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으로 집 구하기, 구직보다 어렵더라

[세렝게티 옥탑에 서식하는 봄날 꼬냥이의 '리얼 다큐멘터리' 시즌2] 두 번째 이야기

등록 2008.02.29 10:05수정 2008.02.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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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했다. 세렝게티 옥탑, 1년 10개월 동안 나를 전투사로 만든 그곳을 떠났다. 머물 이유가 없으니 떠나는 것도 이유가 없었다. 두 달만 있으면 계약 기간 2년을 채워 마음 편하게 훌훌 털고 나올 수 있었지만, 떠날 마음이 생기면 하루도 머물 수 없는 방랑꼬냥이 기질은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발길 닿는 곳이 내 고향이요, 등 뉘인 곳이 내 집이라

슬슬 이 집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 생각은 이 굼뜬 몸을 움직이게 했다. 인터넷에 적당한 가격으로 나온 매물을 검색하고 동네별로 몇 군데씩 추려내 보았다. 서울 송파구에서 양천구로 올 때 아무런 이유가 없었듯 이번에도 어디로 갈지 결정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선택의 폭은 넓었다.

그러나 복비를 주고서라도 부동산을 통해 소개를 받는 이유는 분명히 있는 듯했다. 직거래로 발품 팔아 좋은 집 구하는 것도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지, 이건 뭐 면접 사진 만큼 집 사진도 포토샵의 힘은 위대하더군.

① 계단 딱 3개만 내려오는 1층 같은 반지하예요

그랬다, 비교적 세렝게티 옥탑에서 가까운 양천구 신월동의 한 빌라. 사진상으로 봤을 때 어찌나 집이 좋든지, 과연 이 가격에 이런 집이 가능한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집을 보러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마음에 들면 바로 가계약금이라도 걸어둘 생각으로 보증금 10%의 돈을 들고 찾아갔다.


현재 살고 있다는 앳된 얼굴의 아가씨가 마중을 나왔고 그녀를 따라 찾아들어 간 곳. 그녀의 말은 맞았다. 계단 3개만 내려가는 집이었다. 문제는 현관 앞의 계단 3개와 그 옆에 붙은 7개의 또 다른 계단. 이건 뭐… 동굴이야?

"1층 같은 반지하라면서요?"

나의 말에 그녀는 "다들 이렇게 한다고 해서…"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기왕 온 거 방이나 보고 가자는 생각에 현관으로 들어서니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거실이며 온 방에 불을 켜놓고 있었다.

"햇빛 들어와요?"
"예…, 뭐 많이 어둡진 않아요…."
"불 좀 꺼봐도 돼요?"

그녀의 놀란 기색, 망설이던 그녀는 마지못해 불을 껐다. 동굴 맞네….

안방 꼭대기에 뚫린 조막만한 창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 창살은 왜 쳐놨나, 도둑놈 몸뚱이도 못 들어오겠구먼.

"이러시면 안 되죠, 이렇게 와보면 금방 알 걸 가지고."
"사실… 집이 이래서 사람들이 보러 오지도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꼬냥이 역시 반지하에 살아보았지만 집이 좋고 안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진을 보고 간 사람은 그 사진 속의 집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아닌가. 싫은 기색 못하는 꼬냥이지만 이사는 중요한 문제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진 채로 나와버렸다.

② 습기 전혀 없는 깨끗한 집이랍니다!

이번에는 강동구 고덕동의 한 빌라로 가보았다. 방 2개의 안방 사진을 보니 창문도 크고 채광도 좋아 좀 먼 거리이긴 하지만 마음에 들면 계약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니 광고에서 본 대로 나름대로 깔끔한 구조와 안방도 넓고 욕실도 깨끗했다. 거의 85점의 점수를 주고 싶을 만큼 흡족했다고 할까?

"작은 방 좀 볼게요."
"아… 짐 쌓아놔서 좀 지저분한데…."
"괜찮아요, 작은 방은 침실로만 쓸 거라 침대 위치 좀 보려고요."

작은 방문이 열리고…, 텁텁한 공기가 훅~ 하고 풍기며 온 사방에 시꺼멓게 자리 잡은 흉물스러운 곰팡이들. 난 보았다. 내 눈앞에 펼쳐진 판타스틱 포자의 왕국을. 이건 뭐, 키워서 판매하시나?

