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네 아줌마들이 모든 신문을 다 함께 돌리고 있었기에 서로 나누어 돌리곤 했습니다.
최종규
이리하여, 주말이면 형하고 저하고 어머니하고 1/3씩 갈라 신문을 넣습니다. 어머니와 형은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다니며 넣고, 저는 신나게 달리고 뛰며 넣습니다. 5층 아파트에서 4∼5층이 많이 들어가는 곳은 제가 도맡습니다. 4∼5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며 신문을 넣을 때에는 한 번에 계단을 몇 씩 넘느냐를 놓고 혼자서 즐깁니다.
1/3씩 나누어 돌리지만, 내 몫을 얼른 돌리고 어머니 몫을 거들자고 생각합니다. 이웃 아주머니가 함께 신문을 돌리고 있으면, 이웃 아주머니가 올라가기 힘든 높은 층은 맡아서 넣어 주곤 합니다. 이웃 아주머니가 우유 돌리기를 하고 있으면 이 우유까지 받아서 높은 층에 올라갔다가 내려옵니다.
국민학생부터 어머니 신문 부업을 거들던 흐름은 중학생이 되어 저녁 열 시까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해야 하면서 주말만 거듭니다. 국민학생 때에는 날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함께 돌렸거든요. 고등학생이 되니 토요일 어머니가 신문을 돌릴 낮 무렵에도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자율학습을 하는 몸이 됩니다. 담임 선생한테 '어머니가 신문 돌리는 부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율학습은 내가 집에 가서 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받아들여 주지 않습니다. 아마 담임 선생은 '어머니 부업 때문에 토요일 자율학습 안 하겠다'고 하는 학생 말은 '자율학습 빠지고 어디 놀러 가겠다'는 소리로만 여겼겠지요. 정 못미더우면 담임 선생이 집으로 전화 한 통 넣으면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을 텐데요.
ㄴ. 국민학교 3학년 때 알아챈 '촌지'국민학교를 다니던 무렵 학교에서는 노상 개구지게 놀았습니다. 홀수 학년에서는 개구지게 놀고, 짝수 학년에서는 아주 얌전한 아이로 지내곤 했으나, 마지막 짝수 학년인 6학년 때에도 옴팡진 개구쟁이였습니다. 마지막 한 해까지 얌전하게 지내자니 무언가 아까웠다고 할까요.
홀수 학년이던 3학년 무렵, 학교에서 동무들하고 쉴새없이 개구지게 놀았는데, 어느 날 담임 선생한테 크게 꾸지람을 들으면서 '내일 아버지 모시고 와!'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 하면 안 될까요?'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여쭈지만, 담임 선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와!' 하고 윽박지릅니다.
집으로 가면 아버지한테 또 어떻게 꾸지람을 들으며 구두주걱으로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얻어맞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입니다. 그러나, 집에서 말을 않으면 이튿날 학교에 가서 '왜 아버지 안 불러 왔느냐!' 하면서 곱배기로 얻어맞을 생각을 하니, 학교에서 한 번 덜 맞고 집에서 얻어맞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 했는데 안 모시고 온 동무들이 담임 선생한테 하루 내내 얼마나 흠씬 얻어맞고 얼마나 욕지꺼리를 들으며 얼마나 벌을 서며 고달팠는가를 훤히 보았거든요.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로 일하는 아버지는 새벽바람으로 시외버스역으로 나가 시외버스를 타고 일하러 갑니다. 저녁에도 똑같이 시외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옵니다. 우리 집이 신흥동3가에 있는 5층짜리 아파트인 까닭은 아무래도 아버지가 경기도 이곳저곳으로 일하러 다니려면 시외버스역하고 가까운 곳이어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여느 날처럼 저녁 늦게 아버지가 잔뜩 지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형하고 저는 아버지 다리를 한 짝씩 붙잡고 꾸욱꾸욱 주무릅니다. 한 시간 남짓 허벅지와 종아리와 발바닥과 발가락과 등허리까지 다 주무르고 나서 겨우 말을 꺼냅니다. "아버지, 내일 담임 선생님이 학교로 오시래요." "야, 내가 학교 선생인데 어떻게 너네 학교에 가냐. 내 학교에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