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5) #2. 한국전쟁 발발 ②

등록 2013.07.05 16:44수정 2013.07.1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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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1950년 그 해 여름 한반도는 '30년만 최악의 가뭄'이었다. 논바닥이 거북 등처럼 쩍쩍 벌어 졌다. 6월 25일은 일요일로 전날 밤부터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이 마침내 반가운 비를 뿌렸다. 그날 미처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는 굵은 빗줄기가 그새 가랑비로 변했다.


새벽 4시, 가랑비 속에 38선 일대 전 전선에는 갑자기 포성이 천둥처럼 울렸다. 하지만 그 시간 38선 50km 남쪽에 있는 서울시민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국군 수뇌부도 대부분 만취한 채 취침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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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6. 26.)의 서울도심지 풍경으로 전방과는 달리 평온한 분위기였다(서울시청과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 등이 보인다). ⓒ NARA


그 무렵 육군본부 정보부는 인민군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하여 남침 위협이 짙다는 정보를 상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국군 수뇌부는 이를 무시한 채 한국전쟁 발발 보름 전인 6월 10일에 대규모 군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이로써 부대장들은 부대장악도 제대로 못한 채 한국전쟁을 맞았다.

더욱이 전쟁 발발 전날인 6월 24일 자정부터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농촌 모내기를 도우라고 사병들에게 2주간 특별 휴가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날은 주말이라 부대 병력 거의 절반이 외출했다. 그런데다 전방부대장들은 그날 저녁 서울에 새로 생긴 육군본부 장교클럽 낙성 파티에 대거 참석하여 군 수뇌부들과 함께 밤새 술판과 춤판을 벌였다.

한편 그 무렵 인민군들은 지난 18개월 동안 무력 통일을 대비하여 철저히 준비하였다. 하지만 그 즈음 국군들은 교육 훈련에 소홀했을 뿐더러, 특히 군 간부들은 새로운 미국 지아이(GI)문화에 도취한 채 양주와 양담배, 사교댄스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국방에 전념하기보다 정치권에 줄을 서는 등, 그 속내는 무능하고 부패하기 짝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부정부패 비리의 시작은 군에서 시작했고, 그 무렵 군은 그런 부패 문화의 온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그들은 국방보다 개인 이득을 취하는데 더 골몰했다. 심지어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전방고지의 나무를 베다가 숯을 구워 팔거나 장작으로 팔아 착복했고, 사병들에게 돌아갈 양식조차 가로채 자기네 배를 채웠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군대 하면 춥거나 배고프고, 기합을  받거나 매 맞는 곳으로 인식케 했다.


군 수뇌부는 취침 중

이는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 정의감보다 우선 당신 정권에 충성 아부한 자들을 군 수뇌부에 앉힌 결과였다. 그러다 보니 일군 패잔병 가운데 기회주의자들은 민족을 배반한 전과에 대한 조그마한 반성도 없이 창군에 참여하여 군 수뇌부를 차지했다. 그 결과 일제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군이나 위만군(괴뢰 만주군)의 아주 못된 폐습, 곧 부하들을 두들겨 패거나 군량미를 중간에서 착복하여 부하들을 굶주리게 하거나 인권유린하는 작태들이 대한민국 국군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한편 국방 제1선 최고 책임자인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6월 25일 새벽 2시에 술이 잔뜩 취한 채 갈월동 총장공관에 도착하여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그날 새벽 5시 10분 춘천 7연대장이 인민군 남침을 급히 보고하고자 총장공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취침 중이십니다."

총장공관을 지키던 부관의 짜증스런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연대장은 하는 수 없이 육군본부 일직사령에게 보고하자 그가 다급한 나머지 총장공관으로 직접 달려왔다. 그제야 잠에서 깬 육군참모총장은 급보를 받고 각 참모들에게 비상소집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참모회의를 하려 해도 그들도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지라 어디에 있는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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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성 고문 덜레스(가운데, 후일 국무장관) 일행이 38선에서 북한 지역을 바라보고 있다.(1950. 6. 18. 덜레스 우측 신성모 국방부장관, 그 뒤 임병직 외무부장관). ⓒ NARA


일직사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직보하고자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이 안 되고 대신 장관비서실장이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장관 각하는 일요일에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군 수뇌부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직무를 유기한 새,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들은 파죽지세로 수도 서울을 목표로 진격하고 있었다.

6월 25일 늦은 아침, 서울중앙방송은 38선 일대의 포성 소식을 전했지만 그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 이전부터 38선 일대에서 소규모 군사충돌이 잦았을 뿐 아니라, 곧 이어 서울중앙방송은 38선 일대에서 국군이 북한 인민군을 물리쳤다는 승전보를 전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전면적인 전쟁이 일어난 것도 전혀 모른 채 창경궁 비원 연못에서 한가히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10분 무렵, 이 대통령은 비서로부터 인민군의 남침 사실을 보고받고 즉각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불러 크게 나무랐다. 신 국방장관은 이 대통령 앞에서 특유의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비볐다.

"예, 각하! 오늘 새벽 4시에 38선 전역에서 북한 괴뢰군이 대거 남침하였습니다. 그래서 각하에게 수일 이내로 평양을 향한 진격 명령을 받으려고 합니다."

허위 보고

곧 이어 소집된 비상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전방 전투 상황과는 전혀 다른 허위 보고를 했다.

"적의 공격은 전면 남침이 아니라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는 공산주의자 이주하와 김삼룡을 살려내기 위한 책략 같으며, 우리 군을 즉시 출동시켜 반격을 개시, 일거에 격파하겠습니다."

이런 블랙코미디 같은 군 수뇌부의 상황 판단과 대처는 이후 '남침 유도설'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날 정오부터는 마이크를 단 군용 지프차가 서울 도심지를 질주하면서 다급하게 방송했다.

"3군 장병들은 지금 즉시 원대 복귀하라."

그제야 일부 서울시민들은 조금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38선 일대에 전면전이 일어난 줄은 까마득히 몰랐다.

그 무렵 대한민국 대부분 국민들은 38선에서 우리 국군이 월등히 우세하게 북한 인민군을 제압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백성들에게 걸핏하면 '북진통일'을 외치며 국군 전투력을 과장하는 허세를 부리거나 허풍을 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군 수뇌부의 그 허세, 허풍의 말들은 곧 부메랑이 되어 오히려 수도 서울을 사흘 만에 인민군에게 빼앗겼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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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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