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마음이 답답했다. 이승훈은 누이와 혼인했으니 남이 아니다. 서과가 그런 말을 하기 전 이미 소식을 듣고 알고 있었다지만 금부의 관원들이 그를 오랏줄로 얽매며 조롱하는 걸 듣고 있었다.
"이보시오, 명색이 지방수령이란 자가 할 일이 없어 이단에게 속고 있는 거요. 이 양반 목숨이 몇 개 되나 봐!"
이러한 핀잔에 이승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기도를 올린 것이다.
"천주님, 천주님의 높고 깊으신 뜻이 이 몸에 임합니다. 천주님의 깊으신 사랑으로 이들의 무지를 용서하옵소서!"
평택현감 이승훈은 달갑지 않은 상황이 닥쳤어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관원들의 비아냥거림에 바위처럼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선대왕 32년인 1756년에 참판 이동욱(李東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정조 4년인 1780년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었다.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하다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난 인연으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러던 중 동지사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1783년 청나라에 가게 됐는데 그때의 북경여행 중 그곳 남천주당(南天主堂)에서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가장 처음 받는 영세였다.
교리와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한 이승훈은 1785년 명례동(明禮洞)에 있는 김범우 집에 조선교회를 건립하고 주일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본격적으로 천주교의 전도를 시작했다.
그것이 발각돼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형식적인 배교(背敎)의 척사문(斥邪文)까지 공포했으나 1787년엔 다시 복교(復敎) 하였고 자신이 주교가 돼 성사를 집행하던 중 1789년에 평택현감에 등용됐으나 어명에 의해 체포되었다.
조정의 상황이 급빠르게 변해가자 대비전(大妃殿)은 지체없이 벽파의 중신들을 움직여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이승훈이 사헌부에 몸 담은 수찬 정약용의 매부란 점을 내세워 대사헌 구헌이 바짝 고삐를 움켜쥐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단에 물든 평택현감 이승훈은 사헌부에 있는 정약용의 매부로 요망한 서학(西學)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 해괴한 짓을 자행했다 하옵니다."
"해괴한 짓이라니오?"
"그것은 여섯 가지 도박이옵니다. 바둑을 비롯해 장기, 쌍륙, 투패(鬪牌), 강패(江牌), 척사(擲柶) 등으로 이것들은 재물을 걸고 놀이 하는 것으로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깊이 빠져든다 하옵니다. 바둑이나 장기 윷놀이는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이나 투전과 골패의 피해는 적지 않다 보옵니다."
쌍륙은 이규보(李奎報)의 시에도 보이는 것처럼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남녀 사이에 유행했었다. 지금도 안동 지방의 오래된 집 아낙네들이 간간이 행하는 데, 판 위에 열 두 개의 말을 일렬로 배열하고 두 개의 주사위를 굴려 숫자에 따라 말을 전진시킨다. 본래 자기 말이 있던 지점에서 모든 말이 다 벗어나는 쪽이 이기는 게 쌍륙이다.
골패는 가로 1.5센티 내외 세로 2센티 내외의 납작하고 검은 나무 바탕에 상아나 짐승뼈를 붙여 여러 가지 수를 나타내는 크고 작은 구멍을 새긴 것으로 32쪽이다.
노는 방법은 꼬리붙이기, 포(飽), 여시, 골여시, 쩍쩍이 등이 있는데 '꼬리붙이기'의 예를 들자면, 두 사람이 패를 12쪽 씩 나누어 가진 뒤 한사람이 패를 내면 상대방이 낮은 패를 내 더 이상 상대방이 낮은 숫자를 낼 수 없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화투가 수입된 19세기 말까지 도박계를 석권한 건 투전(鬪牋)이었다. 대사헌의 다음 말이 상감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전하, 홍문록에 수찬으로 이름을 올린 정약용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도박판에 정보꾼인 세작(細作)을 두어 돈의 흐름이 어디로 가는지를 헤아리고 있었나이다. 그의 정보통은 도박에 관한 양반들의 움직임을 사헌부에 보고할 정도로 투전 기술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또한 공을 세운 신하에게 대비전에서 내린 궤보요를 수사하여 궐 안을 충동시킨 것은 분명 다른 사람에게 알려선 안 될 비밀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비밀? 무슨 비밀입니까?"
"그건 정약용이 그 사내를 정보꾼으로 이용한다는 확약서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형부(刑部)에선 그 자가 몸에 지닌 정약용의 관인이 찍힌 부도(符圖)를 접수하였는데 '미리내'라는 곳을 다녀온다고 나가 수표교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옵니다. 더구나 백조요(百鳥謠)란 새타령을 부른 '통영동이'는 눈이 보이지 않고 다리를 절지만 이 나라 방방곡곡에 뿌리 내린 천주교인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연락책을 맡은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리하와 '미리내'와 '통영동이'를 잡아들이라 하였사오니 마땅히 전하께오선 정약용을 잡아들여 그 죄를 물으심이 옳은 일이라 보여지옵니다."
중간 연락책으로 보이는 '미리내'는 나이가 열다섯 살로 해실바실 웃기를 잘하는 계집아이였다. 그녀가 사는 곳은 한강의 제2지류인 내명당수(內明堂水) 가까이로 청풍계천(淸風溪川)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이곳은 경복궁 서북쪽 백운동 계곡에서 발원해 도성 안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창덕궁 뒷산의 매봉 등의 여러 줄기를 모아 동쪽으로 흐른다.