"제습지 붙이거나 주인집에 말하면 도배 새로 해줄 거예요."
"도배는 당연히 해줘야겠지만 이 정도면 집 문제네요. 제습지로 해결될 상황이 아닌데요? 습기 없다면서요?"
"음…. 안방은 없어요, 작은방은 짐 쌓아놓는 곳이라 상관없을 줄 알았죠."
"전 쌓아놓을 짐이 없어서 작은 방을 쓸 거라서요."

집을 보러 다니며 점점 까칠해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목동에서 고덕동까지 5호선 지하철로 끝에서 끝까지 달려가 보고 싶었던 게 포자의 왕국이었을까.

그즈음 신경성이었는지 온몸에 알러지처럼 울긋불긋한 무언가가 생기기 시작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이 아닌가 걱정도 되었지만 어쩌랴, 한번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지. 쓸데없는 고집 하나는 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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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냥이의 앙탈! 집을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갉아서 먹으리! ⓒ 강나루, 박봄이


배추도사를 능가하는 집주인

사당의 일반 주택 1층. 지금껏 본 집 중에 가장 깔끔하고 마음에 들었다.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하자도 없고 내 또래의 여성 세입자가 집도 깨끗하게 쓴 터라 문의도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맛있는 떡을 봤으니 제사를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집에 가서 가계약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4층의 주인집 문 앞에서 살짝 망설이는 세입자.

"주인분이 조금 깐깐하세요."
"지금 저희 집도 워낙 강적이라 괜찮을 거예요."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연락을 받은 듯 근엄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집은 다 봤어?"
"예." (초면부터 왜 반말이신지….)
"이 집만큼 좋은 집이 어딨어, 그 값에. 나도 돈 욕심 없어서 어려운 사람 돕는 셈치고 싸게 내놓는 거야."

옥탑방 보증금에서 몇 배를 올려서 하는 이사라 이 정도 집은 솔직히 평균 시세였다.

"도배랑 장판은 해주실 건가요?"
"왜? 깨끗하게 썼는데 할 이유가 없잖아, 1층 아가씨, 집에 하자 생겼어?"

순간 당황하는 세입자. 아니 월세에 도배랑 장판 해주는 거야 당연한 건데 왜 불똥이 세입자한테 튀나.

"아니요, 집이 더럽다는 게 아니라 새로 이사하는 건데 도배장판은 여쭤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난 못해줘, 그럴 돈도 없고. 꼭 할 거면 1층 아가씨가 돈 내놓고 가."

순간 왜 내가 울컥했을까. 아마 한마디 말도 못하고 울상 지은 세입자의 모습에서 배추도사 앞의 내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그러시면 안 되죠, 월셋방 살면서 어느 세입자가 도배랑 장판 비를 내놓나요? 안 해주시면 그만이지, 이상하시네."

꼭 해달라는 말은 아니었다. 벽지 장판 모두 깨끗하긴 했지만 사람이 살았던 집에서 어느 정도의 생활감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집주인에게 물어본 것뿐인데 세입자가 죄인이라도 되는 양 몰아대는 모습이라니.

"그리고 우리가 워낙 깔끔하게 살아서 집앞 골목도 더러운 꼴 못 보니까, 1층 사는 사람이 골목 청소해줘야 돼."

이건 무슨 달밤에 복댕이 짖는 소리야. 깔끔하면 자기 성격이 깔끔한 거지, 1층 사는 사람이 왜 골목청소까지 해야 해?

"됐습니다, 전 제 방도 안 치워요!"

미련없이 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배추도사의 잔소리는 사랑가로 들릴 정도의 내공을 가진 집주인. 여기서 살다간 아마 <오마이뉴스> 사회면에 내 이름이 올라갈지도 몰라.

대문 밖까지 쪼르르 따라나오는 세입자 아가씨가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이다.

"죄송해요…."
"그냥 날짜 맞춰서 나가세요, 그게 낫겠네요."
"이러는 사이 몇 달 지나서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세입자 아가씨와 난 마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인사 대신 서로 좋은 곳 얻어 빨리 나가자는 약속을 했다.

그날 밤, 옥탑에서 울긋불긋 알록달록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자니 이 넓은 서울에서 작은 몸 뉘일 곳 구하기가 이리도 힘든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더군.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흑….
#옥탑 #이사 #집주인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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