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불문곡직 1
.. 그래, 사람을 그렇게 얼어죽게 하고 때려죽인 네놈들이 대역죄지 내 무슨 대역죄란 말인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낫을 한 번 치켜든 것뿐인데 바로 그렇게 대드는 것이 대역죄란다. 그것이 어째서 대역죄란 말인가. 아니다. 죽어도 아니다. 하면 기다 하라고 내려치고 기다, 하면 어째서 불경스럽게도 감히 그런 생각을 했더란 말이냐, 불문 곡직하고 옥에 처넣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옥 속은 그냥 잠을 재워 주는 곳이 아니었다. 잠자리 값을 하라고 매를 치고 밥값을 하라고 모진 일을 시켰다 .. 《백기완-위대한 이야기》(민족통일,1990) 24쪽
‘대역죄(大逆罪)’로도 적을 수 있지만, ‘큰죄’라 써 보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한 낱말로 안 적어도 된다면 ‘어마어마한 죄’나 ‘엄청난 죄’라고 적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도저히(到底-)’는 ‘도무지’로 다듬습니다. ‘불경(不敬)스럽게도’는 ‘버릇없이’나 ‘버르장머리없이’로 손보고, ‘감히(敢-)’는 ‘함부로’로 손봅니다.
┌ 불문곡직(不問曲直) :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아니함
│ - 죄 없는 그들을 불문곡직 잡아다가 어쩌겠다는 거요? /
│ 전후 상황을 불문곡직하고 나를 보자마자 대뜸 /
│ 사실 여부를 불문곡직하고 화부터 내면 어떻게 합니까
│
├ 불문 곡직하고 옥에 처넣어지고
│→ 앞뒤 따지지 않고 옥에 처넣어지고
│→ 아무 까닭 없이 옥에 처넣어지고
│→ 아무 이야기 없이 옥에 처넣어지고
└ …
이 자리에서는 앞말과 이어서, “그런 생각을 했더란 말이냐, 묻지도 않고 옥에 처넣어지고”처럼 손질할 수 있습니다. 한글로만 적어 놓으면 뜻이나 느낌을 썩 알기 어려운 ‘불문곡직’인데, 이 한자말이 귀에 익고 손에 익은 분한테는 그다지 어렵거나 까다롭다고 느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가만히 보면, 돈 많은 이가 돈 적은 이 삶을 헤아리지 못하고, 몸 튼튼한 이가 몸 여린 이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말 지식을 많이 쌓은 이들은 말 지식이 적은 이를 너른 마음으로 굽어살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얼마든지 손쉬운 낱말을 고를 수 있고, 얼마든지 살가우면서 알맞춤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으련만, 꼭 자기 손에 익은 낱말로만 글을 쓰려고 합니다. 자기 입에 익은 말투로만 말을 하려고 합니다.
┌ 불문곡직 잡아다가 → 까닭 없이 잡아다가
└ 불문곡직하고 화부터 내면 → 무턱대고 화부터 내면
까닭이 없이 쓰이는 한자말이 참 많습니다. 무턱대고 그냥저냥 써 버리는 얄궂은 말 또한 몹시 많습니다. 듣는 이를 생각하지 못하는 말, 읽을 이를 살피지 못하는 글, 우리 이웃과 동무와 뒷사람한테 마음쓰지 못하는 이야기가 자꾸만 쏟아집니다.
돈을 벌려고 쓰는 책인가요, 마음을 살찌우려고 쓰는 책인가요. 돈을 긁어모으자며 하는 일인가요, 나 스스로 아름답고 내 이웃을 껴안으려고 하는 일인가요.
우리 일 매무새에 따라 말 매무새가 달라집니다. 우리 삶자락 모습에 따라 우리 글자락 모습도 바뀝니다.
ㄴ. 불문곡직 2
..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인즉 ……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불문곡직하고 너와 사귀고 있는 그 사내의 태도는 어떻드냐고 물었다 .. 《백기완-거듭 깨어나서》(아침,1984) 182쪽
“도움을 요청(要請)하는”은 “도움을 바라는”으로 다듬으면 됩니다. “그 사내의 태도(態度)는 어떻드냐”는 “그 사내는 어떻게 하드냐”라든지 “그 사내 매무새는 어떻드냐”나 “그 사내는 어떻게 나오드냐”로 풀어 줍니다.
┌ 나는 불문곡직하고
│
│→ 나는 막바로
│→ 나는 다 집어치우고
│→ 나는 무엇보다도
│→ 나는 이 말 저 말 할 것 없이
└ …
글흐름이나 말흐름을 찬찬히 헤아리면, 때와 곳에 맞추어 살가운 느낌을 잘 담아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글쓴이한테 도움말을 바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 오니, 문제를 풀려고 이것저것 물어 보아야 하겠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어느 하나를 따져 보아야겠다면서 ‘불문곡직’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그래, 말 그대로 ‘다른 무엇보다도’라든지 ‘무엇보다도’라든지 ‘어느 무엇보다’를 넣으면 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를 뜻하는 네 글자 한자말 ‘不問曲直’을 넣어야 하지 않습니다. 따지지 않는다니 ‘不問’이요, 앞뒤 형편이 옳으냐 그르냐이니 ‘曲直’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 깜냥껏 “까닭을 묻지 않다”나 “왜 그러한지 캐지 않다” 하고 말하면 넉넉합니다.
‘막바로-곧바로-대놓고-바로’ 같은 낱말을 넣어도 어울립니다. 글쓴이 입말을 살리면서, ‘다 집어치우고’를 넣어도 되고, ‘다른 말은 다 접고’를 넣어도 괜찮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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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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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보다 좋은 우리 '상말' (42) 불문곡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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