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고나자 세상은 온통 달라진 것투성이였다. 그 달라진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들이 지천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머리 아픈 것은 외울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 외워야 할 것들 중 가장 골칫거리는 사람 이름들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내 이웃과 친척과 자주 어울리는 동무들 몇몇의 이름만 알고 있으면 되었는데 이제는 우리 마을 뿐 아니라 이웃마을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같은 반 여든네 명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외워야 했다. 게다가 선생님들의 이름까지.
더군다나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새로이 고쳐 외워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여간 신경질 나는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 '용페이'나 '희차이' 혹은 '헹심이'라고 부르던 동무들의 이름은 이제 국민학생이 됐으니 '용평' '희찬' '형심' 따위로 불러야 한다 했으며, 우리 사이에서 '딸맥이'로 통하던 정씨네 집 여자아이는 '정막녀'라는 생소한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사람 이름뿐 아니었다. 도시에서 온 여자 담임선생님은 우리가 어떤 이름들을 부를 때마다 걸핏하면 도리질을 하거나 혹은 고개를 갸웃거려보이고는 그것들의 다른 이름들을 내놓았다. '학조'나 '짐치'는 틀린 말이니 '학교', '김치'라고 안 하면 혼낸다 했고, 그 곳 남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감재'(감자)라고 불러온 그 먹을거리 역시 가차 없이 가위표를 치고는 '고구마'가 옳은 명칭이며 감자는 아예 따로 있는 것이라면서 우리를 촌놈들이라며 닦아세웠다. 그러나 그 정도야 우리도 얼핏 알고 있는 것들이어서 얼마든지 고쳐 부를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은 육지에서만 살아서 바다 구경은 처음이라면서도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우리들의 바다와 관련된 언어생활마저 통제하려 들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썰물 때 잡아온 갯것들 몇 가지를 소쿠리에 담아 들고 희철이와 함께 선생님들이 기거하는 사택으로 심부름을 갔다. 그 여선생님은 소쿠리 속의 그것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는 일단 '어머나' '세상에' 같은 고상한 말들로 놀라움을 나타내었다.
"우리 엄니하고 희철이 즈그 엄니가…아니, 참, 우리 어머니하고 희철이네 어머니가 이 밤새이하고 굴메이를 갖다 드리라고 그래서…"
"어머 징그러워. 가만 있자, 남자 선생님을 불러와야겠다. 그런데 참, 너 이게 뭐라고 그랬지?"
"그 꺼멓고 가시가 큰놈은 기냥 밤새이라고 하고…"
"밤새이? 밤송이…? 그럼 가시가 몽글몽글한 이것들은?"
"고놈들은 까까중 맨치로 생겠응께 중밤새이…"
"푸하하하하, 이 촌놈들 땜에 정말 못 살겠어. 잠깐 기다려."
선생님은 방안 어딘가를 뒤적거리더니 두툼한 책 한 권을 들고 나와서는 우리에게 책 속의 그림을 들이밀면서 일장 훈시를 시작했다.
"야, 촌놈들아, 너희들이 밤송이라고 한 이거는 표준어로 성게라고 하고 여기 보랏빛 나는 이거는 보라성게라고 하는 거야. 또 저걸 아까 뭐라고 했지?"
"굴메이…"
"그건 군소야, 군소. 알겠어? 잘 됐다. 이 세 가지 이름을 내일 학교 올 때 외워가지고 오는 거, 숙제야."
