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두루마리의 묶인 끈을 풀고 조사에 참여했던 전 용인현감 추일환(秋佾煥)의 검시기록을 살폈다. 참고인으로 나선 제중의원(濟衆醫院) 주인과 최씨 집안의 시어머니 장씨(張氏)의 진술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검시기록의 앞장엔 목을 매달 때 나타나는 증상을 기록하고 그걸 근거로 추일환은 결론을 내렸다.
<타살의 근거를 찾기 위해 갯버들 나무껍질을 상처부위로 보이는 곳에 덮어 구타를 위조한 흔적을 찾았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검시의 기본으로 오경하의 뇌리엔 당시의 정경이 빠르게 스쳐갔다. 살인사건을 위장으로 포장한 경우, 둔기가 아닌 물건으로 살해했다면 범인은 밖으로 흔적이 드러나지 않게 위장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장술의 하나가 '갯버들 나무껍질'을 이용한 것이었다. 묵직한 물건으로 타격을 가해 살해했다면 상처 흔적은 푸르고 붉게 나타난다. 이것을 위장하기 위해 갯버들 나무껍질을 상처 부위에 덮어두면 흔적은 짓무르고 상해 색깔이 검게 변하므로 구타 흔적은 찾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전임 현감이 남긴 검시기록엔 '손으로 만져보고 부어올랐다거나 단단하지 않았으므로' 갯버들 나무껍질을 이용한 위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적어놓았다.
<···또한 목에는 두 가닥의 흔적이 있기는 하나 같은 줄(선)에 의한 것이고 상처 부위를 닦아냈어도 다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최씨 집안의 며느리가 시집 온 지 석 달 만에 목을 매달았다.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든 이틀이든, 아니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죽는 마당에 그런 게 무슨 상관있는가. 죽음엔 당연히 동기 부여가 있어야 하고 정확히 규명되어야 한다. 며느리가 외간 남자를 끌어들이는 걸 본 사람은 장씨(張氏) 뿐이다. 검시기록의 다른 구술(口述) 용지엔 진술 기록이 있었다.
"집안을 이끌어나갈 아들은 삼봉산(三峰山) 암자에 들어가 두 달째 공부하고 있습니다. 가끔 집에 와야 했지만 산세(山勢)가 험해 오르내리기 불편하므로 과시 준비를 마칠 때까지 그곳에 눌러있을 생각이었으니 홀로 남은 며느린 독수공방이었지요. 어느 날 한밤중에 측간 가려고 방을 나서는데 시커먼 그림자가 며느리 방으로 들어가지 않겠어요. 그걸 내가 몇 차례 봤었죠. 자식이 공부 하느라 집을 비워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다 이레 전엔 꾸중을 좀 했지요. 그때부터 며느린 문밖출입을 삼가고 조용히 지내기에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목 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주검에서 상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목뿐이었다고 적고 있었다. 전임 현감이 목을 유심히 살핀 건 다른 상처와 분별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쓰는 방법이 감초즙(甘草汁)이다. 이것으로 목 주위를 닦아냈으나 상흔은 목에서만 나타날 뿐 타살을 의심할 만한 증좌는 없다는 말을 남겨놓았다.
서안(書案) 위에 놓인 무명천 위의 칙칙한 물건을 내려다보며 오경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중의원 오태석(吳泰石) 의원의 진술에도 그런 말이 있었다.
"최씨 집안 며느리는 가끔 사람을 보내거나 본인이 직접 와 하수오(何首烏)를 구해갔습니다. 하수오는 암수가 따로 있다 밤이 되면 엉켜들기에 강정과 자양에 뛰어난 효능이 있는 약잽니다. 그런 연유로 야합(野合)이란 별명이 있습니다. 최씨 가문의 며느리가 그 약재를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모르나 하수오를 구해간 건 틀림없습니다."
바람을 피우는 입장에선 하수오가 자양·강정에 뛰어난 약재란 건 알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시어머니 말에 신뢰감이 있었다.
검시 기록을 열었어도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으나 오경하의 마음자리에 알지 못할 의혹이 꿈틀댄 것은 서안 위에 놓인 칙칙한 물건 때문이었다. 그는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토록 검은 물건이 왜 무덤 속에서 나왔어. 나무 같기도 하고 쇳조각 같기도 한데···.'
한동안 생각하다 얼핏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환한 빛살이 발치 아래 머물러 있었다. 화들짝 상체를 든 그의 머리 위로 낯선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오현감이 전하께 올린 급한 연락이 이 물건 때문인가?"
