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여우에게 완패당하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41] 참패한 조선의 영의정

등록 2008.05.03 18:03수정 2008.05.0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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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황궁거리.  심양은 청나라 건국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황궁거리. 심양은 청나라 건국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 이정근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예술에 경극과 희극이 있다. 경극은 북경에서 발전한 연극으로 전통 가극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희극은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경극이 음악 중심이라면 희극은 스토리 중심이다. 일반 서민들이 열광하는 희극 중에 청궁희(淸宮戱)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청나라 궁중 이면사를 다룬 청궁희에 나오는 인물 중에 범호정이 있다. 관객은 극중 인물 범호정을 범문정으로 착각한다. 범호정은 역사에 기록이 없는 허구의 인물이다. 극의 얼개로 보아 범문정과 홍승주를 합한 가공의 인물이다.

범문정과 홍승주는 한족의 공적?

범문정과 홍승주 두 사람은 한족(漢族)이다. 조국을 배신하며 이민족의 청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범문정은 만청개국공신으로 '청사고'의 '범문정전'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홍승주는 '이신전'(貳臣傳)에 기록되어 있다. 올림픽에도 금메달과 은메달의 빛깔이 다르듯 공신에도 차등이 있다는 뜻이다.

범문정은 심양 출신이다. 송나라 관문전 대학사 범순인의 17세손이라 알려져 있으나 누르하치에게 발탁배경은 장막에 가려져 있다. 홍승주는 명나라 장수로서 누르하치에게 항복했지만 범문정은 항복한 근거가 없다. 홍승주는 무인이고 범문정은 문인이어서 그럴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범문정은 태조 누르하치, 태종 홍타이지, 세조 순치제 푸린, 성조 강희제 쉔예를 모신 유일한 개국공신이다. 그의 손에서 청나라 건국의 역사가 편찬되었다. 때문에 중화주의 한족 학자들은 홍승주, 오삼계, 조대수와 함께 그를 한족 4대 공적 즉, 한간(漢奸)으로 평가절하 한다.


a 홍타이지. 심양 북능공원에 있는 홍타이지 동상.

홍타이지. 심양 북능공원에 있는 홍타이지 동상. ⓒ 이정근


범문정은 영민한 사람이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사람이다. 청 태조 누르하치 때부터 청나라의 정치를 요리한 범문정은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신하들이 새로운 정책으로 우왕좌왕 하고 있으면 "범장경이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네, 범장경이 동의했습니다."


이 한 마디면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무사통과다. 범문정은 황제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범문정이 최명길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범문정 40세, 최명길 51세.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래도 아니 될 말이오. 세자 환국문제는 다시는 입 밖에 꺼내지 마시오."

범문정은 선을 그었다. 청나라의 대 조선정책의 근간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의 뜻을 가상히 여겨 선물을 주겠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예까지 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야 없지를 않소. 단 세자 환국문제는 없었던 일로 하고 군대는 우리가 원하는 날짜에 어김없이 보내야 하오."

범문정이 선언했다. 최명길이 들고 온 조선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최명길의 완패였다. 청나라의 전략은 치밀했다. 세자 환국을 거절하고 군대 파병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뇌물사건을 거론하지 않았다.

동관으로 돌아온 최명길은 자리에 눕고 말았다. 하나도 건지지 못한 참패에 병이 난 것이다. 하지만 범문정이 제시한 선물 보따리가 있다. 어쩌면 그 보따리를 손에 넣기 위하여 병이 난 척 하는지도 모른다. 최명길이 심양에서 병이 났다는 소식을 접한 인조는 급히 어의를 심양에 파견했다.

세자관에도 의관이 있다. 최명길이 자리에 누웠다는 소식에 깜작 놀란 소현세자는 의관 유달이를 보냈으나 동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청나라는 사신과 세자관의 접촉을 엄격히 통제했다. 정보를 공유하거나 공조체재를 유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포로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라

최명길이 동관에 누워 농성 아닌 농성을 벌이고 있는 사이 범문정이 선물을 보내왔다. 조선인 포로 780명을 석방하겠다는 것이다. 예상 외의 큰 선물이었다. 범문정의 통보를 받은 최명길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부사와 서장관을 불렀다.

"나의 쾌차가 더딜 것 같으니 속환인들을 데리고 먼저 귀국하시오."
"당치않은 말씀입니다. 편찮으신 영상대감을 여기에 두고 어찌 우리만 귀국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포로에서 풀려난 속환인들은 한시 바삐 조국에 돌아가고 싶어 하고 고국에는 그들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마른 심정을 내 병환 때문에 지체할 수 없습니다. 속히 떠날 채비를 하시오."

단호한 명령이었다. 부사와 서장관은 부랴부랴 귀국을 서둘렀다. 8백여 명 가까운 포로를 인솔해가는 일 또한 만만찮은 일이다. 식량을 준비하랴, 의약품을 챙기랴,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명이 났다. 빈손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속환인들을 데리고 들어가게 되었으니 자신들이 공을 세운 것처럼 기뻤다.

당시 사대부들은 사신과 그 일행에 임명되면 갖은 구실을 붙여 청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앗차 실수하면 볼모로 붙잡혀 있거나 죽음의 길로 받아들였다. 김경여는 임금이 서장관으로 재수했으나 그는 끝내 관직에 나오지 않았다.

부사와 서장관이 속환인을 데리고 심양을 떠나는 날 최명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냥 병을 핑계대고 심양에 눌러 앉았다. 범문정으로부터 더 받아낼 것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a 양화당.  창경궁에 있는 양화당은 병자호란 후 인조가 거처하던 곳이다.

양화당. 창경궁에 있는 양화당은 병자호란 후 인조가 거처하던 곳이다. ⓒ 이정근



사신 일행이 속환인들을 인솔하여 한성에 도착했다. 헤어졌던 가족들이 도성 밖까지 마중 나와 부둥켜안고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가족은 혈육의 끈이다. 전란으로 끈을 놓친 백성들이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을 만났으니 감격의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부사와 서장관이 황제가 내린 칙서를 가지고 임금을 알현했다. 예상하지 않았던 속환인에 인조도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깐, 칙서를 받아든 인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조선 왕이 남한산성을 나와 짐에게 투항한 것은 궁지에 몰려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종사(宗社)를 위한 생각이었고 일신을 위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겁나서 항복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몸을 잃고 제사가 끊어졌을 것이다. '군신은 부자와 같고 두 나라는 한 집과 같다' 하면서 세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를 청하는 것은 곧 나라를 달리 여기는 뜻이다. 조선 왕이 정성으로 대하는 것이 인정되었을 때 주청(奏請)을 기다리지 않고 자유로이 가고 오도록 허락할 것이니 그리 알라."

청나라의 대 조선 정책은 변함이 없었다.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항복한 군주로서 군신의 예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황제의 칙서는 곧 범문정의 생각이었다.

덧붙이는 글 | 소현세자 앞서 연재하였던 '태종 이방원'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소현세자 앞서 연재하였던 '태종 이방원'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소현세자 #병자호란 #범문정 #최명길 #청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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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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