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쩐치우와 주아이빠오
중국 저장성(절강성) 북부 도시 가흥은 수향(水鄕), 즉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 저베이 평원을 타고 흐르는 대운하는 양자강 삼각주로 합류한다. 강과 운하는 이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배를 띄워 놓고 물 위에서 사는 사람들은 수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워낙 강과 운하가 길고 광활하여 한 척 한 척의 배마다 모두 창해일속(滄海 一粟)처럼 고독해 보였다.
중국 여인 주아이빠오는 노를 잡은 손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배의 흔들림을 바로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시 거센 바람이 불어 방수포를 흔들어 놓았다.
"갈 수 있겠소?"
굵은 목소리를 낸 사내의 이름은 장쩐치우였다. 그가 선실의 천막 휘장을 들치고 나와서 여인 뱃사공에게 걱정처럼 물은 것이었다.
석양이 강물에 붉은 색을 담그는 저녁 무렵이 되면 바람이 거칠어지면서 운하의 물이 흔들리는 법이었다. 태양은 서녘 어딘가에 아직 남아있을 것이었는데, 하늘은 잿빛으로 불그스름할 뿐이어서 보는 사람을 약간 혼동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양자강의 황혼은 시간도 공간도 모호하게 만든다.
여인 뱃사공 주아이빠오는 어깨를 올려 뺨의 땀을 훔치며 사내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삼탑만 강변이 넓은 만큼 바람도 거셀 수밖에 없지요. 조금만 더 저어 들어가면 풍랑이 잦아들 겁니다."
그녀는 사내에게 어서 선실로 들어가 쉬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내는 여인의 노 젓는 모습을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다. 다시 그녀는 웃으며 재촉한다.
"선생님, 들어가셔요. 강바람이 몸에 좋을 리가 없잖아요."
할 수 없이 사내는 휘장을 들치고 선실로 들어가는 척하더니 다시 나오며 말했다.
"함께 얘기라도 나누면 힘이 덜 들지 않겠소?"
주아이빠오는 사내에게서 뜨거운 인정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는 흔들거리는 젖가슴 아래에서 선명한 감동의 통증 같은 것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10여 년 간 노를 저으며 수많은 남자들을 겪어 본 그녀였다. 바람이 이보다 거센 날도 많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장쩐치우 선생처럼 진심어린 관심과 걱정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녀를 걱정하는 장 선생의 눈빛에는 아버지가 험한 일을 하는 딸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장 선생을 중국 국민당의 혁명인사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장 선생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자기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태운 남자 중에는 무역상도 있었고 유랑자도 있었다. 그녀의 배에 탄 사내 중에는 일본 군인도 있었고 중국 군인도 있었다. 그리고 측량 기술자도 있었고 심지어는 밀정과 매국노까지도 탄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이제 한눈에 탑승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한두 마디 대화라도 나누게 되면, 그녀는 영락없이 상대의 신원을 알아맞힐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직감으로 장 선생은 혁명인사였으며 그것도 고위급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장쩐치우도 그의 진짜 이름일 리가 없었다. 그녀의 생각은 옳았다. 그는 고위급 혁명 인사였으며 장쩐치우는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잔 선생은 중국인이 아니며 한국인이란 것을 그녀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알건 모르건 장쩐치우, 즉 한국인 김구는 이미 주아이빠오의 중요한 남성이 되어 있었다. 그는 한사코 들어가지 않은 채 뱃전에 서 있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그래야 배가 안 흔들려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 됩니다."
그때서야 장 선생은 말없이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장 선생은 요즘 며칠 간 하염없이 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는 한 곳에 오래 정박하지 말라고 주아이빠오에게 일렀다. 그들은 동탑사, 남호 연우루, 그리고 서문 밖의 나법정 등 두루두루 명승고적을 유람했다. 장 선생은 언제나 유적들을 덤덤히 볼 뿐이었다. 그는 한 번도 소감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주아이빠오는 그가 내면 깊은 곳에 고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명승고적을 구경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5년 동안 강과 운하를 떠돈 김구와 임시정부
김구가 배에 오른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그는 가흥에서 중국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갔었다. 그를 꺼내준 사람은 손문의 친구 저보성이었다. 저보성은 김구를 안전하게 피신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분간 철저히 중국인으로 위장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중국 여인을 소개할까 합니다."
저보성은 중학교 교사인 과부를 하나 소개하겠다고 제안했다. 교양과 외모가 함께 수수하니 김구와 잘 어울릴 여자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김구는 얼마 전에 고생만 하다 죽은 부인 최준례를 떠올렸다.
"마침 그녀는 한국 독립운동의 영도자인 선생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김구는 청혼을 거절했다.