정약용이었다. 정조 15년인 1791년 대과에 급제해 홍문록에 오르고 곧 이어 수찬(修撰)을 제수받은 죽마고우였다. 그의 곁엔 목화송이 같은 하얀 눈송이꽃을 패랭이에 꽂은 처녀가 서 있었다. 다모(茶母) 송화(松花)였다. 눈인사를 나누자 정약용은 길 안내를 서둘렀다.
"자세한 건 다녀와 듣기로 하고 일단 현장으로 가세. 안내할 항인(行人)은 나와 있겠지."
정오가 지나 도착한 삼봉산(三峰山) 현장은 돌자갈이 유난히 많은 곳이었다. 앞쪽의 노송은 중간이 부러진 채였고 돌무덤은 중앙이 푹 팼는데 햇볕이 잘든 곳이라 하루 전에 비가 왔는데도 말라 있었다. 주검을 덮은 풀 더미를 들어내자 이미 살이 도망간 뼈 곁에 군데군데 삭지 않은 천 조각이 엿보였다. 항인으로 동행한 또출이가 잔설명을 떨구었다.
"해 뜨는 곳이라 돌자갈 밭인데도 풍수쟁이가 엄지를 세우던 곳입지요. 죽은 윤씨의 오래비가 밝은 자릴 택했어요. 자리가 음습하면 원귀가 돼 이승을 떠돈다구요. 특히 이 자린 궁혈(弓穴)이란 이름이 붙었어요."
위로 빤히 올려다뵈는 곳에 부아암(負兒岩)이란 바위가 있었다. 아이 업은 바위다. 그 옛날 선행을 많이 한 아낙이 스님의 권유로 몸을 피한 게 부아악인데 도중에 스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돌아본 게 잘못돼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시신을 묻은 구덩이를 살피던 정약용의 큰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중요한 단서를 찾았을 때 나타나는 그의 버릇이었다.
"송화야, 여길 보아라. 이곳을 드나들던 개미와 지렁이가 떼죽음 당했지 않느냐"
곱게 뼛조각을 추슬러 담으며 한마디 더 얹었다.
"여긴 염(廉)이 생길 자리가 아니다. 무엇이 있느냐?"
송화가 고개를 빼들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뼈 조각을 들어낸 곳은 덩그마니 비어 있었다. 나무 막대기를 꽂아 휘휘 돌리다가 정약용이 한 움큼의 흙을 집어들었다. 그 안에 개미가 있었다. 죽은 개미다.
무덤에 이상이 생기는 건 염(廉)이다. 물이 차는 건 수렴(水廉), 나무뿌리가 침범하는 건 목렴(木廉), 뼈가 불에 타듯 까맣게 변하는 게 화렴(火廉), 그리고 벌레가 끓는 게 충렴(蟲廉)이다.
"네 보기엔 어떤 염이 들었다 보느냐?"
"소인이 보기엔···."
정약용은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또출이에게 물었다.
"항인이 보기엔 어떻소?"
"그게···."
이번에도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 꼬리를 흔들었다.
"일단 뼈를 맞추면 무슨 말을 듣겠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더냐.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한데, 살이 도망간 뼈라도 말을 한다. 자, 이것들을 가지고 관아로 가자."
관아로 돌아와 뼛조각을 늘어놓았다. 그중 하나를 매만지더니 손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개미와 지렁이는 어디에든 있을 것이다. 최씨 가문의 며느리 윤씨가 묻힐 당시엔 어떤 벌레도 광중(壙中)엔 들어가지 못했다. 어제 노송이 부러진 탓에 무덤은 두 조각났고, 그 후 광중에 들어간 개미는 죽었다. 그렇다면 독한 약기운에 의해 죽은 것인데···, 이를 보면 넌 무얼 생각하느냐?"
서안(書案) 위에 놓인 검시기록을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 주검이 들어있을 당시엔 개미 같은 곤충이 들끓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연유로 무덤이 갈라졌고 나중에 광중 안으로 들어온 개미가 죽음을 당했다는 건 윤치영이 가져온 검은 물건에 묻은 약물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것을 증험하려 송화가 뼛조각을 검사했다.
"뼈는 무슨 색깔을 띠느냐?"
"검푸르다 볼 수 있으나 배꼽부분은 청색을 이뤘습니다."
"청색이면 어떤 게 추정되느냐?"
"독살입니다."
"그뿐이냐?"
송화가 뭉그적거리자 물줄기같은 검안(檢案)이 쏟아졌다.
