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짓는 만화쟁이가 차린 '엄마 손맛 밥상' 얘기

[살가운 만화 48] 박연, <엄마의 밥상>

등록 2009.07.22 10:12수정 2009.07.2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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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엄마의 밥상
- 글ㆍ그림 : 박연
- 펴낸곳 : 얘기구름 (2008.8.5.)
- 책값 : 9800원

 (1) 집밥과 바깥밥, 도시락과 손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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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앞으로 두 권 더 나올 계획이라고 하는데, 언제쯤 뒷권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 얘기구름

일본만화 《아빠는 요리사》는 어느새 낱권책으로 100권을 넘겼습니다. 밥 이야기를 다룬 다른 만화 《맛의 달인》 또한 100권을 훌쩍 넘겼습니다. 이와 같은 만화책을 보면 일본은 참 대단하구나 하고 느끼는데, 이런저런 밥 이야기 만화 가운데 널리 사랑받는 《미스터 초밥왕》이라든지, 또는 마실거리 만화 《신의 물방울》이라든지, 또는 《라면 요리왕》이나 《따끈따끈 베이커리》 같은 만화책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남자가 주인공이며 요리사이거나 장인입니다. 포장마차나 선술집 아지매나 할매를 빼놓고, 여자가 '밥하는 일'을 맡는 때는 퍽 드뭅니다.

그러고 보면, 만화책에서뿐 아니라 우리 둘레에서도 웬만한 '고급요리집 요리사'는 으레 남자입니다. 회집에서 물고기 비늘과 살점을 가르는 사람 또한 거의 남자입니다. 집안에서 집밥을 하는 사람은 으레 여자인 가운데, 집밖에서 바깥밥을 하는 사람은 으레 남자라고 할까요.

.. "정말 너무해!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끌고 오질 않나? 살찐다고 과자랑 음료수도 못 먹게 하고! 반찬은 맨날 풀만 준다니까! 지난번에는 준비도 없이 끌려왔다가 과자가 먹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엄마 몰래 준비한 비상식량인데 이것마저 못 먹게 하시려는 거야. 너두 먹어." "아, 아니, 괜찮아." "살찔까 봐 그러지? 나도 잘 알아." "아, 아냐, 그게." "깡마른 애들이 더 무섭다니까. 나 혼자 다 먹고 살찔 테니 걱정 마." "난 먹으면 안 돼. 과자에 알레르기가 있거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과자 알레르기라니, 그런 게 어딨냐?" "진짜야." "됐네!" "알았어. 그럼 딱 한 개만 먹을게." ..  (23∼24쪽)

몇 해 앞서 《빈민의 식탁》이라는 일본만화를 보며 참으로 재미있다고 느꼈습니다. 만화감도 재미있고 이야기 짜임새도 재미있으며 마무리도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5권으로 끝나서 아쉬웠는데, 이 만화책 또한, 집에서 '가난한 식구들 밥차림'을 하는 사람은 아빠(남자)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부모님 집에서 나와 혼자 밥하고 빨래하고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삶이 그때부터 오늘까지 열 몇 해째 고이 이어집니다.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은 다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아기와 씨름하느라 고단해도, 잠들기 앞서 누런쌀과 여러 잡곡을 씻고 일어서 불려 놓아야 하고, 아침이 되면 언제나처럼 냄비나 뚝배기에다가 밥을 안쳐야 합니다. 그나마 하루에 한 번 밥을 하고, 따로 여러 가지 반찬을 마련하지 않으면서 밥을 먹으니 일손은 적다 할 텐데, 그렇다 할지라도 집안일은 밥하기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에 날마다 만만하지 않은 일손에 치이고 시달립니다.


꼭 이런 탓은 아니지만, 이렇게 스스로 밥을 차려서 먹어 온 삶이다 보니까, 집 바깥에서 돈을 치르고 사먹는 날이든 누군가 밥을 사 주는 날이든,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제 앞에 놓인 밥그릇을 깨끗이 안 비울 수 없습니다. 밥알 하나 반찬 한 점에 얼마나 많은 품과 땀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또렷이 알기 때문에, 언제나 고맙게 받아먹습니다.

