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그 자체
.. 조심스런 말투 그 자체가 나쁠 것은 없다 .. <카또오 노리히로-사죄와 망언 사이에서>(창작과비평사,1998) 6쪽
"나쁠 것은 없다"는"나쁠 까닭은 없다"나 "나쁘지는 않다"로 다듬습니다. '조심(操心)스런'은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다만, 조금 더 마음을 쓸 수 있다면 '조용한 말투'나 '다소곳한 말투'나 '나즈막한 말투'쯤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쓰기 나름입니다.
┌ 자체(自體)
│ (1) (다른 명사나 '그' 뒤에 쓰여) 바로 그 본래의 바탕
│ - 살아 있는 육체 그 자체의 아름다움 /
│ 죽음이란 말 자체도 우습게 여겨졌다 /
│ 그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
│ 일에 몰두해 있는 모습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
│ 그의 발상 자체는 특이한 것이었지만 현실성이 없었다
│ (2) (주로 명사 앞에 쓰이거나 '자체의' 꼴로 쓰여) 다른 것을 제외한
│ 사물 본래의 몸체
│ - 자체 점검 / 새로운 기술의 자체 개발에 성공하다 / 자체의 무게 때문에
│
├ 말투 그 자체가 나쁠 것은 없다
│→ 말투가 나쁠 것은 없다
│→ 말투가 꼭 나쁠 것은 없다
│→ 말투가 그다지 나쁠 것은 없다
│→ 말투가 그렇게(그렇게까지) 나쁠 것은 없다
└ …
'자체'라는 말을 언제부터 썼을까 궁금합니다. 예전 어르신들은 이 말투를 쓰지 않았고 지난날 문학에서도 이 말투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거의 관용구처럼 쓰고 있는데, 우리가 어느 때부터 이러한 관용구를 받아들였는지 궁금합니다. 이런저런 관용구가 아니라면 우리 삶터를 나타내기 어렵고, 우리 삶자락을 보여주기 어려웠을까요.
┌ 살아 있는 육체 그 자체의 아름다움
│→ 살아 있는 몸 그대로 보여주는 아름다움
│→ 살아 있는 몸 그대로 느끼는 아름다움
├ 죽음이란 말 자체도
│→ 죽음이란 말부터도
│→ 죽음이란 말은 그 말대로
├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 아무 일 없이 돌아온 일은 바로 기적이다
│→ 잘 돌아왔다니 더없이 놀랍다
└ …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자체' 같은 낱말을 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국민학교 다니던 때에는 이 낱말을 쓸 일이 없었다고 느낍니다. 중학교 다니던 때에는 익히 썼습니다. 어렴풋하게 떠올리면 "네가 하는 그 말 자체가 문제야"처럼 말했을 텐데, 국민학교 다니던 저였다면 "네가 하는 그 말이 바로 잘못이야"처럼 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는 "네가 그렇게 하는 말이 바로 잘못이야"처럼 말했을 테고요.
그렇지만 저로서도 이 말투 '자체'는 오래도록 입에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우리 말 운동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 오래도록 길들어 있었습니다. 옳은 말투이니 아니니를 따로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한자말이라서 안 쓸 말투라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책에서나 이 말투를 쓰고, 교과서에도 이 말투가 나오며, 국어사전에서도 따로 어떤 잘잘못을 가리지 않습니다. 국어학자는 아무런 말이 없고, 우리 말 운동을 한다는 다른 어르신들 또한 이 말투를 스스럼없이 씁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투를 걸러내려고 합니다. 아마, <민중자서전> 같은 책을 읽었기 때문인데, 동네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지난날 어르신들 말씀이 담긴 책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지식으로 살아내지 않은 사람들 말투'에는 '자체'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낮은자리에서 몸으로 살아내던 분들은 '바로'나 '그대로' 같은 말마디를 펼쳤습니다. '-부터'나 '-대로'를 붙이며 말씨를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 스스로 어린 날에 '자체' 없이 제 온 생각과 마음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하나둘 떠올렸습니다.
