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의병장의 무덤에는 풀만 무성해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50] 임병찬 의병장 (3)

등록 2008.04.30 19:41수정 2008.05.0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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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찬 장군이 의병을 훈련시켰던 산내 종성 '호남의병' 유적지로 표석만 서 있다.
임병찬 장군이 의병을 훈련시켰던 산내 종성 '호남의병' 유적지로 표석만 서 있다.박도

글쓰기가 날로 힘 든다. 가장 큰 이유는 글에 따르는 책임 때문이다.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넘었다. 그 새 가을에서 겨울로, 봄으로 철이 세 번 바뀌고, 해도 바뀌었다. 이번 기사가 50회로 이제 곧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 마무리 기사를 쓸 날도 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임병찬 의병장 답사기는 다른 어느 분보다 시작도 힘들었지만, 집필 내내 매우 어려웠다.

 임병찬 의병장
임병찬 의병장박도
임병찬이 동학의 김개남 장군을 전라관찰사에 밀고하여 체포케 한 전력 때문이었다. 솔직히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았다면, 아마 임병찬 의병장 전적지를 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답사를 이미 끝낸 뒤 글을 쓰지 않는 것 또한 옳지 않은 일이 아닌가. 
이번 답사를 도와주신 몇 분에게 자문을 구하자, 그분들 역시 양론이라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혼자 며칠째 고심하였더니, 아내가 낌새를 알고 영문을 물었다.

사실대로 얘기하자, "뭘 고민하느냐? 당신이 본 대로, 기록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쓰면 될 게 아니냐?"고 조언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명답인데다가, 은사 조지훈 선생 <지조론>을 배우던 교양학부 시절이 떠올라 조지훈전집에서 그 부분을 찾아 읽었더니 답이 나왔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 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라도 머리털 센 다음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고난을 당해도 굽히지 않은 절개)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그 후반을 보라"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 조지훈 <지조론>

 임병찬 의병장 묘소 상석 비명
임병찬 의병장 묘소 상석 비명송희정

정읍에서 돌아온 지 사흘 후, 산내면 종성리 송희정씨가 약속대로 회문산 정상 외진 곳에 있는 임병찬 의병장 무덤 사진을 메일로 보내왔다.

그런데 봉분은 보이지 않고 상석의 묘비명만 찍은 사진이었다. 내가 고맙다고 전화하자 유감스럽게도 그 사진밖에 없다고 한 즉, 여러 추측을 낳게 했다.


그 하나는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어 봉분까지 풀과 나무가 무성해진 탓일 것이요, 아니면 사진을 찍은 이가 묘비명에만 초점을 맞춘 탓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송희정씨 말이 아무튼 산소를 후손들이 돌보지 않아 무덤 언저리가 많이 우거진 기억만은 뚜렷하다고 하였다.

 임병찬 후손 임삼씨
임병찬 후손 임삼씨박도
사진을 받은 지 일주일쯤 지난 뒤, 김희선 정읍문화원사무국장이 마침내 임병찬 장군 후손을 수소문하여 소재를 알았다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곧장 후손에게 연결했지만, 서로 생업에 바쁜 탓으로 날짜를 정하지 못하다가, 지난 4월 4일 전해산 장군 아드님 서울 취재 길에 오전 시간을 이용하여 시청 앞 한 찻집에서 만났다.


참 어렵게 만났음에도 임병찬 장군 증손 임삼(69)씨는 그날 하필 급한 일로 곧 인천공항에 가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시간에 쫓겨 속깊은 대담은 하지 못하고 인사와 몇 마디 얘기만 나누었을 뿐이다.

그날 임삼씨는 유림들이 세운 할아버지 임병찬 장군의 사당 하청사(산외면 오공리)는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바, 그 사당을 복원하고 싶다는 소망만 말하고는 바삐 자리를 떴다. 나는 뒤따라 나가 바쁘다는 분을 굳이 붙잡고는 불타버려 흔적도 없는 숭례문을 배경으로 셔터를 누르고는 보내드렸다.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관 임병찬 의병장 행적

 일제의 '남한대토벌' 작전으로 초토가 된 마을.
일제의 '남한대토벌' 작전으로 초토가 된 마을.눈빛출판사

임병찬 의병장 본관은 평택, 호는 둔헌으로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1851년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웠으며 16세 때 전주 향시에 급제하여 39세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 최익현과 더불어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군량 및 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 의병장 민종식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정읍·순창·곡성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 해 6월에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어 일본 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무성서원 뜰에 선 '병오창의기적비'
무성서원 뜰에 선 '병오창의기적비'박도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다시 거의할 것을 꾀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널리 격문을 발송하고 동지를 모으는 한편 그 조직을 확대시켜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은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 한일병탄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내쫓으려는 항일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옥중에서 계획이 실패했음을 분개하고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뒤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23일에 유배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로 압송되는 면암 최익현 선생.
서울로 압송되는 면암 최익현 선생.눈빛출판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과 <정읍의병사>을 바탕으로 가능한 글쓴이의 감정을 절제하며 썼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공훈록과 <정읍의병사>을 바탕으로 가능한 글쓴이의 감정을 절제하며 썼습니다.
#호남의병 #임병찬 #대한독립의군부 #최익현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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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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