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생역정' 테이프가 다시 돌아갔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69) #18. 아메리칸 드림(1) ④

등록 2013.10.24 16:51수정 2013.10.2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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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들의 보금자리인 한 움집 곁에 옹기종기 몰려 앉은 다섯 어린이들(장소, 촬영 날짜 미상). ⓒ NARA, 눈빛출판사


"후편이 궁금해야"

"어머, 그새 시간이…."


워싱턴호텔 스카이라운지 스테이크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던 최순희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야기를 멈췄다.

"조금만 더 들려주세요."

내가 안달이 나서 순희에게 부탁했다.

"그만 돼시오(됐어요). 한국 텔레비전 연속극처럼 후편이 궁금해야 또 만날 게 아니야요."

김준기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가까운 시일 내로 우리 다시 만나디요."

김준기의 말에 이어 잠자코 듣기만 하던 고동우도 그제야 한마디 했다.


"우리는 내일 또 아카이브에서 일해야 하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좋습네다. 기럼, 목요일 저녁에 다시 만납세다. 내레 저녁시간을 비워둘 테니 우리 농문옥으로 오시우. 저녁밥은 우리 집에서 준비해 두겠습네다."
"번번이 미안해서."
"기런 말씀 마시라우. 구미와 낙동강은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곳입네다. 내레 구미사람이라면 고향사람 못지않게 반갑디요."

우리 일행은 워싱턴 호텔을 떠났다. 고동우는 승용차 뒷자리의 준기 부부를 용문옥에 내려준 뒤 칼리지파크 내 숙소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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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초기의 휴전회담장. 왼쪽 흰색 천막이 공산 측 막사요, 오른쪽 검은 색(국방색) 천막이 유엔군 측 막사다(1952. 4.). ⓒ NARA, 눈빛출판사


미국 노획물상자

2007년 3월 8일은 행운이 따른 날이었다. 20여 년 아카이브에 드나든 재미 사학자 방순우 박사를 내셔널아카이브 1층 로비에서 만났다. 나는 그분에게 북한 측 자료 안내를 간곡히 부탁드렸다. 그러자 그분은 2층 자료실 목록에서 당신이 정리 저술한 자료 목록집을 뽑아주었다.

그래서 나와 고동우는 그 목록집을 보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 측에서 수거한 노획물 180개 자료 상자의 일부를 신청하여 검색할 수 있었다. 사실 아카이브에 아무리 많은 자료가 있어도 정확한 검색자료의 태그를 모르면 찾을 수 없다. 이는 같은 서울에 살아도 사는 곳의 번지를 몰라 수십 년 동안 만나지 못하는 경우와 똑같다.

우리는 그분이 가르쳐준 자료집 가운데 'RG 242 박스 23'을 열자 '남하(남파) 공작대원 명단'이 나왔다. 나는 이을 보자 새삼 기록의 무서움을 알았다. 이 문서는 곧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 명단이 아닌가. 또 그 상자에 들어 있는 세포수첩의 암호문에서는 공산당 비밀조직의 한 단면을 보았다.

이밖에 전선으로 간 남편에게 보낸 한 아내의 편지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눈시울을 젖게 했다. 아내는 까막눈인 듯, 마을에서 글을 아는 김두칠이라는 사람이 대필한 편지로 보였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세월은 흘러서 어느덧 당신이 떠나간 지도 벌써 8개월이나 경과하였습니다. … 나는 4월 15일 몸을 풀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섭이 누이가 탄생하였으며 장난꾸러기 기섭이도 잘 놀고 있습니다. … 당신은 몸 건강히 미 제국주의자들과 힘껏 싸워달라는 것을 부탁하면서, 저는 후방에서 승리의 그날까지 국가사업에 로력하면서 당신이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1952년 1월 23일
금강리1반 김두칠 기록함

이밖에도 당시의 처절하고 긴박했던 시대상을 짐작케 하는 문서들이 마구 쏟아졌다. 북조선로동당 당원증명서, 동해남부전구 빨치산사령관 남도부 발행의 '원호증', 경상남도 진주시 인민위원회가 붙인 식량과 피복 원조를 부탁한 벽보, 조선인민유격대 전라남도 곡성군 유격대 대장 김훈 이름으로 만든 선전삐라 등.

또 인민군이나 중국군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가족이나 전우들의 사진, 그리고 공산군 측이 노획한 미군들의 소지품 가운데서 나온 가족사진을 다시 미군이 노획한 사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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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측 노획물로 '남하공작원 명단'이다.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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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측 노획물로 북조선로동당 증명서다. ⓒ NARA, 눈빛출판사


"지나가 버리면..."