그 물은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 옛날의 오간수문(五間水門)을 지나 성동구 사근동, 송정동, 성수동 경계에서 중량천과 합해져 한강으로 흐르는데, 허울 분지의 물을 모아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내명당수인 청풍개천은 조선 태종 때 하천을 정비하고 선대왕 36년(1760)에 인부 20만을 동원해 57일간이나 바닥을 파고 모래를 치우며 하천을 바로 열었다는 뜻에서 '개천(開川)'이라고도 불린다.
이때 수표다리 기둥에 지평의 표준이 되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의 네 자를 새기고 준천사를 두어 해마다 모래를 파내고 둑을 수축해 온 것이다.
이 계천의 본류는 경복궁 서북의 청풍계에서 흐르는 물이며 여기에 인왕산의 옥류동천(玉流洞川), 누각동천(樓閣洞川)의 지류가 합해진다. 이 개천의 이름이 1910년대에 청계천이란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옛 시인의 시 한 구절은 지금도 귀에 남아 흐른다.
북쪽 시내 맑은 물은 그늘을 늦게 펼치는데
나는 꽃잎은 흩어져 푸른 이끼가 떨어지네
인간 세계의 봄빛은 가는 곳이 어디멘가
천하의 영웅도 이곳에서 술 잔 든다네
개천의 물이 맑았지만 '미리내'가 산다는 곳은 맑은 데가 아니었다. 지독한 가난의 찌꺼기가 묻어나는 퀴퀴한 곳으로 관원들의 걸음이 등성이를 향해 약간 꺾어 오르자 잡초와 여름 꽃이 두어 포기 피어있는 오막살이가 나타났다.
찌그러지게 납작한 위치는 날이 흐리면 밤인지 낮인지 분간되지 않을 집으로 <진서(晉書)>의 '천문지'에 그런 말이 있는 집이었다.
'낮의 물시계 물이 다하면 밤이 되고, 밤의 물시계 물이 다하면 낮이 된다.'
하루를 나누는 데는 그날 밤의 자시 정각 이전이 금일에 속하고 자시 정각 이후는 다음날에 속하지만 지붕이 납작하게 땅에 붙었으니 시간 구분이 안 되는 지점이었다.
관원들이 들이닥친 그 집에, 처녀의 몸은 겨우 두 평 정도의 방안에 옷이 찢기어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주검을 형부(刑部)로 압송한 관원들은 이 일이 정약용과 연관있는 것처럼 검시기록을 작성하여 보고했다.
"전하, 정약용은 전하의 총애를 받았음을 이용해 곳곳에 흩어져있는 천주교도들을 움직여 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매부 이승훈은 평택현감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한양에 있는 정약용은 통영동이와 미리내를 이용해 곳곳에 교리를 전파했습니다. 하오니 전하, 나라를 다스리는 전하 위에 천주님이 있다는 해괴한 논리를 앞세우는 정약용을 봉고파직하여 전하의 위명을 나타내소서!"
이이 질세라 대비가 손수 나섰다.
"주상, 조정에서 금한 서학을 아무렇지 않게 좇는 정약용을 도성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주상의 총애가 지극함을 보고 함부로 날뛰는 그 자의 발걸음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허약한 대비전 살림에 도움 줬던 김역관 집안에 내린 궤보요를 조사하는 등 궐 안의 근본을 해치고 있으니 그 자의 관직을 뺐고 주상이 엄히 추궁하기 바라오."
상감은 부득이 정약용의 관직을 정지하고 한강 건너 십리 밖인 방배동에 대기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다음날 오후, 금부도사 일행이 전하의 명을 전했다.
<사암은 명을 받들라! 나라를 연 초창기에 양녕대군은 보위에 앉으라는 왕실의 바람을 뿌리치고 그곳 방배동에서 등 돌리고 자유인이 되어 떠나갔다. 그런 것처럼 한양의 소요로운 것들을 멀리하고 이제 사암은 과인과 한 몸이 돼 새나라 건설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봉함 서찰에 담겨있을 것이니 참조하기 바라며, 사암을 경기도 암행어사에 제수할 것이니 장차 수원성 축조에 걸림돌이 되는 바를 조사하기 바라노라.> 덧붙이는 글 | <원고를 끝내면서>
정약용의 얘기에 관심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16개월을 써 내려 오자 영화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그에 대해 새로운 조명이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 그가 남긴 여러 서책을 보면서 조선시대 뒷골목 풍속과 내 나름의 연구에 박차를 가한 것은 아직도 일개 유생(儒生)이란 정약용에 대한 선입관을 버려야 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에 뛰어난 그의 노력으로 기중기가 만들어져 후일 수원성을 축조할 때 긴밀히 이용되었다. 천주교에 뛰어든 주위상황에 동화된 그의 모습을 볼 때, 나는 이 작품을 <소설> 형식으로 쓸 것인지, 아니면 <다큐멘터리> 취재 형식으로 쓸 것인지를 놓고 한동안 망설였었다.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에서 글을 맺고 보니 다소 아쉬운 감이 있지만 처음에 계획했던 300회 분량이 못됐어도 지금은 시원한 개방감을 느끼며 오마이뉴스 편집진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못 다한 얘긴 남녀 혼성의 몸으로 태어나 사대부들을 농락하는 <괴물3>와 궐 안의 중신들 업무공간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다룬 <궐내각사의 하루>,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숨은 양반들의 기괴한 행태를 풀어가는 <사인풍속화의 비밀>은 원고가 정리하는 대로 단행본에서 만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지금까지 성원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강영수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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