아기한테 밥을 먹이다 보면 아기는 밥을 안 먹겠다며 고개를 홱 젓거나 손으로 숟가락을 쳐서 온 방바닥을 밥풀투성이로 만들곤 하는데, 옆지기와 저는 이 밥풀을 주섬주섬 주워서 우리 입에 넣습니다. 오래도록 밴 버릇이라고도 할 테지만, 스스로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밥을 남기거나 버리거나 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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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얘기구름/박연


.. "엄마, 저 누나야! 저 누나가 우리한테 과자 줬어!" "헉! 안 돼!" "저 누나 때문에 우리가 아픈 거야!" '저, 저 녀석 자기 입으로 맹세해 놓고 이제 와서 배신을 때리다니!' … "잘 한다∼ 과자 가방 메고 도망칠 때부터 사고칠 줄 알았어." "히잉,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말야." "가공 음식이나 과자, 음료수 종류가 얼마나 몸에 나쁜지 뉴스 보면서도 몰랐어?" "너도 생각이 있는 애라면 이번엔 느낀 점이 많을 테지?" "사람도 자연의 일부란다. 그러니 자연에서 나는 신선한 것들을 먹어야 건강한 거야. 엄마 아빠가 힘들여서 주말농장을 찾아오는 이유도, 도시에 길들여진 네게 자연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고 싶어서란다. 여름아, 사방을 둘러보렴. 눈길 닿는 곳마다 생명의 기운들이 가득하지 않니? 우리 앞으로 저 자연과 많이 친해지자꾸나." ..  (33∼35쪽)

엊그제 동네 이웃집에서 큼직한 북어 대가리 하나를 얻었습니다. 어른 주먹 둘보다 큼직한 대가리로, 끓는 물에 한참 우린 다음 감자와 양파를 넣고 더 끓여 감자국을 했습니다. 소금과 된장으로 간을 맞춘 감자국은 국 가운데 가장 손이 덜 가고 쉽게 끓이는 국이라 할 만한데, 어릴 때에 집에서 감자국을 퍽 자주 먹었다고 떠올립니다. 제가 입이 짧아 자주 해 주셨는지, 살림이 팍팍해 다른 국거리를 장만하기 어려워 자주 해 주셨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참 푹 삶아 감자가 흐물흐물해지며 풀어지던 감자국 맛은 다른 어느 고기국이나 고기 반찬보다 제 혀에 오래오래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입맛이 없을 때 무슨무슨 맛난 밥을 찾아서 먹는다고 합니다. 저는 입맛이 없은 적도 없지만, 입안이 텁텁하거나 힘들다고 느끼면 으레 감자국을 끓입니다. 감자만 넣든 감자와 양파를 넣든.

이 감자국은 저도 먹고 옆지기도 먹고 아기도 먹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아기는 이 감자국을 틈틈이 먹겠지요. 나중에 아기가 자라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된다면, 그때 우리 아이한테 감자국은 어떤 맛으로 남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냥 잊혀질는지, 아이도 무언가 이야기 하나 남은 국거리로 남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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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얘기구름/박연


.. "세상에, 분꽃 좀 봐!" "예쁘죠? 여긴 제가 가꾸는 작은 꽃밭이에요. 그런데 분꽃은 항상 저녁에 피어요? 환한 낮에 피면 훨씬 예쁠 텐데." "그러게. 어릴 때 고향집에서 보고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아주 잊고 살았던 꽃이야. 네 할머니가 분꽃을 좋아하셔서 마당 한켠에는 꼭 분꽃을 심으셨단다." "헤헤, 할머니도 나처럼 꽃을 좋아하셨네요." "저녁 무렵 꽃잎이 열리면 은은한 분꽃 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어, 향기가 나는 줄은 몰랐어요." ..  (143쪽)

