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난초' 시인 이병기의 색다른 면모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28] '사과벌레' 편

등록 2009.04.05 13:33수정 2009.04.0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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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은 방에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폭격으로 집이 울컥하고 문풍지가 드르르 떨렸다. 육지에서는 인민군이 낙동강 인근까지 쳐내려갔다고는 하지난 제공권은 미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 움막에서 사라진 이두오를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정숙의 말로는 명륜동에 있는 친구 집에 책을 빌리러 간다고 했는데, 그 뒤로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3일째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사고임이 분명했다. 폭격에 맞았거나 인민군에게 체포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달리 손을 써 볼 방도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서울대 교수들 전원 의용군 지원안 가결

그는 교수회의에서 '전원 의용군 지원안'이 가결된 후, 학교를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는 교수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렇게도 재빨리 변신할 수 있는 것인지? 모름지기 지식인이란 정치· 사회 문제에 올바른 식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지식인의 언로를 통제· 감시하는 것은 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지식인이라고 해도 처자를 거느린 약한 존재라는 점에서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자기처럼 침묵이라도 하는 것이 차라리 온당하다고 생각 들었다. 하지만 명색이 국립 서울대학교의 교수라는 사람들이 권력 앞에 스스로 굴종하여 '전원 의용군 지원안' 따위나 가결시켰으니 그것은 역사에 남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임이 분명했다.

그들 중에 정말 의용군으로 나갈 생각이 있어서 지원안에 찬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터였다.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낯이 뜨거워지는 일이었다.       

교수라는 사람이 학교에는 가지 않고 빈둥거리기만 하자니 자꾸 남의 이목이 의식되었다. 그래서 그는 움막도 둘러볼 겸해서 삽과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 오전 내내 뙤약볕을 받으며 일을 하고 난 후였다. 뜻밖에도 조수현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서둘러 일어나 남방셔츠를 걸쳤다. 조수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에야 확인되었습니다. 이두오씨는 의용군으로 붙잡혀 갔습니다. 지금 배재중학교에 있다고 합니다."

조수현은 그저께 움막에 갔다가 이두오가 없자 불길한 예감에 싸인 나머지 의용군 지원자를 조회해 보았다고 했다.


"쯧쯧. 이두오가 지원했을 리는 없고...."
"면목 없습니다. 당의 방침은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징집하면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요즘 들어 현저히 과잉 충성자가 많아지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김성식은 공산당의 기본 방침이 강제 징집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를 통해 처음 알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들에게도 강요하는 형국입니다."

조수현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지긋 깨물었다.

"아무튼 김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와 함께 가셔서 이두오씨가 대학 연구원이라는 것만 증언해 주십시오.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가고말고요. 오히려 제가 고맙다고 해야 할 일입니다."

김성식은 벌떡 일어났다. 그는 갑자기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돈암동까지 지구대 지프를 이용했다.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내린 그들은 며칠 전부터 운행이 재개된 전차를 타고 갔다.

동국대학과 성균관대학을 우대한 인민공화국

인민공화국은 남반부의 학교에 대해서도 철저히 구별해서 대우하고 있었다. 혜화전문에서 승격한 불교 대학인 동국대학이나 조선 유학을 계승하는 성균관대학은 비교적 도심에 있는데도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은 반면, 일제의 후신이라고 본 서울대학이나 경기중학교는 거의 학교 운영을 마비시켰다.

서울대학에는 인민군 사령부와 예하 기관들이 대거 들어섰고 경기중학교에는 의용군 지원수용소를 설치했다. 다음으로는 선교사 학교들이 피해를 보았다. 배재중학교는 감리교 학교인데다 이승만의 출신교라서 더욱 천대를 받았다. 그곳에는 의용군 교육대가 있었다.

김성식은 인민공화국의 교육 방침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알기나 하는 듯이 조수현이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종교가 있으세요?"
"없습니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조상을 섬깁니다."

조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종교는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고 봅니다."

김성식은 너희들이 섬기는 김일성이나 스탈린은 종교가 아니고 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인민군 장교에게 그럴 수도 없었고 왠지 그녀에게만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배재중학교 정문에는 유달리 큰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이승만 괴뢰도당을 어서 바닷속으로 처넣자.

김성식은 이두오를 찾는 것은 좋았지만 그런 플래카드를 대하니 한편으로 착잡한 심사를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이승만이야말로 정말 비참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를 빼앗기고 자기가 다녔던 학교에도 저런 구호가 붙었다면, 그는 분명히 인생에 실패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조수현과 김성식의 노력으로 이두오는 풀려날 수 있었다. 이두오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문지르며 미안하고 고마운 빛을 동시에 보였다.

"장교님이 아니었다면 자네는 따발총을 들고 별을 봐야 했어."
"미안하고도 고맙습니다."

조수현이 겸손한 어조로 말했다.

"김 선생님께서 보증을 해 주셔서 일이 풀린 겁니다."

김성식은 젊은 인민군 여자 장교가 대견하고도 경하스러웠다. 일은 제가 다해 놓고 공은 남에게 돌리는 그녀의 교양과 겸양이 유달리 돋보여 보였다.

"이제 다른 일 하지 마시고 움막에서 별만 연구하세요. 그래야 저도 별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수현씨가 만들어 준 통행증이 있었기에 그나마 대기 훈련을 받은 것이지 아니면 곧장 전선으로 투입될 뻔했습니다."

이두오는 또 머리카락 속에 손을 넣었다.

"가시면 우물물에 머리부터 감으세요."

조수현과 김성식은 눈을 맞추며 빙긋이 웃었다.

그런데 교문을 나서려다가 김성식은 믿기지 않는 장면을 목도했다. 그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훈련병 중에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문리대 교수들이었다. 40 전후의 교수 몇이서 어린 소년들과 함께 흙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명은 분명히 이병기였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결의만 했을 뿐 실제로는 의용군 지원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유독 고전과 골동품을 애호한다던 <난초>의 시인 이병기는 몸소 나가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어떤 피치 못할 곡절이 있는 건지, 아니면 인민공화국에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건지, 내막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것은 황당하고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다.

'사람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다.'

김성식의 소감은 바로 이것이었다.
#동국대학 #성균관대학 #가람 이병기 #배재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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