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02회)

살(煞) <2>

등록 2011.01.07 09:26수정 2011.01.0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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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한없이 부드러운 걸 사내는 느꼈었다. 두해 전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는 다소 연약한 몸이었지만 남편의 힘을 받아들일 땐 버거워진 체력을 남편의 힘에 의지하곤 했었다.
출렁출렁 뱃놀이를 할 때 그 움직임의 완만함을 남편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춰왔기에 특별한 기교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 날의 방사는 달랐다. 오랫동안 여인의 살내음을 맡지 못한 데다 음향이 충동시킨 뜨거운 피는 금방이라도 밖으로 쏟아질 듯 들끓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인은 황소같은 사내의 몸놀림에 다급한 숨결만 토해낼 뿐이었다.


시집 못간 딸년을 위해 어느 사가에선 억지로 신랑을 구해 합방을 시켰다지만 지금의 경운 달랐다. 사내는 끈질기게 여인을 놓아주지 않았다. 해시(亥時) 어림에 시작한 놀이는 인시(寅時)가 되어서도 그칠 줄 몰랐다.

사내의 힘이 서둘러 나가지 않길 바라며 여인이 바짝 웅크린 건 쓸데없는 기우였다. 사내는 지치지 않은 용력으로 닭이 두 번이나 울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가셔야··· 해요."
여인은 그 말만을 하고 단숨을 몰아쉬었다. 아직은 가을이 열리는 칠월이라 창밖은 희부옇게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한식경 이 더 지나서야 사내는 메뚜기처럼 알을 까고 내려왔다.

"아!"
모든 게 정지되었다. 상대의 몸을 태워버릴 듯 뜨겁게 달궈진 몸도 평온을 찾아갔으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방사를 치르면서도 닿을 듯 말듯 얼굴을 대하며 이 여인의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궐 안 여인인지 사대부가의 여인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내가 일어서는 기미를 보이자 여인이 부스럭대며 뭔가를 꺼냈다.


"가지고 있는 게 '호랑이 발톱' 노리개뿐입니다. 이걸 드리고 싶습니다."
"난···, 이녁이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오. '호랑이 발톱'노리개를 전한다기에 그게 궁금해 나선 걸음이오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 쌓는다는 데 다음날 다시 만날 수 있겠소?"

여인의 답변 역시 다소곳했다.
"사람의 인연은 간단한 게 아니지요. 이렇듯 정을 나눴으니 가볍다 하겠습니까. 자신의 마음으론 은애하는 상대를 잡을 수 있으나 그것은 가을 안개처럼 허망한 일이지요.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그때까지 제가 드린 노리개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어둠 속이란 걸 잊은 채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멀찍이서 웅성대는 사람들 말소리가 들려오자 서둘러 밖으로 나오자 뒷머리를 난타 당한 그의 몸은 거꾸러지고 말았다.

그 시각, 사헌부 감찰실은 서감찰의 보고에 아연 긴장해 있었다. 과시(科試)가 양반들의 놀이터가 돼 부정부패의 온상이 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중요한 건 '강무(講武)'가 열리는 내일 이후의 일이었다.

"소인이 은밀히 알아 본 바에 의하면, 관직에서 물러난 벽파의 늙은 너구리들이 성상의 다스림을 방해하려 별시위(別侍衛)를 끌어들여 계책을 꾸민다 하옵니다. 소인이 나으리 명을 좆아 인왕에 오르내리는 '옥류천' 동인들을 염탐하였는데 그곳을 오 가는 웬 곰보 아낙의 행동이 수상쩍어 기찰했는데 이게 나왔습니다."

서감찰이 내놓은 건 '호랑이발톱' 노리개였다. 이것은 악귀를 쫒고 자손들의 창달을 바라는 것으로 왕실에선 고려의 부흥운동과 관계있는 물건이기에 지니는 것조차 엄벌에 처했다.