폭식증이 있는 옆지기는 속이 허전할 때면 감자 두 알쯤 강판에 갈아 감자지짐이를 합니다. 감자지짐이를 할 때면 가끔 "또 감자지짐이인데 질리지 않아요?" 하고 물어 옵니다. "난 감자지짐이만 날마다 먹어도 좋아."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1∼93년 세 해에 걸쳐, 제 도시락은 꼭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1991년에는 김밥. 1992년과 1993년은 볶음밥. 어머니는 아버지와 형과 저, 이렇게 세 사람 도시락을 날마다 싸야 했는데, 형과 저는 밤 열 시까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에 얽매여 지내는 중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도시락을 둘씩 싸야 했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도시락 다섯 통을 싸야 한 셈인데, 이렇게 도시락을 싸자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밥하고 반찬을 해도 빠듯합니다. 더구나 형이든 저이든 아버지이든 열한 시는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때에도 또 밥이나 다른 먹을거리를 차려 주셨으니, 날마다 고된 나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고되게 보내던 어느 날이었을 텐데, 어머니는 "도시락 반찬 하기 너무 힘들다." 하고 한 마디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반찬하는 고단함을 덜려면 어떡해야 할까' 하는 걱정과 근심이 이어졌습니다. "그럼 날마다 똑같은 밥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날마다 반찬을 새로 안 해도 되는 도시락이면서, 날마다 가장 빠르고 손쉽게 싸는 도시락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니, 김밥 싸기입니다. 그래서 한 해 동안 김밥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외려 김밥 싸기가 더 번거로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밥속 여러 날 치를 미리 만들어 놓고 둘둘 싸면 되니까 일손을 어느 만큼 줄일 수 있기는 했을 테지만, 더 손이 가야 하는 도시락이었겠지요. 김치와 밥만 싸면 되는 도시락이라면 아무 어려움이 없을 텐데, 제가 입이 짧아 김치를 제대로 못 먹었기 때문에, 어머니로서는 걱정이 크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반찬을 생각하기보다 김밥을 쌀 때가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 해를 김밥 도시락으로만 들고 다니다가, 이듬해와 다음해에는 볶음밥으로 바꿉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 해 반 대학교를 다니다가 군대에 갔고, 군대에서 '김치 못 먹던 버릇'을 고쳤습니다. 군대 김치는 집에서 먹듯 매운김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때 어렴풋이 느꼈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고추가루가 범벅이 된 김치는 거의 삭여내지 못했습니다. 고추가루 기운을 물에 헹구어 내면 어느 만큼 삭여냈고, 흰김치는 때때로 먹곤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하셨겠지만, 모든 사람이 '빨간김치'를 잘 먹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고추장에는 설탕을 타니, 단맛 때문에라도 먹는다지만, 맵기만 한 고추나 고추가루가 몸에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 양구 읍내 밥집에서 먹던 나물 반찬 때문에, 제 몸에 맞는 먹을거리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한테는 절인 김치가 아닌 '날것대로 먹는 푸성귀'나 '살짝 데친 나물'이 가장 몸에 잘 받는 먹을거리였습니다. 저는 찬국수(냉면)는 입에 대지도 못하고 콩국수 또한 조금만 먹는데, 차고 시큼한 국물은 제 몸에 안 받습니다. 뜨겁고 부드러운 국물만 제 몸에 받습니다. 김치찌개는 못 먹고 된장찌개나 청국장이나 우거지국은 잘 받습니다. 어릴 때부터 먹을거리를 놓고 하도 탈이 잦았기에, 탈이 나면서 조금씩 제 몸을 알아갔는데, 누군가 찬국수를 사 준다면서 억지로 시켜 제 앞에 차려 놓아 주면, 애써 시켜 주었기 때문에 안 먹을 수도 없어 몇 젓가락이라도 뜨는데, 이렇게 몇 젓가락이라도 뜨면 으레 한 주 내내 배앓이를 하며 밥을 못 먹습니다.

옆지기는 저하고 거꾸로입니다. 옆지기는 매운김치도 잘 먹고 찬국수는 아주 좋아합니다. 국물 있는 국과 쌀밥이 잘 안 받습니다. 이런 엄마 아빠한테서 새 목숨을 받은 아이는 나중에 어떤 몸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엄마 밥상대로 차려 주어야 할는지, 아빠 밥상대로 차려 주어야 할는지, 아이는 아이대로 다른 밥상을 차려야 할는지 차근차근 지켜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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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얘기구름/박연


