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나무 아래서 아이들과 통하다!

"선생님, 저 지금 많이 아파요!"

등록 2008.04.06 14:27수정 2008.04.06 14:27
0
원고료로 응원
a 벚꽃 저 꽃을 매달기까지 나무는 길고 엄혹한 겨울을 보냈으리라.

벚꽃 저 꽃을 매달기까지 나무는 길고 엄혹한 겨울을 보냈으리라. ⓒ 안준철


a 등굣길 아이들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건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아이들

등굣길 아이들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건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아이들 ⓒ 안준철


학교 등굣길 오르막 언덕에 벚꽃이 한창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느려진 걸음걸이가 벚꽃 구경을 하느라 더 느려터지고 맙니다. 아예 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올려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꽃잎 하나가 하늘하늘 날아와 콧잔등에 떨어지기도 하지요. 한 번 더 그런 행운을 맞보기 위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보기고 하고요.

이런 일종의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는 사이, 아이들은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힘에 겨운지 땅만 열심히 바라보며 오르막길을 올라갑니다. 그 중 한 아이를 불러 나무 아래로 오게 했습니다. 제가 이름을 알고 있는 아이였지요.

“수지야, 벚꽃 참 예쁘지? 이렇게 나무 아래서 올려다보면 더 예뻐 보여.”
“저는 꽃을 안 좋아해요.”
“꽃도 사람과 마찬가지야. 자꾸 바라보고 관심을 가져야 좋은 감정이 생기게 되거든.”
“저는 꽃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안 생겨요.”

아이가 그렇게 대꾸를 했다고 김이 새거나 힘이 빠질 일은 아닙니다. 아이가 꽃을 안 좋아하는 것은 단지 꽃에 대한 추억이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니까요. 

“나는 꽃이 너무 좋은데…. 저녁노을도 좋고. 그래서 꽃이나 노을을 보면 행복감을 느껴. 좋은 것이 많으면 그만큼 더 행복해지는 거지. 많은 돈이 없어도 말이야.”
“저도 노을은 좋아해요.”
“그래? 그럼 꽃도 좋아할 수 있겠다.”
“노력해볼게요.” 

며칠 뒤, 등굣길 오르막이 청소구역인 국어교과 김 선생님이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저와 마주쳤습니다. 매일같이 청소시간마다 정문까지 걸어 나가야하는 불편함도 불편함이지만, 벚나무가 떨어뜨리는 꽃잎이나 낙엽을 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가 잠깐 오고 갔습니다. 국어교과 선생님답게 아이들의 정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요.

그날 하굣길이었습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내려가는 아이들을 제가 불러 세웠습니다. 얼굴이 낯익지 않은 것을 보아 1학년 아이들 같았습니다. 제가 서 있는 나무 아래까지 온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애들아, 저렇게 나무에 달린 것들은 온통 흰빛인데 여기 떨어진 꽃잎을 보면 연한 핏자국 같은 것이 보이지?”
“어디 봐요. 정말이네요.”
“사람도 말이야 멀리서 보면 모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런 상처들이 다 있을 수 있어.”
“에이 선생님, 그 말 어디 인터넷에서 봤죠?”

a 꽃잎 떨어진 꽃잎마다 연한 핏자욱 같은 것이 묻어 있다.

꽃잎 떨어진 꽃잎마다 연한 핏자욱 같은 것이 묻어 있다. ⓒ 안준철


1학년 아이들이라 그런지 말투나 행동거지가 활달하고 발랄했습니다. 그 모습이 좋아보여서 이렇게 은근슬쩍 칭찬을 해주었지요. 


“꽃도 예쁘지만 지금 너희들 모습이 꽃보다 훨씬 더 예쁘다.”
“알고 있어요. 호호호.”

그렇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뒤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려는데 한 아이가 손을 흔들며 저에게 말을 건네 왔습니다.  

“선생님 말씀 잊지 않을게요.”
“무슨 말?”
“가까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상처가 있다는 말이요.”
“응. 고맙다. 근데 말이야….”

저는 다시 그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바삐 서둘 것도 없는 한가한 하굣길이기도 해서 아이들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지요.

“아마 저 상처는 뭔가 성장하기 위한 상처 같지 않니?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잖아.”
“맞아요. 선생님, 저 지금 많이 아파요.”

“그럼 너 성장통인가 보다.”
“성장통이 뭔데요?”
“성장하기 위해서 겪는 통증 말이야.”
“아하!”

a 개불알풀 학교에도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숨은 보석 같은 아이들이 많다.

개불알풀 학교에도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숨은 보석 같은 아이들이 많다. ⓒ 안준철


그렇다고 아이가 정말 아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환하고 밝은 표정으로 봐선. 하지만 그건 모를 일입니다. 멀리서 보면 저리도 하얀 꽃들이 꽃잎마다 연한 핏빛 상처를 감추고 있으니까요. 그날 아이들과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입니다.

“내일 등굣길에는 꼭 나무를 바라보기다. 아픈 상처를 감내해가면서까지 꽃을 피웠는데 그냥 무심코 지나치는 것은 너무한 일이잖아. 약속할 수 있지?”

“알았어요, 선생님. 꼭 약속 지킬게요.”
“저도요.”
“저도요, 선생님.”

요즘 아이들의 감정이 메말랐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들의 감정이 메말랐든 그렇지 않든 그 이유가 그들 자신에게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자연이 주는 무상의 혜택을 받아 누리지 못하게 한 것도 알고 보면 다 어른들이 한 일입니다.

다행히도 그날 하굣길에 만난 아이들의 감정의 샘은 아직 펑펑 살아 있었습니다. 벚꽃 나무 아래서 아이들과 통(通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요.        

a 양지꽃 등굣길 오르막에 핀 노란 양지꽃

양지꽃 등굣길 오르막에 핀 노란 양지꽃 ⓒ 안준철

#벚꽃나무 아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사진] 폭우 맞은 수수빗자루에 벌어진 신기한 일 [사진] 폭우 맞은 수수빗자루에 벌어진 신기한 일
  2. 2 이거에 고추장 넣고 비비면 밥 한 그릇도 부족하지 이거에 고추장 넣고 비비면 밥 한 그릇도 부족하지
  3. 3 [영상] 지하주차장 밀려드는 물, '이 물건'으로 막았다 [영상] 지하주차장 밀려드는 물, '이 물건'으로 막았다
  4. 4 '한전 전봇대 150개 몰래 설치' 반발 계속, "다 뽑아라" 분노 '한전 전봇대 150개 몰래 설치' 반발 계속, "다 뽑아라" 분노
  5. 5 또 증인선서 거부했다 맘 바꾼 임성근... 오른쪽 뺨 부어오른 전현희 또 증인선서 거부했다 맘 바꾼 임성근... 오른쪽 뺨 부어오른 전현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