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뇌경은 죄인이 아니다, 보호하라'

[역사소설 소현세자 45] 임금이 보냈으나 찬밥 신세가 된 자문관

등록 2008.05.11 17:34수정 2008.05.1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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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전. 중국 심양고궁에 있는 대정전은 청나라 건국초기, 황제가 십왕들과 공식행사를 가졌던 곳이다 ⓒ 이정근



임금의 명을 받은 이응징은 쉬지 않고 달렸다. 이응징은 평안도 일대 군영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군문에 있으면서 글에 밝아 무인 중의 선비로 통했으나 문신이 아닌 무신이다. 그러한 자신에게 갑자기 형조좌랑 감투를 씌워주며 밀명을 내릴 때는 곡절이 있을 터.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달리는 마상에서 자신의 임무를 곱씹어 봤다.


"전하께서는 도성의 소문을 알고나 계시는지 궁금하다. 충신으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을 죽이라니? 내가 역적질을 하러 가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를 괴롭히는 정명수를 죽이라면 신바람이 나겠지만 충신을 죽이라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 그렇지만 어쩌랴. 임금님의 명인데, 백마야 어서 가자."

이응징은 말채찍을 감아쥐었다. 달리는 말에서 자기가 자신을 생각해봐도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지엄하신 임금의 명을 거역하면 자신이 죽는다. 임진강을 건너고 대동강을 건넜다. 이응징은 사신이 아니라 주문을 가지고 달리는 재자관(齎咨官)이다. 더불어 임금의 밀명을 받은 자객이며 형관이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 30리에 하나씩 있는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며 쉬지 않고 달렸다.

당시 도성에는 심양소식이 속속 날아들었다. 조선의 대표선수 정뇌경과 청나라 용병 정명수와의 한판 대결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에게 매국노를 처치하려는 정뇌경의 거사는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었다. 마음으로 뜨거운 성원을 보냈다. 삼전도의 치욕과 패전의 서러움을 털어내는 통쾌한 소식이 날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거들먹거리는 조선족 통역관

심양에 도착한 이응징은 곧바로 용골대 아문을 찾았다. 그러나 용골대는 없었다. 조선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재자관을 역관 김돌시가 맞이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자신이 청나라 장군이나 된 것처럼 거들먹거렸다.


"정뇌경이 공이 있는 사람을 모함한 것 때문에 성상이 진노하여 속히 형률에 따라 처단하라고 명하셨으므로 내가 형관(刑官)으로서 명을 받들어 자문을 가지고 왔다."
"정뇌경은 우리들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세자를 속였으니 실로 죄가 크다. 국왕이 처단을 쾌히 허락한다는 말을 들으니 자못 기쁘기 그지없다."
"형살(刑殺)은 막중한 일이므로 황지(皇旨)를 여쭈어서 시행하려 한다."
"조선에서 온 재자관이 정뇌경을 구원하는 말을 하면 곧바로 쫓아내겠다고 용골대 장군과 마부달 장군이 말했는데 너의 말을 들어보니 안심이 된다. 지금 황제와 두 장군이 안계시니 자문은 여기 두고 세자관에서 기다려라."

이응징은 조선 국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바치는 자문(咨文)을 두고 세자관으로 향했다.

임금이 보냈으나 찬밥 신세가 된 자문관

"세자저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소신 문후 여쭈옵니다."

세자를 배알한 이응징이 예를 갖췄다.

"그래, 아바마마께서는 강녕하시더냐?"
"네, 저하."
"무슨 일로 왔느냐?"
"정뇌경에 관한 자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자문은 어찌했느냐?"
"청나라 아문에 바쳤습니다."
"저들이 뭐라 하더냐?"
"만족해하며 세자관에서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별도의 말씀이 안계시더냐?"
"예, 저하."

이응징은 ‘정뇌경을 교살하라’는 밀명은 숨겼다. 전선에 나간 황제를 기다리며 세자관에 묵고 있는 이응징을 바라보는 재신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한 마디로 개밥에 도토리 같은 신세였다.

"세자 저하, 이응징의 태도가 수상합니다."

빈객 박노가 아뢰었다.

"어떻다는 거냐?”
"문신도 아닌 이응징에게 형조좌랑 관복을 입혀 보내는 것은 무슨 음모가 있는 듯 합니다."
"알겠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정뇌경을 각별히 보호하라."

정뇌경을 지키려는 순수한 이 한마디가 훗날 자신의 발등을 찍게 된다는 것을 소현세자는 미처 몰랐다.

이심전심으로 통한 세자관 식솔들은 이응징을 경계했다. 힘이 장사인 이응징이 정뇌경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세자관 식솔들은 정뇌경과 이응징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차단했다.

남김없이 소상히 아뢰어라

소현세자가 시종 빈객들을 물리치고  정뇌경을 은밀히 별실로 불렀다.

"네가 저들의 부정을 어떻게 발고하였느냐?"

"작년에 예부(禮部)의 통사(通事) 김애수가 정명수와 김돌시 두 역관의 부정 장물을 적발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애수의 장사(狀辭)에 용골대와 마부달을 언급하여 파장이 크게 되었습니다. 사건을 이첩 받은 형부에서는 두 역관은 풀어주고 김애수에게만 태벌(笞罰)을 가하였습니다. 그 후, 두 역관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정명수의 비리를 적발하고자 신들에게 와서 정보를 구했는데 신들은 뒷날을 염려하여 응하지 않았습니다.

예부 통사 이룡과 이성시는 모두 관서의 사족으로 비록 청나라 역관질을 하고 있지만 본국을 잊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성시가 신에게 와서 ‘정명수 김돌시 두 역관이 본국에 온갖 해악을 끼치는데 공들이 비호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기에 ‘쉽지 아니한 일을 어찌 가벼이 응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이성시가 말하기를 ‘이 일은 공의 한마디 말만 얻으면 나무 가지 꺾어오는 것보다 쉽다. 우리들이 해내겠다.’ 하기에 신이 비답을 주었습니다.

그 뒤에 이성시가 비밀히 통지하기를 ‘반드시 세자관의 하인을 증인으로 삼아야 장사(狀辭)에 증거가 된다.’ 하여 강효원이 평소 두 역관이 하는 짓을 분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있던 터라 강효원의 뜻을 은미하게 물었더니 강효원이 불끈 일어나 담당하기를 자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강효원도 이 사건에 연루하게 된 것입니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소상히 전해들은 소현은 이제야 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현은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법이 간단치 않았다. 조선과 청나라의 양국 문제만이 아니라 청나라 내부 정치상황이 얽혀있는 것만 같았다.
#소현세자 #강효원 #병자호란 #정명수 #정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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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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