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를 참살한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흥상과 양정이 돌아 왔다.
"김종서의 목을 가져 왔습니다."
이홍상이 보자기에 싼 김종서의 머리를 내려놓았다. 수양이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그대와 난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소."
수양대군의 입술이 파리하게 떨렸다.
"어떻게 할깝쇼?"
양정이 두 손을 모았다.
"해가 밝거든 저자에 효수하도록 하라."
창덕궁 뒷산 매봉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배가 고프면 어미를 잡아먹는 불효조이며 동네를 향하여 울면 그 동네에서 초상이 난다는 흉조(凶鳥)다. 경복궁 뒷산에서 울던 부엉이가 어린 임금을 따라온 게 아니라 응봉의 터줏대감이다. 잠시 후 소쩍새 소리가 들렸다. 부엉이 영역에서 소쩍새가 서식하는 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냉수를 대령할까요?"
한명회가 수양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냉수씩이나? 난 물이 고픈게 아니라 아직도 *가 고프다."
아직도 갈 길이 먼 길목에 피가 고프다
하마터면 마지막 단어 '피'를 입 밖에 내보낼 뻔했다. 사대부는 '피'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것을 금기로 생각했다.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격이 없다는 것이다. 피를 보면서도 피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것을 천박하다고 여기는 선비. 이율배반적이지만 당연한 품위로 생각했다.
수양이 입 밖에 흘리지 않은 말을 한명회는 포착했다. 예민한 후각을 가진 예리한 감각이다. 눈을 껌벅이고 있던 한명회가 재빨리 머리에 입력된 살생부를 뒤적였다.
"군기감에 있던 병장기를 안평대군 집으로 옮긴 윤처공과 조번을 어떻게 할까요?"
뻔한 영이 내려올 것이 틀림없지만 다시 한 번 재확인 하는 것이다. 수양이 권람을 불렀다.
"사람을 보내어 윤처공과 이명민·조번·원구를 모두 처단하라."
일단의 무사들이 떠났다. 수양이 삼군진무(三軍鎭撫) 최사기를 불렀다.
"너는 김연(金衍)의 집을 찾아가 그자의 목을 베라."
말을 타고 최사기가 떠난 것을 바라보던 수양이 삼군진무 서조를 호출했다
"너는 비석소에 가서 민신의 목을 가져오너라."
서조가 군사들을 이끌고 벼락같이 뛰어나갔다. 비석소? 이 난국에 왠 비석소인가?
행인지 불행인지 문종은 세자시절부터 여난(女難)이 심했다. 열네 살에 김오문의 딸과 혼인했으나 금슬이 좋지 않았다. 세자는 겉돌고 세자빈은 마음이 타들어갔다. 조바심이 난 세자빈은 세자가 좋아하는 궁녀의 신발을 잘라다가 재를 내어 세자가 마시는 술에 타 마시게 했다. 압승술(壓勝術)이다. 또한, 암뱀과 숫뱀이 교미할 때 흘린 분비물을 닦은 수건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남자의 마음이 돌아온다는 비방을 행했다. 효과는 별무였고 비방만 탄로나 시아버지 세종에게 부덕한 여자로 낙인찍혀 궁에서 쫓겨났다.
두 번째로 순빈 봉씨를 부인으로 맞이했으나 문종은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승휘 권씨다. 문종은 권씨를 탐했다. 열 받은 봉씨가 여종 소쌍을 침전에 불러들여 맞불을 놓았다. 소쌍과 열락의 밤을 보낸 세자빈은 이부자리를 손수 치우고 세탁도 직접 했다.
희대의 동성애 사건, 세자빈이 탐닉한 여자
세자빈과 시종의 동성애 사건은 궁녀들의 입을 통하여 파다하게 퍼졌고 결국에는 궁성을 넘었다. 희대의 치정 사건은 저자거리의 화제로 급부상했다. 이른바 '조가비사건'이다. 방아거리에 목말랐던 백성들은 열심히 찧어댔다. 청계천 빨래터의 아낙네들 입에도 오르내리는 사건을 임금이라고 모를 리 없다. 격노한 세종이 소쌍을 불러들였다.
"네가 세자빈과 잠자리를 같이하였느냐?"
"세자빈께서 침전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저는 극구 사양했으나 빈께서 하도 윽박질러 마지못해 내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옷을 반쯤 벗고 이불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벗기고 남자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저를 희롱하였습니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장차 국모가 될 세자빈이 궁내에서 음탕한 짓을 하였으니 어찌할꼬? 불과 17년 전 일이다. 궁중 시녀와 종비(從婢)들이 이러한 비행을 저질러도 곤장 70대에서 100대로 처벌을 상향 조정한 세종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두 번이나 세자빈을 내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허나, 답은 하나였다.
세종은 순빈 봉씨를 폐출하고 승휘 권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했다. 어부지리다. 단종을 낳은 권씨는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목효지가 천거한 시흥 군자에 예를 갖춰 안장하라 명했다. 등극 후, 권씨를 현덕왕후라 추존한 문종은 소릉이라는 능호를 내려주었다.
사랑하던 여자를 먼저 보내고 홀로 살던 문종이 지난해 5월 경복궁 강녕전에서 승하했다. 향년 38세였다. 아버지 세종의 장수로 서른여섯 늦은 나이에 등극한 문종은 재위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단종은 국장도감을 설치했다. 영의정 황보인을 국정도감 총호사로 삼고 김종서와 윤사로, 정분을 제조에 두었으며 민신을 산릉도감 제조로 삼았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국정도감이 협의 끝에 검암산 아래 태조 이성계가 잠들어 있는 건원릉 남동쪽에 수릉지를 마련했다. 현릉이다.
4개월에 걸친 국장기간 동안 능침은 조영하였으나 석호, 석양을 비롯한 동물 석상과 문인석과 무인석은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때 민신은 노원리 채석장에 임시로 설치한 비석소에서 석수쟁이(石匠)를 지휘하여 비석 가공을 감독하고 있었다. 일단의 무리가 비석소에 들이닥쳤다.
"민신은 목을 늘여라."
서조가 고함을 질렀다.
"어느 놈이 이 야심한 밤에 소란이냐?"
행장을 갖춘 민신이 맞받아쳤다.
"명이다. 어서 목을 내놓아라."
"목이라고?"
"그렇다."
"어디서 나온 명이냐?"
"우린 그런 거 모른다. 목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일이지 말이 많구나."
"목을 치라는 말만 있고 목숨을 거두어 오라라는 글은 없느냐?"
민신은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있던 대신이다.
"말이 많다. 우린 그런 거 없다. 목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일이지..."
서조가 칼을 치켜들었다.
"그대를 불신한 것이 아니니 너무 노여워 마오. 지금 전하 곁에는 누가 있고 김 정승은 어떻게 되었소?"
"전하 곁에는 수양대군 나으리가 계시고 김종서 대감은 죽었소."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없소."
민신이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서조의 칼이 별빛에 번쩍였다. 순간, 다듬다 만 문인석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칼을 짚고 우두커니 서있던 무인석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동트기 전이 제일 어둡다던가. 역사를 바꾼 기나긴 밤이 지나갔다. 파루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전옥서 앞 공터.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황보인·이양·조극관·민신·윤처공·조번·이명민·원구의 목이 걸렸다. 효수(梟首)다.
새아침이 밝았다. 어제의 태양은 인왕산 너머로 사라지고 오늘의 태양이 아차산에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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