽤 아름답고 선한 모습들로 채워진 세상 속에서 숨바꼭질로 꼭꼭 숨은 값진 보석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나만의 비밀 아닌 비밀을 발견하는 것.

수리를 마치고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시내에 나왔다. 시내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성당엘 가보니 성당에 들어가지 않고 지나만 가는데도 경건의 모습으로 성호를 긋고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문득 '도둑놈들도 성당을 지날 때는 성호를 긋는다'란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성호를 긋는 걸까? 그건 '들키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란 뜻이라고. 그 생각에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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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한 아름다움. 그는 가방 뿐만 아니라 부품 때문에 고장난 마음까지 고쳐주었다. 아침에 부시시한 얼굴 때문에 필자 사진은 임의조정했다. ⓒ 문종성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했다. 로스모치스에서 만난 어느 무명의 수리공. 그가 고쳐준 건 비단 가방뿐만은 아니었다. 마음까지 헤아려 줄 줄 알았던 진정 큰 사람. 고장난 가방보다 가방 때문에 마음이 고장난 사람을 더 진솔하게 바라보았던 그의 태도. 성당을 지나치며 나와 함께 하는 그 분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는 오후 햇살에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 따스한 숨결이 이름 모를 어느 무명의 수리공에게도 똑같이 느껴졌을 꺼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행복은 언제나 받는 자보다 베푸는 자에게 추가 더 기우는 법이니까.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덧붙이는 글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세계일주 #문종성 #비전노마드 #자전거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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