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는 예술입니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84) #22. 결혼 ③

등록 2013.11.16 18:01수정 2013.11.1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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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맨해튼다운타운 ⓒ 박도



뉴욕

결혼 후 준기가 먼저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갔다. 준기는 뉴욕의 지리도 익힐 겸 현지 적응을 하고자 플러싱의 한 한인식당에 허드레 일꾼으로 취업했다. 준기가 한인식당에서 일 년 남짓 일하자 그의 눈썰미와 요리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 요리사로 승진할 수 있었다.


준기는 쉬는 날이면 일부러 뉴욕 일대를 순회한 결과, 그새 뉴욕 지리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준기는 식당 운영에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준기 부부가 이전에 계획했던 한식식당을 곧장 열기로 했다. 준기 부부는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확정 지은 뒤 순희도 시카고에서 아주 뉴욕 플러싱의 한 아파트로 이사해 왔다.

1985년 봄, 마침내 준기 부부는 플러싱에다 용문옥 간판을 달았다. 다행히 준기가 근무했던 한식식당 전 주인이 고령으로 한국에 영주 귀국하면서 아주 싼값으로 준기에게 물려주었다. 준기는 그동안 미국에서 저축한 돈으로 그 식당을 인수받았다. 준기는 용문옥의 주방장 일을 맡았고, 순희는 카운터와 홀의 서빙 등, 나머지 일을 맡았다.

준기는 용문옥 주 메뉴를 냉면과 만둣국, 그리고 불고기, 비빔밥 등으로 하고, 밑반찬 하나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준기는 모든 음식의 간을 알맞게 하고, 특히 밑반찬인 김치를 맛있게 담아 손님상에 푸짐하게 내놓았다. 용문옥의 기본자세는 음식에 대한 사랑과 정성으로, 손님상에 오르는 모든 음식은 자기 가족이 먹는다는 자세로 요리하여 내놓았다.

용문옥에서는 손님상에 요리를 내놓을 때 더운 것은 뜨겁게, 찬 것은 더 차게, 그리고 조금씩 내놓으면서 밑반찬은 별도 값을 더 받지 않고, 손님의 요구대로 넉넉하게 드렸다. 그 상술은 그대로 적중했다. 용문옥은 곧 손님들의 반응이 좋아 특별히 광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입소문으로 미주 동부지역 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용문옥을 한 번 다녀 간 손님들이 또 다른 손님을 데리고 왔다. 그러자 용문옥의 고객은 재미 한인동포뿐  아니라, 미국인과 다른 외국인으로 늘 붐볐다.

하지만 세상사는 계속 좋은 일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준기가 용문옥이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눈부시게 번창하자 여러 곳에서 방해와 견제가 들어왔다. 그 첫 시련은 이웃 동업 한국식당의 방해였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나라 속담은 미국에서도 통했다.


동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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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대를 문 노인. ⓒ NARA, 눈빛출판사

준기는 어느 날 영주권이 없는 한국인이 찾아와 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소연하기에 자신의 지난 처지를 생각하여 그를 고용했다. 하지만 이웃 한국식당의 고발로 준기는 상당한 벌금을 무는 곤욕을 치렀다. 더 큰 견제는 이웃 동업자들의 집단행동이었다.

플러싱의 한식집들이 용문옥을 제쳐둔 채 자기네끼리 가격 단합을 하는 바람에 손님이 갑자기 뚝 끊어져버렸다. 그밖에도 이런저런 악재가 잇따라 겹치는 바람에 용문옥은 개업 1년 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준기 부부는 이런 악재의 원인을 곰곰 되짚어 보았다. 골똘히 자신들의 지난 일을 되새겨 보자 그 원인은 자신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불우 이웃에 대한 기부에 인색했고, 돈을 한꺼번에 왕창 벌어야겠다는 과욕이 빚어낸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준기는 자신이 명장 한식 요리사로서 실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도 알았다. 명장요리사는 결코 취미로서는 될 수 없었다.

"이런 시련은 하늘이 우리를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한 단계 더 도약하라는 계시이에요."

순희는 준기에게 좌절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기런 모낭(모양)입네다. 내레 이참에 한국에 가서 한 일 년 동안 한국요리를 제대로 배워 오가시오."
"그렇게 합시다. 나도 한국요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솔직히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서 자랐기에 고급 한식을 제대로 먹어 본 적도, 만드는 법도 몰라요."

준기 부부는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1년 동안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아 조용히 귀국했다.

