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권력자는 똑같구나

노래의 고향 (4) 구지가

등록 2012.06.21 16:43수정 2012.08.1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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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건국 시조 김수롱왕의 무덤. 경상남도 김해시 중심부에 있다. 왕릉 뒤로, 신라 시대 산성을 보유하고 있는 분산이(사진의 오른쪽 배경)이 보인다. 구지봉은 대략 왕릉 뒤편에, 분산이 흘러내린 끝 부분에 있다. ⓒ 정만진


인간 사회는 본래 '평등 사회'였다. 아득한 옛날에는 왕이 없었다. 함께 먹이를 구했고, 골고루 나눠먹었고, 어려움이 닥치면 힘을 합쳐서 대응했다. 원시 사회의 이런 공동체 정신은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도 조금 남아 있다. 바로 '협동조합'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야 지역에도 수로왕이 오기 이전까지는 왕이 없었다. '천지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군신(君臣) 칭호도 없었다'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는 문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루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김해 일원의 사람들이 구지봉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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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비릉 주차장에서 구지봉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구지가 시비. 제목을 '迎大王歌'로 적고 있다. ⓒ 정만진

거북아 거북아(龜何龜何)
머리를 내놓아라(首其現也)
내놓지 않으면(若不現也)
구워서 먹으리(燔作而喫也)

이 노래가 왕을 맞이하는 의식요(儀式謠)라는 사실은 구지가(龜旨歌)의 또 다른 이름 영신군가(迎神君歌)가 잘 증언해준다. 노래의 요지는 결국 '우리의 임금이 돼 달라'인 것이다. '하늘이 내게 너희들의 왕이 되라 명령하셨지만, 그래도 너희들은 나에게 왕이 돼 주십사' 청원하라는 뜻이다. 그것도 강력히!

그래서 '번작이끽야'라는 표현이 나온다. '과자를 주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거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면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와 같은 원시적 주술이다. 바닷가이기 때문에 종종 거북이 구지봉까지 올라왔을 터이고, 그러한 지리적 조건은 왕을 장생불사의 거북에 빗대 '구워 먹겠다'는 협박이 가능하게 했다. 구워 먹겠다니 어쩔 수가 없구나, 내가 왕이 되는 수밖에! 

수로왕에게 배웠을까. 우리나라의 어떤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면서 '다시는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 바란다'는 명언을 남겼다. 평생을 군복차림으로 살고 싶었는데 조국(하늘)과 국민(김해사람들)이 원하는 바람에 대통령(왕)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2000년의 아득한 세월이 흘렀어도 권력자들의 수사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국민이 원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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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산 모은암의 대웅전. 수로왕이 그의 어머니를 위해 세웠다고도 하고, 2대 거등왕이 어버이를 기려 건립했다고도 하는 절이다. ⓒ 정만진


김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은 무척산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김해의 진산(鎭山)이 됐다. 무척산은 김해에서 삼랑진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이루는 산으로, 해발 702.5m이다. 

702.5m? 얼마 안 되네! 그렇게 판단하면 잘못이다. 바닷가의 '해발'은 내륙 지방의 그것과 다르다. 산의 높이는 바다의 수면에서 잰 것인데, 바닷가의 산은 거의 수면과 일치하는 평지에서부터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높은 산이 있어 주위의 사람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수로왕이 무척산에 나타나지 않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봉우리인 구지봉에 출현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모두 김해 바닷가에 살았다. 김해에서 10km가량 떨어진 무척산 위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신화도 결국은 인간의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논리가 나타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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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봉 정상. 좁고 평평하고 둥글다. 구석에는 한석봉 선생이 찾아왔다가 남긴 글씨가 새겨진 고인돌이 있다. ⓒ 정만진



김해에서 꼭 보아야 할 것들
시내 중심가의 수로왕릉, 그 옆의 김해박물관이 단연 압권이다. 거기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수로왕비릉과 (인도에서 가져온 돌로 만들었다는) 파사탑, 그리고 구지봉이 있다. 구지봉은 구지가의 고향이자 금관가야 건국신화의 본향이니 결코 빠뜨릴 수 없다.

은하사와 동림사를 거느린 신어산 혹은 모은암이 있는 무척산 중 한 곳을 올라보자. 특히 무척산을 오르면 모은암도 볼 수 있고, 백두산의 '천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천지 주변도 거닐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산정 턱밑에 있는 이 연못은, 수로왕의 무덤을 조성하려고 할 때 자꾸 물이 솟아 공사가 불가능하자 이곳에 인공 저수지를 조성하여 문제를 해결했다는 설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김해는 금관가야의 창업과 관련되는 답사지들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러나 멸망과 관련해서는 김해 아닌 산청을 찾아야 한다. 그곳 왕산에 가면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 구해왕(또는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져 오는 '전구형왕릉'이 있다. 보통 보는 봉분 형태가 아니라 돌을 쌓아 탑처럼 조성한 무덤이기 때문에 보는 이의 호기심을 한껏 만족시켜 준다. 게다가 구형왕릉에서 조금 산을 오르면 유의태가 사용했다는 약수터가 변함없이 남아 있는데다, 지금도 물이 콸콸 솟기 때문에 한 그릇 넉넉하게 떠마시며 여독을 풀기에 제격이다.

#구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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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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