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캄캄한 연옥의 세계에서 글을 올리는 건 지옥불에 육신을 태울지라도 홀로 남은 내 핏줄을 두고 가는 아비된 자의 깊은 한 때문입니다. 내 아들은 지금 열한 살이 됐으니 사또께서 나의 한을 풀어주시고 내 아들이 세상을 바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하여, 이렇듯 깊은 한을 이승에 떨어뜨리지 못하고 사또께 청원하는 바입니다···.>
고작 열 살 어림으로 뵈는 사내아이가 쉰 살 남짓의 비구니 손에 이끌려 감영을 찾아온 건 8월 무더위가 기승 부리는 스무 하룻날이었다. 때마침 물에 빠져 죽은 사내의 주검을 놓고 초검의 검시기록을 작성하던 감사 김관주는 형방을 가까이 불렀다.
"사헌부에서 관원이 파견됐다 들었는데 이레가 되도록 소식 없으니 어쩐 일인가?"
익사사건에 대해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김관주가 혀를 찬 건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서였다. 감영 뒷마당에 주검을 안치시킨 김평산의 시신에선 악취가 진동했다. 평소 행실이 좋지 않다는 소문에다, 한양 대감댁의 구린내 나는 일을 처리한 탓에 함부로 그의 죽음을 종결지을 수 없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가매장이라도 시켜야했지만 익사에 의문을 품은 가족들의 재조사 요구에 결국 사헌부까지 알리게 되는 수선을 떨 수밖에 없었다. 복검이 재개됐으나 별다른 소득없이 차일피일 시일만 지체되고 있었다.
"사또, 오전에 올린 진정서는 세상을 떠난 이두용이 자신의 한을 풀어 달라 저승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무어라, 저승? 그잔 어디 사는가?"
"동작부락입니다."
김관주는 이마를 찡그리며 혀를 찼다. 요즘엔 짜증스러운 사건의 연속이다. 후덥하게 느글대는 바람기 없는 더운 날씨도 한몫 거들었다.
"금명간 부를 것이니 기다리라 해라. 죽은 자가 보낸 서찰은 내 읽었으니 우선은 고약한 악취부터 없애야질 않느냐."
김관주가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하는데 두 사람이 관아로 들어섰다. 선비 차림의 도포에 통영갓을 쓴 사내와 이마를 질끈 푸른 천으로 동여맨 스물쯤으로 뵈는 계집이었다. 갓을 쓴 건 정약용이었고 함께 온 계집은 송화였다. 가볍게 예를 차리고 주검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초검과 복검 시장을 든 감영 형방이 곁을 따랐다.
"이곳 물가에서 건져 올렸습니다만, 자살할 이유가 없다는 가족들의 진정에 따라 재수사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이렇다할 소득이 없습니다."
검시기록을 넘기며 정약용이 물었다.
"초검과 복검 기록이 일치하는 건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얘긴데···, 어떤가? 달리 원한 살만한 일은 없는가?"
"왜 없겠습니까, 이 자에 대한 원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지요."
"목격자는?"
"그건 없습니다."
정약용이 말하는 중에도 송화는 코밑에 진마유를 바르고 주변에 창출을 뿌려 악취의 진동을 차단시켰다. 옷가지를 찢어내자 형방은 주검에서 몇 발짝 물러나며 코를 감싸 쥐었다. 시신엔 구더기가 들끓고 배가 팽창된 건 죽기 전 술을 마신 게 원인인 듯했다.
"시신을 발견할 때 어떤 모양새였는가. 검안 기록엔 누워 있다고 했는데 물의 깊인 주검이 잠길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놀라워하는 기색으로 형방이 대답했다. 정약용은 주검을 감초즙으로 씻어내는 걸 곁눈질하며 다시 검시기록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에 빠진 익사자의 몸에 외상이 없다는 건 본인 스스로 물에 뛰어들었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정이 흉악한 자니 스스로 물에 뛰어들었을 리 없었다. 사고 현장은 아홉 자 가량의 높이가 있는 둔덕으로 그 아래 크고 작은 바위가 돌기돼 있어 익사자 가족들은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면 몸에 상처가 있을 게 아닌가!"
상처 하나 없이 익사체로 발견됐다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얘기다. 초검에 이어 복검을 마쳤어도 타살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송화가 감초 즙으로 몸을 씻어내 발목 쪽은 백매(白梅) 과육을 짓이겨 덮어두었다. 대략 한 시간여가 흘러 걷어내 탈골된 부분에 멍 자국이 드러나자 정약용은 앞가슴과 등을 살피고 나서 결론을 내렸다.
"이 자는 언덕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발목이 탈골된 건 미끄러질 때의 상처다. 특별한 외상이 몸에 없었던 건, 이 지역에 비가 쏟아져 물이 불어났기 때문으로 익사자가 술에 취해 추락할 때는 수위가 바위의 윗부분에 이르러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더운 날씨로 물이 빠르게 증발하자 주검은 가라앉지 않고 바위에 걸려 물가로 떠밀려 온 것이다."
정약용은 남제인(南齊人) 저언도의 책을 근간으로 삼아 결론을 내렸다.