이날은 예사 날보다 훨씬 많은 73매의 사진과 그림, 그리고 문서를 스캔했다. 한 컷 한 컷마다 마치 월척을 낚은 낚시꾼의 손맛이었다. 아카이브 열람 종료시간을 알리는 음악을 듣고 소지품을 챙긴 다음 지하 라커룸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보관해둔 외투를 입고 주차장으로 가는데 손전화가 울렸다. 김준기의 전화였다.

"어드러케 돼시오?"
"네, 지금 막 일 끝내고 아카이브를 나가는 중입니다."
"알가시오(알겠습니다). 날래 오시라요."
"네, 그러지요."

고동우는 승용차의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워싱턴과 뉴욕 중심가에서 용문옥 정도의 식당을 운영하자면 매우 바쁠 텐데 여러 날 시간을 내준 것은 대단한 접대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당신들의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시간일 테지요.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나가 버리면 모두가 아름답다'는…."

이날도 우리가 용문옥에 이르자 김영옥 지배인이 특실로 안내했다. 준기 부부가 매우 반갑게 맞았다.

"오늘은 만둣국으로 준비했습네다."
"좋습니다. 원래 만두의 원조는 중국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평안도이지요."

고동우는 만두에 일가견이 있는 양, 그 유래까지도 얘기했다. 이날도 교자상에는 만둣국 외에도 불고기와 각종 전들이 조금씩 나왔다.

"기래 오늘은 어떤 사진을 찾아시우?"
"미군들이 북녘에서 수거한 자료들을 보았습니다. 미군들은 북한점령지에서 별의별 것을 다 쓸어 담아왔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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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쟁고아들(1950. 10. 29.) ⓒ NARA, 눈빛출판사


인생역정 테이프

"기래요, 원래 미국인들은 아주 호기심이 많디요. 이 친구들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쓸어담디요."
"북조선포로수용소 '김정안'이란 사람이 '포로병 국방군 20명, 미국군 7명 계 27명 상기 포로병 정히 인수함'이라는 포로인수증, 혁명군인증명서, 장증(훈장)증명서, 야전보고서, 북조선인민위원회 기획국이 만든 '북조선인민경제부흥 발전에 관한 대책', 전쟁 중에 게시한 각종 벽보, 인민군의 주머니에서 나온 사진, 인민군 군복 어깨에 다는 견장, 귀순 투항 권고 삐라 등, 별의별 것이 다 있었습니다."
"지금 좀 볼 수 있습네까?"
"그럼요. 제 노트북에 다 저장돼 있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다음 교자상 한편에 올려놓은 뒤 전원을 켜고 '슬라이드 쇼로 보기'를 클릭했다. 그러자 노트북에 그날 저장된 사진들이 한 컷 한 컷 켜졌다가 사라졌다.

"정말 무서운 세상입네다. 두 분이 수집한 자료들을 보니 내레 마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야요. 인민군 넢차개(호주머니)에서 나온 사진에 새겨진 '원족(遠足)'이라는 글자를 보니까 농문둥학교 시절 해마다 묘향산, 금강산으루 원족 간 생각이 납네다."

김준기는 그 원족 사진을 보자 당신이 한국전쟁 발발 전 학교에서 봄 가을 소풍이나 졸업여행으로 여러 학교 친구들과 묘향산으로, 금강산으로 원족 갔던 일들이 생생히 떠오른 모양이었다.

"저는 움막에 살고 있는 오남매 사진이 가장 가슴에 찡하네요. 우리 집 네 남매도 전란 중 청계천에서, 의정부 곧은 골 판잣집에서 저렇게 살았거든요. 그리고 미 메릴랜드 주 출신의 존 심스(John W. Simms) 상병이 한국전쟁에 참전코자 출발에 앞서 아내와 이별의 키스를 나누고 있는 장면도 감동적이네요. 존 상병이 한국전에서 무사히 아내한테 돌아왔는지 궁금합니다."

노트북 화면을 골똘히 본 순희의 소감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처지에서 사물을 보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이제 두 분이 24년 만에 덕수궁 대한문에서 극적으로 다시 만난 얘기를 들려주시지요."
"기러디요."

그러자 두 사람의 인생역정 테이프가 다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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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메릴랜드 주 출신의 John W. Simms 상병이 한국전쟁에 참전코자 출발에 앞서 아내와 이별의 키스를 하고 있다(1950. ). ⓒ NARA, 눈빛출판사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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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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