"그런 유식한 여자와 살게 되면 오히려 제 정체가 탄로 나기 싶습니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잖습니까? 차라리 저를 중국인으로 아는 무식한 여자가 더 나을 것입니다."
저보성은 여인 뱃사공을 수소문했고 그 결과 주아이빠오를 선택하여 김구와 부부처럼 지내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쫓기는 장년의 혁명가와 이방의 여자 뱃사공. 그들의 유사 부부 생활은 예상보다 길게 지속되었다. 그들은 사통팔달의 호수와 운하를 무려 5년 간이나 표류해야 했다. 그들의 모습은 보는 이에 따라, 젊은 아내는 노를 젓고 능력 있어 보이는 남편은 수려한 산하의 풍경에 무심히 도취해 있는 태평한 부부상일 수도 있었다.
이따금 임정의 요인들이 김구를 찾아와 밀담을 나눴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중국옷을 입었고 중국말에 유창해서 주아이빠오는 장 선생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 배의 작은 선실에서 한 나라의 정부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녀는 현상금이 붙어 있는 아주 위험한 사나이에게 다정한 아내처럼 굴며 끝없이 넓은 남호와 끝 모르게 이어져 있는 운하들을 오르내리고 또 오르내렸다.
주아이빠오보다는 한국식 발음으로 주애보라고 하는 편이 그녀에게는 더 어울리지 않을까? 주애보, 그녀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어느 귀퉁이에도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국의 여성 뱃사공 주애보는 한국의 임시정부를 '데리고 다녔던' 여성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임시정부를 5년 동안이나 '움직였던' 여성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공습이 심해지자, 김구는 임시정부를 살리기 위해 대륙으로 나서야 했다. 그는 주애보를 그녀의 고향 가흥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 후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여비를 100원밖에 주지 못한 일이다. 그는 5년 동안이나 나를 광동인으로 알아 섬겼고 나와는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겨서 실로 나에 대한 공로란 적지 아니한데,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 줄 알고, 노자 이외에 돈이라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이 참으로 유감천만이다. <백범일지>
와해된 조선혁명군, 길림성 삼림지대로 향하다
김문수 일행은 닷새 만에 평평한 고원 위에 올라섰다. 햇빛이 설원에 눈부시도록 가득 차 있는 고원 지대는 신비로운 눈세계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혹한과 싸우고 있었다. 이제 설원을 가로질러 하루 정도를 더 걸으면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다. 휘어진 나뭇가지에 매달린 고드름들은 마치 수세미 같아서 정겨웠다. 그들은 눈 위에나 있는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며 걸었다.
조선혁명군을 인솔하는 지휘관은 김문수였다. 양세봉 장군이 죽은 후 김문수가 그들의 지도자로 추대된 것이었다. 일본군의 남만주 토벌작전은 독립군들에게 새로운 삶을 강요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들은 남만주에서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반 년 동안 병력은 뿔뿔이 흩어져 이제 50여 명밖에는 남지 않았다. 더러는 전사하고 일부는 중국 관내의 조선의용군을 찾아 떠났고 다수는 소련으로 가 공산주의 독립군에 합류했다.
김문수는 그들의 거취를 모두 개인의 의사에 맡겼다. 남은 50여 명은 김문수와 함께 길림 북방의 삼림지대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곳에 가서 산속에 살면서 길림시와 연계하여 새로운 투쟁 방식을 강구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걸음이 늦었는지 아니면 예상보다 길이 멀었는지, 그들은 눈 위에서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밤 기온은 무섭게 떨어질 것이었다. 설원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것은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지리도 모른 채 무작정 더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문수는 단호하게 야영을 결정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솔가지와 나뭇가지를 최대한 모으시오.”
그들은 7,8명씩 조를 짜서 움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솔가지와 나뭇가지들을 깔았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비비며 쭈그리고 앉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은 오그라들었고 그럴수록 목과 어깨가 뻣뻣이 굳어졌다. 메마른 눈물이 괴었다가 그것이 얼어 눈시울이 차가워지기도 했다. 그들은 조국이 준 형벌에 떨며 밤하늘의 별 떨기들에 목숨을 기원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차갑고 무거운 적막을 감히 깨려하지 않고 있었다.
김문수는 대원들의 야영 상태를 모두 점검한 후 동지들의 어깨 사이로 끼어 들어갔다.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먼 곳에서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메아리가 되어 겨울 숲을 헤치고 설원에 스며들어 그들의 귀에까지 닿고 있었다. 모두들 구둣발이 얼어붙고 있었다. 그나마 눈보라가 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해 쓰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약 200회 정도까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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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인간] 백범의 애틋한 여인, 주아이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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