"물에 빠진 익사자의 경우, 남자의 시체는 엎드리고 여자는 눕는다. 사내는 양기가 얼굴에 모이므로 무거워진 탓에 엎드리고, 음기가 등에 모인 여자가 드러눕는 것은 포태(胞胎)에 품은 기운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검안 기록을 살피면, 익사자가 발견 당시 드러누웠다고 한 것은 정상적으로 물에 빠졌다기보다 추락해 익사하여 포태의 원리를 몸이 따르지 못한 것이다. 익사자는 타살이 아니라 추락사다!"
정약용은 결론을 내렸다. 사람은 태어날 때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 죽은 후에도 그에 따르게 됨을 강조했다. 즉 만물이 음양이 없으면 천리에 어긋나는 것이니 어찌 고금의 얘기에 속임수가 있겠느냐였다. 이날 저녁 술자리를 마련하고 나서 감사 김관주는 죽은 자에게서 온 서찰을 슬그머니 꺼내들었다. 정약용이 그것을 읽는 중에 서찰을 보낸 당사자의 얘기를 풀어놓았다.
"이두용은 감영 관내 백성으로 워낙 성실 근면해 모아놓은 재산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친이 다른 곳에서 딸을 하나 낳았는데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집에 데려와 같이 살던 중, 몇 해 전 시집갔으니 이제 열여덟인가 아홉이 되었겠군요."
정약용은 서찰을 내려놓고 김관주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세 해 전이라 했다. 딸을 시집보낸 후 한 달이 지났을 때, 이제껏 멀쩡하던 아들이 잦은 병고를 치르고 자신의 몸에도 이상이 생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름난 점쟁이를 찾아가 연유를 알아보게 하자 점쟁이는 이두용의 사주를 헤아리더니,
"장차 집안에 큰 일이 날 것이오. 아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날 것이오. 손이 끊기는 걸 막자면 시생이 일러준 대로 하십시오. 우선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부인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 상태를 보시되···."
점쟁이는 행여 남들이 들을 새라 상대의 귓가에 비책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하여 어린 자식은 가까운 관음사(觀音寺)에 맡겨 동자승이 되게 했고, 그로부터 며칠 후 선산에 묻은 부인의 무덤을 파헤쳤다.
이것은 무덤이 잘 쓰였는지를 살피는 휴수(休囚)란 것으로, 특별한 이상이 없자 다시 봉분을 원래대로 만들고 산역꾼들과 술 한 잔을 나누고 헤어졌었다.
사고는 이날 밤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던 이두용이 살해돼 유기된 것이다. 그의 주검은 이틀이나 지나 근처에 봉분을 만든 산역꾼들에게 발견됐다.
주검의 상태는 워낙 처절했다. 복부가 찢어져 도륙됐는데 그의 간이 사라진 것이다. 초검을 맡은 노량진 감영과 복검을 맡은 관찰사의 검시기록은 이두용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의 특기할 사항을 기록하고, 노량진 감영에선 관악산 움막에 사는 문둥이 부부를 범인으로 체포해 사건을 종결지었다. 이렇게 한 근거는,
첫째, 문둥이들은 사람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을 믿고 예로부터 어린이들을 유인해 살해하였다는 점
둘째, 문둥이가 거처하는 관악산 움막 근처에서 이두용을 살해한 무기로 보이는 낫이 발견됐으며
셋째, 인근에 그들 외엔 왕래하는 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이유로 관찰사 이유석(李裕奭)은 문둥이를 잡아 처단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관악산 관음사의 동자승이 되게 한 아들로 하여금 노량진 감영을 찾아가 자신의 한을 풀어주고 아들이 떳떳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넣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려온 것이며, 그로 인해 아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절에 보내 동자승을 삼게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두용은 이미 자신이 살해 당할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이두용의 아들은 내일 만나보기로 하고, 먼저 그 자의 주검에 대한 검시기록을 보세. 초검과 복검의 검험 기록을 찾아오게."
정약용의 제청에 해묵은 먼지에 싸여있던 이두용의 시장을 들추게 됐고, 묶인 끈을 풀자 잠자고 있던 기록들이 깨어났다.
이두용의 주검이 전하는 메시지는 '사라진 간(肝)'이었다. 멀쩡한 사람의 생간이 필요한 건 오직 문둥병자였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 흉기로 지목된 물건이 그의 움막 가까이에서 발견되었으니 모든 정황이 하나의 원을 그리며 문둥병자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만들었다.
검시기록을 작성할 때 간증(干證)이라는 게 있다. 사건을 목격했거나 주위에 있던 일종의 증인 같은 신분으로 이두용 사건의 간증자는 놀랍게도 김평산(金平山)이었다. 초검관(初檢官)은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관장이니 당연히 김 관주였고, 복검관(覆檢官)은 관찰사 이유석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그 사건에 대해 기억하는 바가 있었다.
"지방 관아를 떠돈 지 여러 해지만, 이두용 사건만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건 자체보다 그 자가 내게 보내온 서찰이 그렇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모든 재산을 배다른 누이에게 건네는가 하면 어린 아들에겐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관음사로 보내 동자승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듯 모진 마음이 어떻게 생긴 걸까요."
정약용은 검시기록에 시선을 던진 채 김관주의 얘기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당시 초검관은 김감사였습니다. 검시기록엔 남기지 않았어도 특별히 생각나시는 게 있습니까?"
"모든 건 기록에 쓰인 대롭니다만, 이두용의 주검은 이틀이 지나 발견됐습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곳을 지나던 김평산에게 발견돼 관아에 알리게 됐습니다만···."
김관주는 당시를 떠올리며 가볍게 혀를 찼다. 왠지 미더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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