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분의 캐롤음반 <화이트 크리스마스>
Paramount
내 어린시절 성탄절의 기억은 낡은 레코드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바랜 빛의 레코드 자켓 위에는 '팻 분(Pat Boone)'과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 영어는 물론,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어린이 눈에는 대략 이렇게 보였을 것이다.
"&^ㅊ %>>#@ +/$ㅊ@ ㅏ/m$=ㅊ8^-" 음반을 얹고 전축 바늘을 들어올리면 검은색 플라스틱판이 돌기 시작했다. 곧 바늘은 '투둑' 소리와 함께 가장자리로 떨어지고, 치직거리는 먼지 소리와 더불어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 귀향(I'll be home for Christmas)"을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나만의 '개사곡'으로 따라부르곤 했다.
매년 이 때가 되면 그 노래들은 '마이마이' 속의 테이프에서, 휴대용 시디 플레이어를 거쳐 아이팟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팻 분이 누구예요?" 지구 반대편 동아시아에서 온 사내의 추억이 된 미국가수를 눈 앞의 미국인은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문화차이보다 세대차이가 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의 '미국산 추억'이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엘리자베스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보내는지 알고 싶어했다.
미국은 '들어가는 날', 한국은 '나가는 날'한국과 미국의 성탄절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미국이 '집에 들어가는 날'인 반면, 한국은 '집에서 나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크리스마스 경험으로 '방바닥 긁기'를 꼽는다. 반면에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가장 슬픈 성탄절은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특별히 더 가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평상시 가족과 (지겨울 만큼) 더불어 사는 한국인들이 '이날 하루만은...' 하며 밖으로 나간다면, 평상시 독립적으로 살아 온 미국인들은 '이날 하루만은...' 하는 생각으로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설날과 비슷하다.
미국인들의 '가정적인 크리스마스'가 항상 평화롭고 따뜻한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미국인들이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시기 가운데 하나다. 스트레스 원인 가운데 으뜸은 '선물'이다. 가족, 친척, 친구들을 위해 선물을 마련하기가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지만, 매년 같은 사람에게 다른 선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성탄이 다가오면 방송, 신문, 잡지는 자상하게 '크리스마스 스트레스(Christmas stresses) 피하는 법'을 가르쳐 주곤 한다.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들이 나서서 '초과지출을 피하라'든가 '가족과의 말다툼 예방을 위해 민감한 주제를 피하라'는 등의 조언을 하지만, 이들도 그 와중에 열심히 선물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