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이 '쥐'가 되어서라도 이루고 싶었던 것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46] <기도 - 4·19 순국학도위령제에 붙이는 노래>

등록 2013.08.01 08:59수정 2013.08.0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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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애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삵괭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정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 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삵괭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악어가 되고 표범이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여우가 되고 수리가 되고 빈대가 되더라도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 이번에는
우리가 혁명이 성취하는 마지막날에는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나의 죄 있는 몸의 억천만 개의 털구멍에
죄라는 죄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는 않으려니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애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1960. 5. 18)

선생님, 오늘 저는 작품이 지어진 '5·18'이라는 날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시 <기도>를 읽고 있습니다. 5월 18일은, 그 20년 후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광주 시민들을 군인들이 총칼로 학살한 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기도>를 쓰면서 혁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셨겠지요. 그리하여 미완의 혁명이 아니라 완전한 혁명을 통한 새 세상이 오기를 원하셨겠지요.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저는 "시를 쓰"거나 "꽃을 꺾"고 "죽은 옛 애인을 찾는"(1연 1~3행) 그 마음 속의 절절함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1연 6행)고 하셨을 때 선생님께서 얼마나 애태우셨을지를 생각하면 20년 후에 벌어진 그 광란의 학살극이 참으로 개탄스럽기만 합니다.

5월 18일이라면 4월 혁명의 불꽃이 아직 활활 타오르고 있던 때가 아니었는지요.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간절히 '기도'를 해야 했을까요. 우리 자신이 "우리들의 혁명"을 빼앗고 더럽히는 '배암'이나 '쐐기', '쥐', '진드기'(4연 1, 2행), 곧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4연 7행) 혁명의 완전한 마지막을 절절히 소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3연을 보니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 있는 사회 /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 더 어려운 사회"(3연 4, 5행) 때문이었겠지요. 그 '부패'와 '부정'이 얼마나 깊었기에 1960년의 대한민국 사회가 "정글보다도 더 험하고 /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 더 깊"(3연 1, 2행)다고 하셨을까요.

선생님, 독재자 이승만과 자유당이 남긴 어둠의 골은 참으로 깊고 넓었지요. 자유당은 정당의 탈을 쓰고는 있었지만 실상 독재자 이승만의 거수기였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절대자인 이승만을 등에 업고 세상의 온갖 권력을 독점했지요. 기상 천외하게 원외 자유당까지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관권을 주무르게 한 관제 정당이기도 했습니다. 일당 독재의 '모범'인 북한 공산당과 무엇이 다른지요.

낡은 것, 썩은 것, 그리하여 하루속히 타파해야 할 과거의 잔재도 많았습니다. 관존민비나 남존여비와 같은 퇴영적인 봉건 시대의 인습이 그것이었지요.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신 부패와 부정은 또 어떠했습니까. 오죽했으면 부정 선거를 은폐하기 위해 투표 용지를 불태울 생각까지 했을까요. 미군 군수 물자를 빼돌려 치부를 일삼던 그 수많은 모리배 관리들과 군인들이 혁명의 와중에도 굳건히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겠지요.

바로 이들을 처단하고 일소하여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선생님께서는 "나의 죄 있는 몸의 억천만 개의 털구멍에 / 죄라는 죄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5연)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셨겠지요. 그런 고통이나 희생쯤이야 혁명의 제단 앞에서 흘린 '학도 위령'의 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만큼 혁명은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찾은 혁명"(6연 6행)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모든 혁명은 배반당한 혁명이다"라는 명제를 들어 보셨는지요. 독일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가 한 말입니다. 그는 모든 혁명은 목표를 넘어서는 힘, 지배와 착취의 근절을 향하여 노력하는 힘을 풀어놓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혁명은, 권력의 상태나 생산력의 미숙성, 계급의식의 부재 등과는 별개로, 지배집단에 대한 투쟁이 승리할 만한 역사적인 계기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언제나 헛되이 지나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패배의 요소가 모든 혁명의 역할 속에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고 비관적으로 말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혹시 마르쿠제의 이런 '혁명 배반론' 같은 것을 생각하신 게 아닌지요.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4연 5행)라고 절규하시는 대목이 심상치 않아 보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선생님께서 이 시에 기도로 풀어놓은 혁명 완수의 간절함이 더더욱 안타깝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 저는 마르쿠제의 '혁명 배반론'은 과감하게 무시하렵니다. 설명 그의 말이 일말의 진실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 또한 저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혁명 배반론'으로 혁명에 대한 꿈을 놓아버리기에는 이 세계가 너무나도 암담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직 너무나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저는 선생님께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현재; 이탈리아 철학자)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1960~현재; 미국 문학가)가 <제국>에서 말한 '혁명 예찬론'을 들려드릴까 합니다.

착취당하고 지배받는 생산자 다중(Multitude)의 형성은 20세기 혁명사에서 더욱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1917년과 1949년의 공산주의 혁명,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위대한 반파시스트 투쟁들, 그리고 1989년의 해방 투쟁들에 이르기까지의 1960년대의 무수한 해방 투쟁들 중에서 대중의 시민권의 조건들은 태어났고, 퍼졌고, 공고화되었다. 20세기 혁명들은 패배당하기는커녕, 서로를 계속 전진하도록 했고 계급갈등의 조건들을 변형시켜왔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 즉 제국 권력에 대항하는 반란적 다중의 조건들을 제시해왔다. 혁명 운동들이 확립해왔던 리듬은 새로운 시대의 비트(박자), 즉 시대의 새로운 성숙과 변형의 비트다.

흔히 혁명의 불꽃이 꺼진 뒤에는 어김없이 반동의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미진한 끝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왕정 복고와, 4·19 혁명의 불꽃이 사그라진 자리를 총칼로 빼앗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굳이 예로 들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 반동의 시대들은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기나긴 '침묵의 봄'을 강요했습니다. 20여 년 간이나 지속된 박정희의 독재 통치와, 그 아래에서 신음 소리조차 죽여가며 조용히 살아야 했던 1960~1970년대의 대한민국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그 '침묵의 봄'은 결코 완전한 침묵이 아닙니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혁명을 중도에서 멈추게 하는 것은 부르주아 계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그들이 만족에 도달한 이권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정지란 기운의 회복이다. 무장한 채 눈을 뜨고 취하는 휴식이다. 초병을 세워 경계를 하고 있는 성취된 사실이다. 정지는 어제의 전투와 내일의 전투를 모두 수반한다.

물은 99도에서는 절대로 끓어 넘치지 않습니다. '첫 끓음'을 기준으로 본다면, 1도에서 99도까지의 물은 실상 '정지' 상태나 다름 없습니다. 모두 같아 보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물은 '첫 끓음'을 향해 끊임없이 유동합니다. 끓기 직전의 물을 자세히 관찰해 보셨는지요. 그때 물속은 '첫 끓음'의 기포를 만들어내려는 입자들의 움직임이 마치 부드러운 실루엣처럼, 하지만 결코 한 순간도 쉬지 않은 채 하늘거립니다. "정지란 기운의 회복"이자 "무장한 채 눈을 뜨고 취하는 휴식"이라는 위고의 통찰이 이 거대한 침묵의 시대를 지나는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기도>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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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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