┌ 일에 몰두해 있는 모습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일에 온마음 쏟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일에 모두를 바치는 모습 그대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 그의 발상 자체는 특이한 것이었지만
│→ 그가 내놓은 생각은 남달랐지만
│→ 그이 생각은 무척 새로웠지만
└ …
우리는 누구나 '자체' 없이 말하곤 했습니다. 사이에 무슨 말을 넣는다면 '꼭-그다지-그렇게' 들을 적어 넣었습니다. 그때그때 다른 뜻과 느낌을 담곤 했습니다. 어느 때에는 '바로-곧-곧바로'를 써서 알맞을 수 있겠지요.
어쩌면, 서양말을 우리 말로 옮길 때에 자주 보이는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살아 있는 육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같은 말마디는, 아무래도 "살아 있는 몸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로 적바림해야 올바르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죽음이란 말 자체도 우습게 여겨졌다"는 "죽음이란 말이 참 우습게 여겨졌다"로 적바림해야 알맞지 않았나 싶습니다. "몰두해 있는 모습 자체가"는 "푹 빠진 모습이 참으로"로 적바림해야 걸맞겠지요.
하나하나 거듭 따지고 다시 살펴봅니다. 우리 스스로 얼마나 알맞춤한 우리 말글을 쓰려고 애쓰는가를 새삼 돌아보고 다시금 곱씹습니다. 나날이 쏟아지는 책에서, 날마다 넘쳐나는 글에서, 쉴새없이 터져나오는 새소식에서, 우리는 우리 삶자락 이야기를 얼마나 바르고 곧고 알차고 싱그럽고 곱게 보여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말과 글을 얼마나 사랑스럽고 믿음직하게 펼치고 있을까요.
ㄴ. 나의 노력 자체
.. 이 일에 나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고, 그 점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나의 노력 자체가 기쁘다 .. <웬델 베리-삶은 기적이다>(녹색평론사,2006) 71쪽
"이 일에 나는 그다지 성공(成功)하지 못했고"는 "나는 이 일을 그다지 제대로 하지 못했고"나 "나는 이 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쯤으로 다듬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점(點)을"은 "그 대목을"이나 "그러한 줄을"로 손보고, "나의 노력(努力)"은 "내 땀방울"이나 "내가 한 일"이나 "내가 애쓴 일"로 손봅니다.
┌ 나의 노력 자체가 기쁘다
│
│→ 내가 애썼다는 사실이 기쁘다
│→ 내가 애썼기 때문에 기쁘다
│→ 나 스스로 애썼기 때문에 기쁘다
│→ 나 스스로 애쓴 대목이 기쁘다
└ …
'자체'라는 낱말이 쓰인 자리를 살펴보면 거의 모두 '바로'를 넣어 부드럽게 이어야 했다고 느낍니다. 이 보기글에서도 "나는 바로 내가 애썼다는 사실이 기쁘다"처럼 적바림할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한자말이라 하더라도 "나의 노력 자체가"가 아닌 "내가 노력했다는 사실이"로 적어야 알맞습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마음을 쏟아 우리 말투와 낱말을 가다듬고자 한다면, "내가 애써 온 삶이"나 "내가 애썼던 모습이"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느낌을 살려 주고 싶다면 글월 앞에 '바로'를 넣으면 되고, '무엇보다'나 '더없이'를 넣으면서 뜻을 한껏 북돋울 수 있습니다.
┌ 나는 내 땀방울이 기쁘다
├ 나는 무엇보다 내 땀방울이 기쁘다
├ 나는 바로 내 땀방울이 기쁘다
├ 나는 내가 애쓴 모습이 무엇보다 기쁘다
├ 나는 내가 애써 온 모습이 있는 그대로 기쁘다
├ 나는 내가 애써 온 삶이 더없이 기쁘다
└ …
어떤 일이나 모습이든지 있는 그대로 나타내거나 말하면 됩니다. 꾸밈없이 보여주거나 글을 쓰면 됩니다. 괜히 어렵게 비틀지 않아도 됩니다. 일부러 얄궂게 비꼬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우리 이웃과 살가이 나누려는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 먼저 나서서 우리 넋과 얼을 살찌울 말과 글을 찾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잘못된 삶을 꾸릴 까닭이 없듯, 잘못된 생각을 붙잡을 까닭이 없습니다. 잘못된 말과 글에 매일 까닭 또한 없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슬기로운 삶을 일구며 하루하루를 즐겨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슬기로운 생각을 펼치며 사랑과 믿음을 넉넉하고 따스히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슬기로운 말과 글로 우리 마음밭을 힘차게 갈고닦아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2.16 13:06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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