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거하려다 되치기 당하는 선수

[역사소설 소현세자 44] 도마뱀 꼬리 자르기

등록 2008.05.09 16:41수정 2008.05.0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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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관. 지금까지 심양아동도서관이 세자관 터로 알려졌으나 최근 다른 곳이라는 설이 대두되었다. ⓒ 이정근



세자관에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졌다. 조국을 배신한 자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되치기당하게 되었으니 기가 막혔다. 고국을 떠나올 때는 세자를 따르려 하지 않았지만, 심양에 도착해서는 한마음 한뜻이었다. 200여 세자관 식솔들이 한결같았다. 그런데 솔선해서 따라나선 정뇌경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용골대가 세자관을 찾아왔다.


"황제의 명이다. 세자는 엎드려 받도록 하라."

소현은 무릎을 꿇었다.

"정뇌경이 두 역관을 모해한 일을 세자도 알고 있었는가?"

"황제의 은덕을 입어 편안히 있는데 뜻하지 않게 황상의 성심을 흐리게 하여 부끄럽고 송구스럽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신들도 모두 모르고 있었으니, 맹세는 할 수 있으나 본국의 법이 있으니 세자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모름지기 국왕에게 아뢴 뒤에 처치할 수 있다."

"황제의 칙서 가운데 '절대로 사사로이 서로 뇌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국왕이 만일 주었다면 이것은 국왕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설사 준 바가 없다 하더라도 신하가  주고 그 사실을 고하였다면 그 또한 국왕에게 죄가 있다. 세자도 마찬가지다. 모해한 자를 죽이지 않으면 이것은 국왕과 세자가 서로 의논하여 한 것이다. 발명하고자 한다면 맹세하고 죽여야 한다."


본국에서 처리하겠다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세자

"이 사실을 본국의 전하께 올리도록 하겠다."


"세자 스스로 천단하지 못하여 국왕에게 여쭙겠다는 말은 옳다. 음해한 자를 구류하였다가 조선에서 사람이 오면 처단하라."

"황제의 명을 감히 어길 수는 없으나 여기에서 죽이면 나라 사람들이 보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경계가 되겠는가? 우리나라로 내보내어 엄히 국문해 죄를 바르게 다스려야만 체통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못 믿겠다면 청나라 사람이 함께 가도 좋다."

"국왕이 이 일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 내보내어 죽이는 것이 가하다. 알고 있었다고 간주해도 되는가?"

죄인을 심문하듯 힐문하는 용골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국왕 전하는 모르시는 일이다."

"정뇌경이 여기에 있으면서 스스로 계책을 꾸몄다 하니 이곳에 관계된 일이므로 내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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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 창경궁에 있는 양화당은 병자호란 후 인조가 거처하던 곳이다. ⓒ 이정근



청나라의 태도는 단호했다. 뇌물사건을 빌미로 조선 길들이기에 나선 것이다. 정뇌경 사건에 대한 심양장계를 받은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연일 대신회의가 열렸으니 대책이 없었다. 비국에서 비밀 장계를 올렸다.

"정뇌경의 정상은 가긍하나 죄가 있으니 형률을 시행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락한다는 자문을 보내도록 하시옵소서."

"본국의 법도에는 '조정 신하는 반드시 국문하여 처단한다'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자문을 짓도록 하라."

청나라에 보낼 자문(咨文) 초안이 완성되었으나 비국에서 반대했다.

"정뇌경의 생사는 자문의 어구가 어떠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황제의 도량에 달렸습니다. 우리 측에서 쾌히 허락하면 혹 죽음을 용서받을 수 있지만 먼저 애석히 여기는 뜻을 보이면 더욱더 노여워할 것입니다. 저들이 불쾌한 마음을 품으면 일마다 껄끄럽게 되어 비록 군사를 내어 침략하지는 않더라도 갖가지 난처한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황제가 정뇌경을 죽일 수 있는데도 세자로 하여금 처리하게 한 것은 죽였다는 이름을 담당하지 않으려는 것이고 겸하여 우리를 시험해 보려는 것입니다. 설령 청나라에서 허락한다 하더라도 그 뒤의 처리가 더욱 난처할 것입니다. 자문 안의 어구가 타당하지 못한 곳을 고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문의 어구는 사체를 진술하였을 뿐이지 특별히 애석하게 여기는 뜻이 없으니 경들은 과히 염려하지 말라."

심양에서 온 비밀 편지

자문 수정 작업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을 때 정뇌경의 처 윤씨가 금부의 당직자에게 상언하여 자문 안에 속바치기를 원한다는 말을 첨가해 넣어 조금이나마 가망이 있게 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돈을 밝히는 청나라 사람들에게 돈을 바쳐서라도 구명하겠다는 애절한 심정이다. 보고를 받은 인조는 조용히 타일러서 보내라고 명하고 정뇌경이 비밀리에 보낸 첩지를 펼쳐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신은 어리석고 망령되어 스스로 죄를 지었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보건대 청나라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관후하였는데 중간에서 날조하여 해를 입히려 한 것은 오로지 두 역관의 소위였습니다. 그들은 천부적으로 악독한 성품을 타고나 국가와 백성의 목숨이 두 역관의 손에서 다하게 되었으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뇌물을 밝히는 그들에게 뇌물을 주고서도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도모하여 처단하는 것이 옳고 비록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청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두 역관의 소행을 알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화가 미치기 전에 꼬리를 잘라라

드디어 자문이 완성되었다.

"조선 국왕은 중범을 과단(科斷)하는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당직이 조사하여 본 결과 일찍이 정축년에 황상께서 소방에 내린 조칙에 뇌물 주는 것을 깊이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소방의 군신들이 가슴에 새겨두고 감히 사사로이 주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국의 사람들도 어찌 금령을 무릅쓰고 사적으로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정뇌경이 두 역관을 모함하려고 이러한 거짓 증언을 하였으니 그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실로 모르겠습니다. 강효원은 천한 하례로 원래 지식이 없으니 꾸짖을 거리도 못 됩니다만 정뇌경은 이름이 유신(儒臣)의 반열에 있고 신의 자식을 따라가 심양에 입시하고 있으면서 매사에 조심하고 충실과 정성으로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감히 고자질을 하여 본국에 일을 만들었습니다.

만일 황조(皇朝)의 밝은 식견으로 사건의 상황을 환하게 살피지 않았다면 당직의 부자가 어찌 애매한 허물을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니 더욱 마음이 놀랍고 뼈가 저림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의 정상이 이미 드러나서 그 죄가 사형에 해당합니다. 소방의 법례(法例)에 모든 중죄인은 잡아다가 옥에 가두어 형신하고 죄안을 만들어 법에 의거하여 처리하오니 정뇌경과 강효원을 데려다가 법에 의거하여 처단하려 합니다."

조정은 무신 이응징을 형조좌랑으로 급조했다. 가짜 형조좌랑 이응징이 심양으로 떠나는 날. 인조가 이응징을 은밀히 불렀다.

"정뇌경을 교살하라."

정뇌경을 본국으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청나라가 응하지 않을 것이라 예단했다. 조급해진 조정이 도마뱀 꼬리 자르기에 나선 것이다.
#소현세자 #병자호란 #인조 #심양 #정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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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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