우리는 빈 소쿠리를 들고 오리(五里) 길을 걸어 마을로 돌아오면서 장차 밤새이니 중밤새이니 혹은 굴멩이 같은 정든 말들을 대신해서 사용할 '성게, 보라성게, 군소…'를 수도 없이 중얼거렸으나 아침이 되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일방적으로 우리나라 말을 버리고 도회지에서 온 그 여자 선생님이 던져주는 말들을 군소리 없이 따라야 하는지를 놓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
비교적 큰 교실이라고는 하지만 여든 명이 넘는 아이들을 한 군데에다 모아놓고 수업을 했으니(출석부 한 개로는 이름을 다 올릴 수 없었으므로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두 개의 출석부를 들고 다녔고, 여선생님 혼자서 담임노릇이 버거웠으므로 교감선생님이 그 역할의 절반가량을 맡아 했다) 교실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교감선생님보다는 도회지에서 온 여자 선생님이 아이들 통솔을 훨씬 잘 했다. 그 비결은 잔소리와 회초리였다. 그 여선생님은 분위기가 산만하다 싶으면 눈을 감게 만든 다음 한정 없이 잔소리를 해대거나(그러는 중에 깜박 잠이 들어서 통로로 고꾸라지는 녀석도 있었다), 수틀리면 교단으로 불러내서는 낭창낭창한 회초리로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때림으로써 우리를 두렵게 만들었다.
물론 그 여선생님도 어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긴 했다. 한 번은 한창 수업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교실 출입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가 불쑥 들어와서는,
"용자야, 오후에는 뒷재 논배미에 거름내야 항께 공부 두어 시간 했으면 인자 그만하고 언능 나온나. 애기도 보고 밥도 해야제."
그러면서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공부하고 있는 딸의 손목을 잡아끌고 유유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여선생님은 어찌할 줄을 멀라 한 동안 놀란 눈을 껌벅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가, 그 다음에는 회초리를 다잡고서 애꿎은 우리에게 앙갚음을 하려 들었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다들 눈 감어!"
우리는 또 눈을 감았다. 그런데 내 짝꿍 재술이가 속이 좀 불편했던지 그전부터 자꾸만 한 손으로 가슴을 만지면서 괴로워했다. 학교가 있는 용출리 출신의 마재술이는 내 아버지 친구의 아들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가 입학하기 전부터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재술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 때,
"야, 이선호! 눈감으란 소리 안 들려!"
고함 소리와 함께 칠판지우개가 날아왔다. 난 얼결에 고개를 돌려 피했고 그 지우개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이 눈을 감고 있던 내 뒷자리의 남식이 얼굴로 날아가서 한바탕 분칠을 해버렸다.
"선호 이 녀석, 앞으로 나와!"
선생님의 목소리에 '밤새이 가시'보다 더 날카로운 것들이 삐죽빼죽 박혀 있었으므로 나는 앞으로 나가면서, 날아오는 지우개를 눈 질끈 감고 맞아줄 걸 괜히 피했다고 생각했다.
"너 이 녀석, 선생님이 눈 감으라고 한 소리 들었어, 못 들었어?"
"들었는디라우, 아, 아니…들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애를 때리고 장난을 쳐?"
"때린 것이 아녔는디…재술이가 자꾸 폭깍질을 해싸서 등을 띠디레주니라고…"
"뭐? 인석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포…뭐라고?"
"폭깍질이오. 재술이가 시방도 하고 있응께 물을 조깐 갖다 줘야쓰겄는디…"
"선생님 말 안 들어서 벌 받으러 나온 녀석 태도 좀 봐라. 손바닥 펴!"
난 주저 없이 두 손바닥을 펴보였다. 선생님이 회초리를 들었다가 내려치려다 말고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너, 재술이가 지금 하고 있는 저것을 뭐라고 한다고?"
"폭깍질이오."
"초온놈. 저건 딸꾹질이라 하는 거야. 딸꾹질. 알았어?"
"폭깍질인디…"
"이 녀석 봐라. 뻐꾹뻐꾹 우는 새는 뻐꾹새고 개굴개굴 하는 거는 개구리지? 딸꾹딸꾹 하는 거니까 딸국질이라 하는 거야. 앞으로 딸꾹질이라고 해. 주전자 물 한 한 잔 따라서 갖다 줘."