"청색을 띠는 건 질식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황제내경>이란 의서엔 예로부터 의원이 환자의 상태를 살필 때 안형찰색(眼形察色)이라 하여 색에 민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색깔 가운데 청색은 질식사가 일어났을 때 나타난다고 했다. 최씨 집안 며느리가 청색 계통으로 안색이 푸르렀어도 쉬 넘어간 것은 스스로의 죄를 깨닫고 목을 매달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죄가 있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건 눈앞에 펼쳐놓은 뼛조각이 말하고 있었다. 청색 계통은 질식사뿐만 아니라 중독사에도 나타났다. 윤씨의 주검처럼 살(肉)이 도망가고 뼈만 남았다 해도 '옅은 검푸른 색'이 남아 있으면 중독사다.
'그렇다면?'
중독된 형상이 보이고 목을 매달았다면 당연히 타살이다. 독물을 사용할 경우, 목을 매단 후 독을 사용했다면 주검 자체가 황백색을 띠므로 금방 알 수 있다. 질식사 후 목을 매달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질식사라···.'
정약용은 주변을 서성이며 한손으로 아래턱을 감싸쥐었다. 살해한 후 그것을 위장하려면 가장 신경 쓰이는 게 살빛이었다. 죽은 자를 끈이나 줄로 손발을 결박하면, 기혈이 통하지 않아 상흔은 검붉거나 붉지 않고 흰색을 띤다. 살아있을 때의 상흔과 죽은 후의 상흔은 차이가 명백하다. 가끔은 붉은색으로 위조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쇠꼬챙이를 불에 달궈 흰색 상흔을 지져 붉게 만드는 방법이다. 검시기록엔 감초즙을 사용해 초기 증상을 알아내 목을 매단 건 살아있을 때라 했다. 그렇다면 얘기를 좀 더 좁힐 수 있다.
뼛조각에 나타난 건 중독사와 질식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청색이다. 목을 매단 후 독을 사용한 게 아니라면 필경은 중독된 후 매달았을 것이다. 검시기록에도 목을 매달 때 목 언저리에 두 곳의 상흔이 발견됐는데 그것은 일정한 끈이나 줄(선)이라 했다. 그것으로 보면 다른 곳에서 교살됐거나 액살됐다곤 볼 수 없었다. 문제는 '독물의 중독'이었다.
누군가가 윤씨의 방에 들어가 그녀의 배꼽에 침을 찔러 박으려면 선행적으로 따르는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했다.
첫째는 윤씨가 완전히 혼절된 상태여야 했고,
둘째는 윤씨의 배꼽 부위가 완전히 드러나야 했으며,
셋째는 윤씨가 혼절한 후 범행이 이루어져야 했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넷째는 혼자서 범행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를 놓고 볼 때 깨어있는 윤씨를 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윤씨는 독수공방 해온 처지였기에 신경이 예민한 상태다. 문은 걸어 잠갔을 것이고 누군가 침입하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런 윤씨가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변을 당한 게 아니라면 무슨 방법으로 그 방에 침입할 수 있었을까? 정약용은 앞서 걸었다.
"송화는 날 따르라."
뚜벅뚜벅 걷는 걸음이 어느새 최씨 댁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산마루에 걸린 태양이 안간힘 하듯 빛 기운을 토해냈지만 이미 주위는 어두워지고 별 하나 없는 하늘엔 찬바람이 먹장구름을 이리 저리 끌고 다녔다. 금방이라도 한 줄금 빗발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보며 정약용은 걸음을 재촉했다.
최 참판 댁으로 통하는 최씨 일문은 백여 년 저쪽만 해도 살림이 통통했다. 참판 벼슬은 그보다 훨씬 전에 얻었지만 인근 고을에 녹전(祿田)으로 받은 토지가 수천 석 지기니 최씨 집안을 공대해 최 참판 댁으로 불러오고 있었다. 누대로 이 집안 남정네들은 단명한 게 흠이어서 백여 년 전에 이름난 풍수쟁이에게 터를 잡게 했다. 그곳이 거북형의 집터였다. 문 앞에 이르러 육중한 대문을 우러르며 대문 위에 걸린 현판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귀령학수(龜齡鶴壽)라! 거북이와 학처럼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이렷다!"
이곳에 오기 전 오 현감에게 들은 정보는 이곳이 풍수법으로 거북 꼬리형(龜尾形)이라 했다. 거북은 수명이 길고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살기에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거북은 신의 사자이자 하늘의 뜻을 점치는 예조(豫兆)의 동물이다. 특히 금거북은 하늘에 사는 영물로 천지의 기운을 흡수해 만물을 낳는다.
거북이가 진흙에 빠지면(金龜沒泥) 오행에 이르는 토생금(土生金)이 돼 땅 속의 기운을 더욱 힘차게 빨아들인다. 부귀와 장수를 보장받을 수 있으니 집터로선 더없이 좋은 자리였다. 육중한 대문에 붙은 고리(環)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이리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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