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국 의병장 후손 김복현씨
박도
"플라스틱 계열의 조그마한 기업체입니다. 나이 탓인지 요즘은 업체 규모가 점차 줄어들고 있네요. 홀어머니 밑에서 저도, 아우도,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아우는 서울에서 아무개 은행지점장으로 명퇴하였지만 밥 걱정하지 않고 살고 있고, 저도 은행 돈 빌리지 않고 이 업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지난날 처절했던, 뼈저린 가난 때문에 이제는 세 끼 밥걱정하지 않고 사나봅니다. 그런데 사업을 하면서 체득한 것은 '독립운동가 유족이란 걸 꺼내지 않는 게 낫다'는 겁니다. 독립운동가 유족이라고 하면 될 일도 안 되더군요. 거래처 사람에게 독립운동가 후손이라고 소개하면, '존경합니다'라고 겉으로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상대하기 껄끄럽다,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하는지 될 일도 안 되더군요.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면 행동에 제약만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 정계고, 재계고, 친일파 후손들이 주류 아닙니까?"
그러면서 명함을 건네주는데, '광복산업주식회사 대표이사 김복현'이었다. 내가 상호에 '광복'이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하자, 사업 시작 때는 뭘 모르고 넣었는데, 곧 사업에 도움이 안 되는 걸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등록한 상호를 바꿀 수 없었다고 하면서 멋쩍게 싱긋 웃었다.
몇 해 전, 부인이 세상을 떠나 청주에서는 김복현씨 혼자 살고 있다. 주말에는 서울에 사는 자녀들집에서 지낸다고 하면서, 슬하에 남매를 두었다고 하였다. 두 분 할아버지 출생지에다가 동상이라도 세우려 하지만, 그 일이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귀담아 들어보니 유족이 부담해야 할 돈 때문인 듯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라면, 유족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나라에서 세워주는 게 도리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원국 할아버지는 국립묘지에 안장하였으나, 김원범 작은 할아버지는 시신을 찾지 못해 여태 안장치 못했다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김원범 작은 할아버님은 총각으로 순국하여 후손이 없기에 아우(김복열)가 출계(양자로 감)하여 제사를 모신다고 하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새 광주행 차시간이 되었다. 굳이 버스 승차장까지 따라 나와 광주행 버스가 떠날 때까지 승강장을 지키며 손을 흔들었다.
김원국 의병장 행적김원국(金元國, 元局, 昌燮) 의병장은 1873년 전남 광주시 당부면 북촌리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9월 광산 송정읍에서 일군을 타살하고 피신하였다. 1906년 3월, 아우 원범(元範)과 함께 광주 무등촌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교전을 하였다. 1907년 9월, 호남 의진의 우두머리인 기삼연(奇參衍)과 김태원(일명 金準)이 합진하여 일대성세를 이루게 되자, 그해 12월 김태원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이때 부하 삼백여 명으로 광주 수비대와 교전하여 40여 명을 사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