나는 교탁 옆 주전자의 물을 따르면서 선생님이 순어거지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차피 소리를 시늉 내어서 만든 말이라면 지금 재술이 입에서 나는 소리는 '딸꾹딸꾹'보다는 '폭깍폭깍'이라고 해야 더 실감 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그것을 '딸꾹질'로만 말하고 써야 한다는 것은 억울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적어도 선생님 앞에서는 딸꾹질이라 말해야 하고, 학교에 검사받을 일기를 쓸 때에도 그렇게 써야 할 것이다. 왜냐고? 그 소리의 모양이 '딸꾹딸꾹'이라고 생각하는 선생님이, '폭깍폭깍'이라고 생각하는 나보다 더 나이도 많고 부자고 힘도 세고 똑똑하고 더 무섭기 때문이다.
선생님하고 내가 딸꾹질이니 폭깍질이니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아이들 절반가량이 눈을 떠버렸으므로 이제 더 이상 벌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물 한 잔을 따라서 재술이에게로 향했을 때 끝종이 울렸다. 선생님이 출석부를 챙겨들고 교단을 내려섰다. 그때 난 제법 큰 소리로 아이들을 향해서 물었다.
"야, 느그들 딸꾹질이 좋냐, 폭깍질이 좋냐?"
"폭깍질!"
아이들이 배에 힘을 주고 그렇게 합창을 했다. 복도로 한 걸음을 나갔던 선생님이 깜짝 놀라 몸을 돌렸으나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교무실로 행했다. 내가 만일 '느그들 딸꾹질이 맞냐 폭깍질이 맞냐?' 그렇게 물었다면 다시 나를 불러다 닦달을 할 수 있었겠지만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아이들이 폭깍질을 더 좋아한다는 데에야 달리 할 말이 없었을 터이다.
"자, 물 마셔."
그러나 재술이는 괜찮다고 했다.
"나 폭깍질 다 들어가부렀어야. 인자 암사랑토 안 해."
월요일 아침, 여느 때 같았으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줄맞춰 서서 재건체조를 하고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얘기를 듣고 금주의 주훈 발표를 하고…'애국조회'라고 일컫는 그런 행사를 했을 것인데, 그날은 조회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종이 울리지 않았다.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으나 우리는 조회를 건너뛸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도 우선 기분이 좋았다.
남자 아이들은 고무신 신은 발등을 새끼줄로 감아 묶고서 지푸라기를 뭉뚱그려 만든 공을 어지럽게 차고 다니면서 축구공 놀이를 했다. 어쩌다 누군가가 육지에서 온 친척으로부터 고무공을 선물로 받아서 가지고 등교하는 경우 그날은 하루 종일 운동장에 생기가 넘쳤다. 그러나 학교 울타리가 허술해서 걸핏하면 공이 울타리너머 밭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거그 공 조깐 줏어서 땡게 주씨요이."
아이들이 쥐똥나무 울타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그렇게 입을 모아 소리치면 밭에서 일하던 주인이 마지못해 공을 주워 던져주었다. 그런데 밭에 주인이 없을 경우 아이들이 공 주우러 간다며 풀썩풀썩 뛰어내리는 바람에 울타리 바로 밑의 작물들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밭주인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그는 고무공을 운동장으로 던져줄 것처럼 하다가,
"느그들, 뽈차기 하니라고 우리 밭 곡식 못 씨게 맨들어뿔면 어치케 되는지 내가 시방 알켜 줄 것잉께 잘 봐라, 이."
다음 순간 탱탱하던 고무공에 낫 끝이 내리박히고 피식, 바람이 빠져 쪼그라진 고놈을 밭주인은 운동장으로 휙 던져 주었다. 하지만 우리의 낙담은 잠시뿐이었다. 찢어진 고무 공 속에다 헝겊 따위를 쑤셔 놓고는 고놈이 너덜너덜해질 때가지 또 다시 공차기를 계속했다.