.. "뭔 청승이여, 밥숟갈 뜨다 말고?" "아주머니 청국장에서 고향 냄새가 나서요. 이렇게 진하고 깊은 맛이 나는 청국장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청국장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어려운 거라고." "아유, 모르시는 말씀 마세요. 도시 사람들은 이런 냄새 자체를 싫어하거든요. 청국장이 몸에 좋다고 하면서도 그 냄새는 싫어해요. 청국장 한 번 띄우려면 냄새 때문에 눈치가 보이거든요." "하긴, 배때기가 불러서 그런가. 내 새끼들도 냄새 난다고 안 가져가더만." "요즘은 냄새 안 나는 청국장도 나온다지만, 아, 냄새가 없으면 제맛도 안 나요. 한번은 몰래 청국장 띄우는데 딸애가 교복에서 이상한 쉰내가 난다고, 냄새가 지워질 때까지 학교에 안 가겠다면서 얼마나 울어대던지." ..  (166∼167쪽)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어릴 때부터 제 어머니한테서 받아 온 밥상과, 혼인한 다음에 남편한테서 받은 밥상을 받으면서 저 스스로 제 몸에 맞는 밥이 무엇인지를 차츰차츰 깨달아 옵니다. 저는 저대로 제 어릴 때부터 어머니한테서 받은 밥상하고, 혼인한 다음 옆지기한테서 받은 밥상에 따라 제 몸에 어떤 먹을거리가 알맞는가를 하나하나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옆지기 밥차림이 더 맛있다거나, 제 밥차림이 더 맛있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사랑과 믿음을 담아 기쁨과 즐거움으로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밥차림이 되고자 합니다.

'엄마 손맛 = 고향맛'인 듯 여겨 버릇하는 사회 흐름이며, 이러한 사회 흐름이 문화라고 하는 우리 삶터입니다. 겉으로는 일자리에 높낮이나 계급이 없다 하지만, 어느 일자리이든 벌이가 다르고 대접이 다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버젓이 있고, 이주노동자 또한 숱하게 있습니다. 제아무리 남녀평등 여남평등 들먹이더라도, 집밥이든 집살림이든 여자한테 주어진 몫이라 여기는 한편, 아예 '여자(아줌마) 가정부'를 돈을 주고 쓰는 일도 흔합니다. 이리 되든 저리 되든, 한 사람으로서 밥을 하고 살림을 꾸리는 흐름과 문화는 거의 뿌리내리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조차 되지 않습니다.

자유가 무엇이고 평등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버스와 택시와 크레인을 여기사가 다루어야 평등이 되는지, 남간호사가 있어야 평등이 되는지, 일이름 앞에 '남-'이나 '여-'를 붙이지 않아야 평등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제가 생각하는 자유와 평등이라 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제 앞가림을 저 스스로 하는 자유와 평등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제 앞가림을 저 스스로 하는 첫길은 바로 밥차림입니다. 다음은 옷차림입니다. 다름은 집차림이고, 집살림입니다. 제 밥을 제 손으로 차릴 줄 모르고, 제 옷을 제 손으로 손질하고 빨 줄 모르며, 제 집 치우기와 꾸미기를 제 손으로 할 줄 모른다면, 어떠한 제도와 이론과 학문으로 평등이나 자유를 외친들 모두 덧없는 지식조각으로 그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한테는 '엄마 손맛'도 '아빠 손맛'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 식구 손맛'이나 '사람을 살리는 밥 한 그릇 손맛'만 보여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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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얘기구름/박연


 (2) 《엄마의 밥상》이라는 만화책

만화쟁이 박연 님은 1980년부터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1982년부터 시골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에 다시 서울로 와서 만화를 다부지게 그려 보자고 마음먹었다지만, 서울은 느긋하게 지내기 어려우며 천천히 둘러보며 걸어다닐 길이 너무 없다고 느끼며, 1987년에 다시 시골 농사꾼 삶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나라에 '농사를 지으며 만화를 그린다'든지, '만화를 그리며 농사를 짓는다'든지 하는 분이 몇쯤 될까 궁금한데, 박연 님은 퍽 예전부터, 그러니까 만화를 처음 그렸을 무렵부터 '농사꾼이며 만화쟁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화쟁이이면서 농사꾼'인 셈이었습니다.