그렇다 해도 조선 왕조가 4백년을 지나오는 동안 '엄벌에 처한다'는 법 규정은 무뎌졌고 그 사일 틈타 사대부가엔 알게 모르게 퍼져나갔다.

"나으리, 이게 삼재를 쫓는 특별한 비방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벼슬길을 재촉해 승진을 돕는 효험이 있어 양반들은 은밀히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건 그렇네. 중요한 것은, 이 노리개에 나오는 호랑이가 산신(山神)이란 점이지. 수명이 다 된 악귀나 마귀, 사귀 등을 저승으로 잡아가는 산신이네. 그뿐인가. 심판이 끝난 영혼들을 새로운 인연에 맺게도 해주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부모에게 태어나도록 도와주는 것도 호랑이 노리개가 지닌 부작의 힘이지."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 호랑이가 사는 곳이 '산(山)'이란 점이다. 산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지상이자, 인간세상으로 가는 통로였다. 그곳은 호랑이가 사는 곳이었다.

"인왕산엔 제를 올리는 제각(祭閣)이 있을 것이네. 그곳의 호랑이를 산신으로 여겨 '산왕대신(山王大神)'이라 부르니 아주 신령스럽다 하겠지. 흥미롭게도 세상 사람들은 호랑이의 뼈나 이빨, 수염이나 발톱 등도 부작으로 사용하거든. 이 점을 이용해 백성들의 마음을 요동시켜 반역을 꾀하려는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낸 듯 싶네. 대제학 대감의 사위 이진원의 일거수일투족을 서감찰이 감시하고 있으나 이번 과시에 부정을 저지른 자들이 '묏 산(山)'을 쓰고 먹물로 엷게 지운 것은 심상치 않은 일로 보이네. 그에 대한 조사는 서감찰을 도와 장용위가 나서 주게."

정약용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하가 납시어 강무(講武)를 벌일 날짜가 코앞이니 현장을 다시 돌아볼 심산이었다. 서과가 조심스럽게 한 마디 올린다.

"나으리, 곰보 아낙은 최씨 성 쓰는 화원의 부인으로 궐이며 사대부가를 드나드는 데 이력이 난 것 같습니다. 아낙이 지닌 '호랑이발톱 노리개'는 끝부분에 은이 묻혀 있는 것으로 보아 수상쩍은 게 한둘 아닙니다. 미치광이 유학자들 모임 논사파(論思派)를 기웃거린 것으로 보아 좋지 않은 일을 꾸미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항에 풀어놓아 뭘 노리는지를 살피겠습니다."

"가만, '논사파'라 했는가?"
"예에."
"그 아낙을 일단 풀어주게. 난 급히 가 볼 때가 있네."
정약용은 곧 살꽂이벌을 향해 말 채찍을 날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맷돌에 짓눌린 듯 사지 육신이 욱신 거렸다.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결박당한 채 내동뎅이 쳐 진 것은 아무래도 광 속이었다.

여기 저기 물건을 쌓아놓은 듯 꼬리표가 붙은 볏짐과 봉물짐같은 궤짝들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사기 조각으로 갉는 듯한 비끄는 소리와 함께 광문이 열리며 두 사내가 들어와 뒷마당으로 끌어냈다.

"네 놈이 죽길 자청하고 궁인의 처소에 뛰어들었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큰 지 생각해 봤느냐?"

이마를 푸른 비단으로 동여맨 사내는 오른 손에 든 쥘부채로 왼손 바닥을 내려치며 곁에 선 사내에게 고개를 틀었다. 그와 동시에 사내의 호령이 떨어졌다.

"저 자를 교의(交椅)에 묶어라!"
순식간에 손발이 묶이자 주인으로 뵈는 사내의 다그침이 다시 떨어졌다.