종소리가 울렸다. 세 번 울리는 것으로 보아 시작종이었는데 몇 교시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단 교실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 날 학교에 출근한 선생님은 전교를 통틀어서 교장 선생님 한 명뿐이었다. 선생님들은 평일에는 학교에 딸린 사택에서 기거하지만, 대개 토요일이 되면 연안여객선을 타고 육지의 본가로 나갔다가 일요일 저녁에야 돌아오곤 했다. 남해서부 해안에 자리 잡은 생일도는 한반도를 거치는 거의 모든 태풍의 관문 같은 곳이어서 걸핏하면 태풍 주의보 때문에 회진이나 마량 포구에서 여객선의 발이 묶이곤 했다.
"오늘은 담임선생님이 안 계싱께 특별학습을 할 것이여. 자, 교장선생님이 여그다 요놈을 걸어두고 갔다가 이따가 검사하러 올 것잉께 공책에 적은 다음에 다 외워야 돼. 알겄어?"
교장 선생님이 종이 두루마리를 펴더니 칠판 위 못에다 걸어놓고 나갔다.
"저거이 뭣이여?"
"앗다, 글씨가 저렇게나 많은디 어치케 공책에다 전부 다 베께서 쓰라는 말이여?"
"쓰기만 하는 거이 아니고 다 외와야 한당께. 교장 선생님 진짜 무섭다드라."
"맞어. 6학년 성들도 잘 못 하다가 걸렸다 하면 손바닥으로 따구를 기냥 막, 이렇게…"
아이들이 공책과 연필을 들고 칠판 쪽으로 몰려 나갔다. 나도 나갔다. 몇몇 아이들이 자랑삼아서 그 내용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1.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이 나라 사회의 모든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그러나 고백하거니와 '혁명공약'이라는 제목 아래 나열된 다섯 개 항목의 내용들 중에서 내가 그 뜻을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금세 싫증이 났다. 교장 선생님이 검사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글자를 끄적거려 보다가 그만두고 떠드는 일에 열중하였다. 아이들은 통로로 어디로 달려 다니면서 우당탕탕 자빠지고 구르고 야단이었다. 나는 심심했으므로 칠판으로 나가서는 분필토막을 집어 들고 칠판에다 이렇게 썼다.
'여성의 매력은 정상적인 멘스에서!!!'
우리 집 방안 천장 구석을 발라놓은 신문지에서 보고 외운 광고 문구였다. 공교롭게도 끝부분을 쓸 무렵에 분필 토막이 부서졌으므로 '…멘스에서!!!' 어쩌고 하는 그 부분은 아마도 빨간 분필 토막으로 썼던 것 같다.
드디어 교장 선생님이 종례를 하기 위해서 들어왔다. 나는 내가 써놓은 그 글귀를 보고 무어라 할 것인지 궁금했으나 결과는 실망이었다.
"여그다 누가 뭣이라고 써놓은 것이여? 정상적인 멘스…가 뭔 말이여. 자, 다들 집에 돌아가라!"
혁명공약보다 훨씬 더 멋지고 근사한 말일 터인데 교장 선생님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터지고야 말았다. 그 전날 우리는 담임선생님도 없겠다, 청소고 뭣이고 작파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인데, 다음 날 등교를 했을 때 그 여자 선생님은 잔뜩 뿔이 나 있었다.
"이거 누가 썼어!"
선생님은 내가 칠판에 썼던 바로 그 글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이선호 네가? 앞으로 나와!"
나는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선생님이 회초리로 내 손바닥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때리는 기세로 보아서 칠판에 낙서했다고 내리는 벌 정도가 아닌 성불렀다. 손바닥에 불이 났다. 선생님은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고서 끝도 없이 회초리를 내려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배꼽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어디서…"
나는 손바닥을 얻어맞으면서 눈길을 아래로 깔고서 살펴보았으나, 저고리 아래쪽에 단추를 하나 더 달아 단단히 잠갔기 때문에 내 배꼽이 선생님에게 보일 리가 없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격은 필화(筆禍)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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