.. "근데 넌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었어?" "사진 찍고 있었어. 꽃 사진 찍는 게 취미야." "꽃? 무슨 꽃?" "저기 봐. 하얀 민들레야. 신기하지?" "에이, 민들레가 뭐가 신기해. 흔한 거잖아." "모르시는 말씀. 하얀 민들레는 우리 나라 토종 꽃이야. 우리가 흔히 보는 노란 민들레는 서양 꽃이고 ……." ..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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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얘기구름/박연


박연 님이 처음 그린 작품이라든지 나중 그린 작품이라든지, 박연 님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헤아릴 만한 작품은 따로 없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05년에 내놓은 《들꽃 이야기 1》(허브)에 당신 삶을 소롯이 담아냈습니다. 그런 다음 세 해가 지난 2008년에 내놓은 《엄마의 밥상》에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아가는 즐거움을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하고도 함께 나누려는' 몸짓을 부드러이 선보입니다.

안타깝게도 《들꽃 이야기 1》만 나오고 2번이나 3번은 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1번마저도 출판사에서 더 찍어내지 않습니다. 지난 2008년에 펴낸 《엄마의 밥상》은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주말농장 일구는 삶'를 줄거리로 담아내는데, 이 만화는 한 권으로 끝내는 작품이 아니라 《엄마의 밥상》이 1권이 되어 앞으로 2권이며 3권이며 나와야 할 작품이건만, 이참에도 뒤엣권이 나올 수 있는지 없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농사짓는 만화쟁이 박연 님이 아무리 살갑고 따뜻하고 재미나게 《들꽃 이야기 1》하고 《엄마의 밥상》을 그려냈다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들은 이 살가움과 따뜻함과 재미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받아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엄마이든 아빠이든 어버이 된 사람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차려 준 밥상에 담긴 맛과 멋을 아이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더구나 아이한테 차려 주는 밥상에 제대로 사랑을 못 담고 있는 오늘날에는, 아무래도 《들꽃 이야기 1》하고 《엄마의 밥상》은 퍽 어려운(?) 작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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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얘기구름/박연


.. "우와 그럼 쟤(오리)들이 농사꾼이라는 얘기네." "맞아, 쟤들이 사람 대신 여름 내내 벌레랑 잡초들을 잡아 주니까." "야, 정말 신기하다." "서울 촌놈에겐 신기하겠지!" "뭐, 서울 촌놈?" ..  (66∼67쪽)

뭐랄까. 모두들 '서울 촌놈'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꽃내음 하나 맡을 줄 모르게 되었잖습니까. 장미 냄새는 맡을 줄 안다지만, 꽃다지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서울내기 코가 있겠습니까. 튤립 냄새는 맡을 줄 알아도, 냉이꽃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서울내기 코가 있을까요. 백합 냄새나 수선화 냄새를 맡는다 하여도, 오이꽃과 도라지꽃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서울내기 코는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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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박연

그나마 호박꽃은 보기는 보았을지 몰라도, 무꽃이나 감자꽃이나 고구마꽃이나 파꽃이나 배추꽃을 본 서울내기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른이든 아이이든. 지식인이든 노동자이든. 부엌데기로 지내는 아줌마이든 회사원으로 지내는 아저씨이든.

.. "난 울 엄마가 해 주는 거 맛없어." "?" "밖에서 사먹는 게 제일 맛있어." "그거야 미남이 엄마는 바빠서 신경을 많이 못 쓰니까 그렇지." "맞아, 맞아." "헹! 일요일에도 귀찮다고 시켜먹는걸." "살림하랴, 직장 다니랴, 너무 힘드니까 좀 쉬고 싶은 거지. 그래도 네겐 항상 좋은 것만 주고 싶어하신다구. 그러니까 이모가 부탁받고 대신 해 주지 않니."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나, 나도 우리 엄마의 손맛을 느껴 보고 싶다구요." ..  (174∼175쪽)

