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했어요?"란 말을 '내가 쏜다'로 들었구나!

[자전거 세계일주109] 과테말라 플로레스(Flores)

등록 2009.06.30 09:38수정 2009.06.3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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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레스의 비경 페텐이싸 호수의 해질녘. ⓒ 문종성


과테말라 최대의 유적지인 티칼로 가는 관문인 꽃의 도시. 그러나 호수가 더 아름다운 마을 플로레스. 플로레스, 산타엘레나, 산베니토 등 페텐이싸(Peten Itza) 호수를 중심으로 도로로 연결된 이 작은 세 마을을 통칭해서 바로 플로레스라 부른다. 세마나 산타를 앞두고 도시는 경건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차분한 기다림으로 시간을 흘러 보내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갓 상경한 촌뜨기마냥 거리에서 이래저래 촐랑대는 녀석은 자전거 여행자인 나 뿐.

그러나 아무리 큰 축제를 앞두고 있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있다. 바로 숙박전쟁이다. 세마나 산타 때면 특히 그 축제가 화려하고 신성하다고 소문난 과테말라 전역에는 미주와 유럽, 남미 곳곳에서 오는 여행객들과 가톨릭 신자들로 숙소 잡는 게 하늘의 별따기란다. 오죽하면 이 기간에만 평소 때의 두 배 이상의 가격을 불러도 예약이 쉽지 않다. 가격이 싼 곳은 몇 주 전부터 이미 예약이 끝나있고,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중간 가격은 한 철 수확을 꿈꾸는 숙박업소들의 기대심리로 거품이 끼어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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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으로 나들이 온 가족의 구두를 닦는 남자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 진다. ⓒ 문종성


하지만 그 무엇이 두려우랴? 나는 숙박업소들을 사뿐히 제쳐 주시고 유유히 나만의 침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곳, 마음 편히 방문하며 금방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곳. 그렇다. 소방서다. 언제 어디라도 나만의 침대가 제공되는 럭셔리 도미토리. 24시간 비상근무 체제라 항상 침대가 남아있지, 샤워랑 손빨래도 되지, 때로는 대원들과 함께 식사도 되지, 이만한 호사가 또 어디 있나 싶다.

플로레스 소방서. 역시나 그들은 나를 따뜻하게 껴안아 주었다. 원래는 하루만 있자고 하던 것이 이틀 밤이나 같이 지내게 되어 버렸다. 멕시코에서도 몸이 아플 때 무려 3박 4일을 소방서 신세 진 적이 있었다. 대원들이 아픈 내게 음식도 가져다주고,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줘서 다 나아 간 적이 있을 정도니. 마치 내 집처럼 익숙하게 정리하고, 쉬는 동안 이곳에서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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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텐이싸(Peten Itza)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아이들. ⓒ 문종성


<에피소드 하나>

첫째 날 저녁이었다. 배가 고팠던 난 한 대원에게 음식점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친절한 그 대원이 맛있는 타코 집을 안다며 차에 태워 준단다. 마침 시장했던 건지 같이 있던 또다른 대원들도 합승했다. 별 생각 없이 식당에 도착해서 지글지글 고기 익는 냄새에 취해 있는 내게 대장이 말했다.

"문, 넌 타코 몇 개 먹을 거야? 음료수는 뭐로 할래?"
'아하, 대장이니까 본인이 쏠려고 하는구나. 역시 멋진 리더십!'


기분 좋게 생각하고 먹고 싶은 대로 대답했다. 대원들도 따라 각자 취향대로 대장에게 얘기했다. 그런데 테이크 아웃으로 음식을 싸 가는 걸로 했는데 분위기가 수상했다. 주인에게 음식을 건네받은 후 다들 멀뚱멀뚱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빛들이 한 곳으로 초점 맞춰지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이를 어째, 다들 날보고 있었다. 특히 대장의 눈은 정말 막중한 책임감으로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난 눈망울 속에 비친 흐릿한 메시지를 읽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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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마나 산타 전야에 길 위에 순례를 위한 장식을 해 놓았다. ⓒ 문종성


'안 쏴?'
'오~ 신이시여!'
그들은 한 점 의심도 없이 당연히 내가 타코를 사는 줄로 알고 따라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의심없는 어린 아이처럼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차마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나중에 깨달았다. 인사치레로 했던 "식사했어요?"란 말을 그들은 "식사하러 갈까요?"라는 대접으로 알아들었다는 것을. 마침 그들이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으레 그 말을 오해할 수밖에. 그러니 식당으로 간다고 할 때 다들 기분 좋게 합승했던 거였다. 말 한 마디 던진 것으로 정말 한국과 과테말라의 언어문화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대가는 공부한 셈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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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저기도 데이트 중인 연인. ⓒ 문종성


<에피소드 둘>

소방서 직원 중에 여성이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까무잡잡한 피부, 현지인치고는 단아한 외모와 그래도 나름 공부를 한 탓에 소방서에 들어오게 된 깨어있는 여성이었다. 나와 스칠 때마다 쑥스럽게 눈웃음치는 그런 친구였다. 그런데 뭔가 낌새가 요상하려니 다른 대원들이 나와 그녀를 엮어주려는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들으라는 듯 재밌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심성 곱고 얼굴도 예쁜 좋은 여자라구. 잘 해 봐!"
"야, 우리한테는 관심도 안 주더니 자전거 타는 한국 녀석한테 푹 빠졌네."
"둘이 눈 맞는 거 아냐? 여기다 살림 차리면 안 돼. 애 키울 데가 없거든!"

그러면서 서로들 낄낄대는데 그것이 이방인인 나에게 좀 더 친밀하게 대하는 그들만의 장난이었다. 어쩌면 지금 생각에 혹시나 괜한 질투심(?)에 오히려 고도의 방해공작이 아니었나 싶다. 하긴 소방서 사무실 아줌마를 빼면 인물 괜찮은 유일한 여성이었으니.

그것 때문일까. 아쉽게도 그녀와는 사진 한 장 찍지도 못했다. 그녀는 늘 일상적인 인사와 안부만 건네고는 웃음으로 서로의 거리를 메웠다. 덕분에 이름도 기억나질 않는다. 그녀의 미소를 보면 그녀의 이름과 플로레스 소방서가 단번에 기억날 텐데 말이다. 이젠 그녀의 앞날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추억을 대신해야 한다.

이렇듯 지금도 생각나면 가고 싶은 중남미의 소방서들이 많이 있다. 너무 따뜻했던 만남들, 그리고 살가운 정들. 자전거 세계일주 하면서 괜히 숙박의 80%를 소방서나 경찰서에서 해결하는 게 아니다. 그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데 감정을 아끼지 않는 멋진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밤 새로운 도시에 들어가 찾아가는 소방서로의 발걸음 언제나 설렌다. 또 하나의 정겨운 추억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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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여행의 편안한 친구 소방서 대원들. ⓒ 문종성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세계일주 #과테말라 #자전거여행 #세계여행 #세마나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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