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89) 처음 다섯 해

[우리 말에 마음쓰기 772] '베를 짜는 사람'과 '직조인'

등록 2009.10.10 11:48수정 2009.10.1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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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처음 다섯 해

 

.. 법 시행 처음 다섯 해 동안 생산자들은 포장재를 7퍼센트 줄였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에 미국의 용기 소비는 13퍼센트가 증가했다 ..  《헤더 로저스/이수영 옮김-사라진 내일》(삼인,2009) 279쪽

 

 "법 시행(施行)"은 "법이 나오고"나 "법에 따라 바뀐"으로 다듬어 봅니다. "5년 간(五年 間)"이라 하지 않고 "다섯 해 동안"이라 적은 대목이 반갑고, '감소(減少)시켰다'라 하지 않으며 '줄였다'라 적은 대목이 고맙습니다. 다만, "이에 비(比)해"는 "이와 견주어"나 "이와 달리"로 손질하고, "같은 기간(期間)에"는 "같은 때에"나 "같은 무렵에"로 손질하며, "미국의 용기(容器) 소비(消費)는"은 "미국이 쓴 그릇은"으로 손질해 줍니다. '증가(增加)했다'는 '늘었다'로 손봅니다.

 

 ┌ 초기(初期) : 정해진 기간이나 일의 처음이 되는 때나 시기

 │  - 초기 단계 / 초기 작품 / 정신 질환의 초기 증세 /

 │    암 같은 병도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가 가능하다

 │

 ├ 처음 다섯 해 동안 (o)

 └ 초기 5년 간 (x)

 

 짧은 한 줄이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알맞게 잘 적은 대목이 있고, 조금 더 마음을 쓰지 못했구나 싶은 대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법이나 제도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가는 말투와 낱말이 있어, "법 시행" 같은 말투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 줄을 살피면 '증가했다'라는 낱말이 보이는데, 첫째 줄에서는 '줄이다'를 잘 적었으나 둘째 줄에서는 '늘다'를 제대로 적지 못했습니다. 첫째 줄에서는 "다섯 해 동안"이라 잘 적으면서도 둘째 줄에서는 "같은 기간"이라 하면서 '기간'을 넣고 맙니다. "같은 때"나 "같은 무렵"이라고 적어야 알맞음을 느끼지 못했다고 할까요.

 

 많이 배우고 오래 살아온 어른들 눈으로 생각한다면, '줄다'와 '감소하다'를 함께 쓰고 '늘다'와 '증가하다'를 나란히 쓰는 일이 딱히 잘못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이라는 낱말이 있어도 굳이 '초기'라는 한자말을 쓰는 어른들이요, '해'라는 낱말이 있어도 괜히 '년'이라는 한자말을 쓰는 어른들이니까요. 때와 자리에 따라서 '하나 둘 셋 넷' 말고 '일 이 삼 사'를 써야 하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쓸데없이 두 가지 말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과 "두 사람"이면 넉넉한데 "일 명(一 名)"과 "이 명(二 名)"이라고 하면서 두 가지 말을 쓰고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한다고 이야기를 하나, 우리가 쓰는 한국말은 한 가지 한국말이 아닌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때로는 너덧 가지 한국말입니다.

 

 누구나 손쉽게 알아들으며 널리 쓰는 한국말이 하나라면, 조금 알쏭달쏭하다고 느낄 살짝 어려운 한자말이 섞인 한국말이 하나 있고, 퍽 까다로우며 알기 힘든 한자말이 가득한 한국말이 하나 있습니다. 공무원이 쓰는 말과 대학교수가 논문과 강의에 쓰는 말은 여느 사람 삶하고 아주 동떨어져 있습니다. 정치꾼이나 대통령 들이 정책을 내세우면서 꺼내는 말마디 또한 우리 삶하고 아주 멉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엉터리 말마디가 튀어나오며 뿌리내릴 뿐 아니라, "그랜드 바겐"이나 "원샷 딜"이라는 말마디를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틀림없이 정부 스스로 국어기본법을 마련했고, 정부에서 100억이 넘는 돈을 들여 국어사전을 엮기도 했을 뿐 아니라 훨씬 큰돈을 들여 국립국어원 건물을 짓고 수많은 공무원이 일하고 있습니다만, 어느 '말글 공무원'도 이 말썽거리 말마디를 바로잡거나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습니다. 무디거나 얕지만 손가락질하는 소리가 새어나오기는 하나, 이런 소리가 나오더라도 한귀로 흘려 버리면서 잘못 쓰는 말투를 바로잡지 않습니다. 해마다 국어순화안을 마련해서 내놓고 있어도 정부 중앙부처나 지자체 공무원들이 이 국어순화안을 제대로 살피는 일이 없고, 공무원뿐 아니라 교사나 교수나 지식인이나 기자나 작가 되는 사람들 또한 들여다보는 일이 없습니다. 가끔가끔 들여다보기는 하여도 당신들 말글을 고친다든지 가다듬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 초기 단계 → 처음 단계

 ├ 초기 작품 → 처음 작품 / 첫무렵 작품

 ├ 정신 질환의 초기 증세 → 정신 질환 처음 증세 / 정신병 처음 모습

 ├ 암 같은 병도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가 가능하다

 │→ 암 같은 병도 처음에 찾아내면 다 고칠 수 있다

 │→ 암 같은 병도 일찍 알아내면 깨끗이 고칠 수 있다

 └ …

 