아침마다 언제나처럼 지난 밤에 나온 기저귀 빨래를 하며 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빨래를 않고 있습니다. 아기하고 옆지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때, 아빠 된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리며 밀린 글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깨어나면 글쓰기고 책읽기고 할 수 없습니다. 얼른 글쓰기를 얼마쯤 마치고 아침밥을 안쳐야 하고, 그런 다음 기저귀며 여러 옷가지를 빨아야 하며, 마루바닥까지 훔쳐 놓아야 합니다.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숱한 일감인데, 이 일감을 기계한테 맡긴다면, 그러니까 빨래기계한테 맡기고, 밥기계한테 맡기고, 청소기계한테 맡기고, 냉장기계를 두면 일손이 줄어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집안일을 맡는 일손은 그냥 일손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집안일 맡는 일손은 살림하는 일손입니다. 살림이란 '삶'입니다. 살림꾼이란 '삶꾼'입니다. 내 목숨을 간수하는 일이 삶이고 살림입니다. 나한테 한 번 주어진 삶을 더 알차고 사랑스레 붙잡는 일이 바로 살림입니다. 집살림이란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해야 할 지겨운 일거리나 짐덩이가 아니라, 날마다 똑같이 맞아들이는 고마운 '목숨잇기'입니다.

날마다 똑같이 숨을 쉬고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면서, 날마다 똑같이 일을 하고 놀이를 즐기고 아이를 어릅니다. 어느 하나 이어지지 않은 고리가 없고, 어느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습니다. 집안일을 하다가 왼손을 좀 크게 다쳐 두 달 남짓 손을 제대로 못 쓰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손빨래를 그치거나 남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밥하기를 다른 어느 누가 우리 집에 와 주어서 해 줄 수 없으며, 바깥밥을 사먹을 형편 또한 아닙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참고 견디면서 하루하루 내 온 땀을 들여 사랑이 밴 옷가지를 아이한테 내주고 믿음이 스민 밥그릇을 아이한테 내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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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대사 칸이 없는데, 이 그림은, 박연 님 인터넷방에 띄워진 원화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 박연

우리 살림을 꾸리는 곳은 비록 도시이지만, 우리 살림을 이루는 무엇이든 시골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저와 옆지기 손품을 들여 서로서로 나누고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낮에는 갓난쟁이한테 기저귀를 안 채우는데, 마루바닥과 부엌 곳곳에 오줌을 싼 다음, 이 녀석이 엎드려서 오줌을 손바닥으로 휘젓습니다. 물장난을 치는가 싶기도 하고, 가만히 보면 지 엄마와 아빠가 걸레질을 하며 오줌을 닦아내는 모습하고 닮았습니다. 오늘은 한번 아기 손에 행주를 쥐어 줘 볼까 합니다.


.. 아기 피부같이 부드러운 흙속에선 봄이면 수많은 생명이 깨어나 기지개를 켠답니다. 꼬물거리는 작은 벌레, 딱딱한 씨앗을 뚫고 힘차게 자라나는 새싹, 그리고 겨울잠에서 깨어나 땅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짐승들까지. 봄의 밭에는 넘치는 생명이 가득하지요 ..  (40쪽)


만화책 《엄마의 밥상》은, 《행복한 밥상》과 《소박한 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아직 뒷소식은 없습니다. 농사짓겠다고 도시를 등지는 사람이 제법 늘고, 주말농장 하는 분 또한 꾸준히 늘지만, 《엄마의 밥상》을 품에 안으면서 '나 스스로 내 발을 흙에 디디고 내 손에 호미와 낫을 들고 풀을 다스리려 하는 까닭은, 바로 이 흙이 우리 모두를 낳았으며 내가 오늘을 살게 하는 사랑터'이기 때문임을 깨닫는 사람까지는 좀처럼 늘지 못해서인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농사짓는 만화쟁이 박연 님 다음 작품을 몇 해 사이에 구경하기는 힘들 듯합니다. 그러나, 《엄마의 밥상》 하나는 튼튼하게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둘째 아이(책)도 태어나고 셋째 아이(책)도 태어난다면 더 반가울 테지만, 아이 하나로도 얼마든지 기쁘고 반갑고 고맙습니다. 곰곰이 삭이고 찬찬히 되삭이고 꾸준히 거듭 삭이면서 이 하나를 사랑해 주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기다려야지요. 둘째와 셋째를. 그리고 넷째와 다섯째를. 나아가 여섯째와 일곱째를.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엄마의 밥상

박연 글.그림,
얘기구름, 2008


#만화책 #만화 #농사 #엄마의 밥상 #주말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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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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