"네 놈은 고려의 궐 안을 출입한 성중관(成衆官)으로 온갖 지저분한 일을 도맡은 전가의 후손이렷다! 궐 안에서 말(馬)이라 칭할 정도로 더러운 일을 도맡았으니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은 없을 게다. 더군다나 어제는 마방(馬房)에서 궁인의 살 내음에 취했으니 어찌 살려두겠는가!"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사내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상대의 본색을 안다는 건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봤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살꽂이벌에 웅크린 자신은 외부와 연락을 차단시켜 왔지 않은가.

곰보 아낙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왕태사가 던진 몇 마디 말을 붙잡고 지금도 두더지처럼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성중관의 후손임을 알았다면 분명 볼 일이 있을 터!"
"지금의 상황이 두렵지 않다 그 말인가? 으흐흐흐, 그렇겠지. 살고 싶으면 서운관의 왕태사에게 뭘 받았는지 말하거라."

"없소."
"없다?"
"그렇소?"

"무너진 고려를 세우기 위해 성을 바꾼 왕씨들을 찾아다니며 구걸한 걸 뻔히 아는데 없다? 그 동안 살꽂이벌에 숨은 이유가  어제처럼 궁인들이 나타나면 계집의 치마 속에 숨어들 속셈이었느냐?"

사내의 턱짓을 받은 험상궂은 아랫것들이 주리를 틀었다.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뼈마디가 토막 난 듯 극심한 통증이 몰아쳐왔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급소들을 다스릴 때마다 고통은 몇 십 배나 무게를 더하며 밀어닥쳤으나 식은땀 흘리며 묵직한 신음소리만 토해낼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을 사내는 냉담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고려가 망하기 전, 성중관은 흔히 성중애마(成衆愛馬)라 했다. 이들은 제왕을 위해 크고 작은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고려 전기엔 내시를 비롯하여 다방(茶房) · 별감(別監) 그리고 궁내직에 속한 사의(司衣) · 사순(司循) · 사문(司門) · 사옹(司饔) 등의 문반(文班)이 모두 포함됐다. 측근에서 왕을 모시며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

고려가 망하기 전 이들 성중관은 재물을 갹출해 망해버린 나라의 재건을 위해 써 달라고 왕태사에게 기탁했었다. 그것이 어느 만큼인지 알 수 없지만 나라의 재건을 위해 모아둔 재물이고 보니 그 양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내로선 알 수 없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낯으로 모닥숨을 몰아쉬는 데 이번엔 갈건(葛巾)을 쓴 중년 사내가 나타냈다. 허리춤에 달랑거리는 침통을 꺼내 자신의 눈높이만큼 들어 올리자 푸른 비단으로 이마를 동여맨 사내가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침술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이주부(李注簿)일세. 어느 누구든 저 사람 앞에선 거짓을 말하거나 버티지를 못하지. 자네가 숨긴 재물에 대해 말 하지 않는다면 이주부의 매운 손맛을 봐야 할 걸세."

침 끝이 어디를 찔렀는지 부르르 몸이 떨리며 눈이 뒤집혔다. 곤장을 치고 주리를 트는 건 견딜 수 있으나 침 끝이 건드린 부위는 속살을 짓이기는 아릿한 통증이 몰아쳤다.

몸이 배배 꼬이고 온 몸을 개미떼가 물어뜯고 이가 뾰족한 독사의 송곳이가 살을 파고드는 고통도 뒤따랐다. 사내가 다시 물었다.

"어떤가, 지금도 잘난 고려를 위해 일할 생각이냐?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나는···, 지금까지 고려 왕조를···, 생각해 보지 않았으나···, 네··놈들 말을···들으니···, 그렇게라도 살···아야···겠다. 할 말이··· 없으니, 어서···죽여라···."
질끈 혀를 깨물었다. 몰아치는 고통으로 인해 사내는 혼절하고 말았다.

[주]
∎강무(講武) ; 무예겨루기
∎부작(符作) ; 부적을 뜻하는 말
∎교의(交椅) ; 형틀 의자
#추리,명탐정,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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