 가만히 헤아려 보면, 우리는 '처음'과 '가운데'와 '끝/마지막'이라는 낱말로 어떠한 때를 가리켜 왔습니다. 꼭 "처음 때"나 "마지막 때"라고 적지 않고 '처음-마지막'이라고만 적어도 어떠한 때임을 나타냅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하고 읊는 말은 "처음 때부터 그랬어야지." 하고 읊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까지 그렇게 했어." 하고 들려주는 말은 "마지막 때까지 그렇게 했어." 하고 들려주는 말과 매한가지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처음때'나 '마지막때' 같은 낱말을 새롭게 빚을 수 있습니다. 같은 뜻으로 '첫무렵'이나 '끝무렵' 같은 낱말을 새로 빚어도 잘 어울립니다. '첫때'나 '막때'나 '끝때' 같은 낱말을 빚어도 괜찮습니다. '가운데때'나 '가운데무렵' 같은 낱말을 빚어 볼 수도 있겠지요.

 

 꼭 '초기-중기-후기'나 '초반기-중반기-후반기' 같은 한자말만 써야 하는 법이란 없습니다. '처음-가운데-끝/마지막'이라 해도 되고, '첫때-가운데때-끝때'라 해도 되며, '첫무렵-가운데무렵-끝무렵'이라 해도 됩니다.

 

 삶을 살리고자 하면 삶이 살고, 생각을 살리고자 하면 생각이 살며, 말을 살리고자 하면 말이 삽니다. 살리려고 하는 뜻이 없다면 삶도 생각도 말도 살리지 못합니다. 살리려는 뜻이 있고 살리려는 마음을 북돋어 주어야 삶이며 생각이며 말이며 살아날 수 있습니다.

 

 

ㄴ. 베를 짜는 사람 - 직조인

 

.. 그때 윗목의 조그만 골방에서 서택순의 며느리가 베틀을 찰칵찰칵 움직이며 직포하고 있었다. 해월은 서택순에게 물었다. "누가 베를 짜고 있는가?" "제 메눌아기가 짜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월은 계속해서 물었다 ..  《김용옥-도올의 청계천 이야기》(통나무,2003) 127쪽

 

 베를 짜는 사람은 무어라 하면 좋을까요. '직조공'? '직조인'? 글쎄, 제 생각으로는 '베짜는이'쯤으로 해도 넉넉하다고 봅니다. '베짬꾼'이나 '베짬이'로 써도 괜찮을 테고요.

 

 ┌ 직포(織布) = 직조(織造)

 │   - 베틀엔 반쯤 짜다 만 직포가 걸려 있었다

 ├ 직조(織造) : 기계나 베틀 따위로 피륙을 짜는 일

 │   - 직조 공업 / 직조 공장 / 직조 기술자

 ├ 직조인 / 직조공

 │

 └ 베짜다 / 베짜기 / 베짜는이

 

 우리들은 예부터 베를 짜 왔습니다. 그렇지만 '베짜다-베짜기' 같은 낱말은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습니다. 논을 갈면 '논갈이'라 하고 고기를 잡으면 '고기잡이'라 하건만, 이처럼 우리가 늘 해 온 모습을 가리키는 낱말이 국어사전에 알뜰살뜰 실리는 일은 뜻밖에도 참 드뭅니다.

 

 나무를 베는 일은 '나무베기'요, 나무를 심는 일은 '나무심기'입니다. 곡식을 거두면 '거두기'입니다. 배나 능금 같은 열매를 따면 '열매따기'입니다. 옷을 깁는다면 '옷깁기'요, 밥을 하면 '밥하기'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늘 쓰는 말, 누구나 다 아는 말, 오래도록 우리 삶과 함께 해 온 말이 국어사전에 안 실립니다. 아니, 못 실린다 할까요.

 

 아무래도 글을 많이 익혀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관청으로 나아가면서 세상을 주무르고, 두 손 두 발로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은 낮잡히거나 짓눌린 채 지내서일까요. 세상이 바뀐 오늘날에도 몸 써서 일하는 사람은 푸대접이나 막대접을 받고 있으니, 몸을 써서 하는 일뿐 아니라 예부터 우리 삶과 문화를 가꾸어 온 온갖 일 매무새를 가리키는 낱말은 이렇게 따돌림을 받아야 할까요.

 

 ┌ 직포하고 있었다

 │

 ├ 누가 베를 짜고 있는가

 └ 메눌아기가 짜고 있습니다

 

 보기글을 보면 "베를 짜다"라는 글월이 두 차례 나오지만, 이런 모습을 가리키는 낱말로는 '직포'를 씁니다. 오늘날에도 베짜는 이가 남아 있어서, 직업사전에 이 일을 올린다고 할 때에는 틀림없이 '베짜기'가 아닌 '직조'나 '직포'로 오르겠구나 싶습니다.

 

 글을 쓰는 우리들이라면 '글쓰기'를 한다고 해야 알맞습니다. 말을 하는 우리들이라면 '말하기'를 한다고 해야 어울립니다. 일을 한다면 '일하기'이고 놀이를 한다면 '놀이하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차를 모는 일을 '차몰기'라 않고 '운전(運轉)'이라 합니다. 차를 대는 일을 '차대기'라 않고 '주차(駐車)'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하는 우리들이라 하겠는데, 이런 우리들 모습은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질까 궁금합니다. 이와 같은 껍데기 들씌우기와 겉치레하기를 일삼으며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을 깎아내리거나 업신여기는 삶을 언제까지 그치지 않을는지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0.10 11:48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살려쓰기 #토박이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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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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