맛집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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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로 그을린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 펄럭이는 미 성조기(서울, 1950. 9.29.).. ⓒ NARA, 눈빛출판사

준기 부부는 귀국 후 먼저 서점에서 전국 맛집을 소개하는 책을 샀다. 그런 뒤 그들 부부는 그 책을 들고 전국방방곡곡에 있는 그 요식업소들을 한 곳 한 곳 순례하듯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그 음식의 맛을 하나하나 깊이 음미하면서 카메라에 담고 주방장에게 조리의 비법을 물어 배웠다. 맛집 주인이나 주방장이 그 비법을 공개하기 꺼려할 때는 솔직히 재미동포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런 뒤 국내에 개업하고자 묻는 게 아니라고 말하면 대체로 친절히 잘 가르쳐 주었다.

준기 부부는 순례자로 석 달 동안 전국의 소문난 맛집은 거의 다 돌아다녔다. 맛집은 특히 호남지방 쪽이 많았다. 전주, 광주, 담양, 남원, 목포, 영광 등지에서 비빔밥, 장국밥, 산채비빔밥, 굴비백반 등 그 본고장의 맛을 보고 배웠다.

서울로 돌아오자 황재웅 병원장은 준기 부부에게 가회동에 있는 평양옥이 서울 장안에서는 가장 소문난 맛집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황 병원장은 그 집의 오랜 단골로 창업자 조혜정 여사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준기 부부는 황 병원장과 함께 가회동 평양옥을 찾아가 창업자 조혜정 여사에게 큰절을 드리고 성공비결을 물었다. 그는 평양 출신으로 뒤늦게 요리업을 시작하여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요리는 예술입니다."

조 여사의 그 한 마디가 준기 부부에게는 복음으로 들렸다. 더 이상 군말이 필요 없었다. 조 여사는 요리의 명장이었다. 준기는 그제야 명장이 되자면 끊임없는 공부와 노력, 그리고 자신의 솜씨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열정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기 부부가 곁에서 지켜보니까 조 여사는 요리를 단순한 밥벌이 수단이 아닌, 당신 인생의 평생 친구로, 연인으로,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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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시신들(함남 고토리, 1950. 12. 8.). ⓒ NARA, 눈빛출판사


요리비법

준기 부부는 조 여사의 요리에 대한 철학을 듣고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다시 큰절을 드리고는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조 선생님 저희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미국 뉴욕에다 멩품(명품) 한식당을 열려고 합니다. 제발 그 비법을 알쾌주시라요."

순희에 이어 준기도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

조 여사는 그들 부부의 간청이 여러 날 진지하게 거듭되자 그제야 그 진정성을 확인한 다음에야 이를 허락했다.

"매주 수요일 오전에 평양옥으로 오세요. 그날은 서울 시내 평양옥 각 분점 주방장 교육일입니다."

준기 부부는 그때부터 석 달 동안 가회동 평양옥으로 출근하여 조 여사에게 고급 한식 요리법을 직접 배웠다. 그분은 이론보다 체험에서 우러난 실습 위주로 교육했다. 먼저 그분의 창업 뒷이야기와 요리철학을 강의한 뒤, 비빔밥 등 요리 실습을 했다.

나는 친정(평양)에서는 별난 어머니에게, 시집(서울)에서는 까다로운 시어머니에게 아주 혹독한 요리 교육을 받은 주부로 쉰이 넘도록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만 살았다. 어느 해 여름 시어머니 친구들이 바닷가로 피서를 가는데 마침 동행케 되었다. 그때 나는 그분들의 진지를 수발했는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 좋은 솜씨를 왜 집에서 썩히고 있니?"

나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피서지에서 돌아온 뒤 평양옥을 개업하게 되었다. 그때가 쉰 아홉 살이었다. 내가 평양옥 개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바로 음식의 맛이었다. 음식점은 무엇보다 그 집 음식 맛이 좋아야 한다. 음식 맛이 좋으면 별도로 선전하지 않아도 입소문으로 손님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내가 평양옥을 개업하면서 음식 메뉴를 정하는데 가장 큰 전제는 평소 내 손으로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선정했다. 그리고 일단 음식의 종류가 많지 않게 단순화시켰다. 메뉴 선정을 두고 여러 날 고민하던 나는 문득 어린 시절 고향의 맛, 곧 평양 고유의 음식을 재현하고 싶었다.

내가 개업 당시 수많은 음식 중에서 주 메뉴로 골라낸 것은 비빔밥과 만둣국, 그리고 평양 냉면 세 가지였다. 비빔밥은 별로 마땅하게 먹을 것이 없을 때 한 끼 간단히 들 수 있는 음식으로, 밥 위에 얹을 재료들만 미리 준비해 두면 손님이 한꺼번에 몰려와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느 한식점에서 먹는 비빔밥과는 달라야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에 집에서 자주 먹었던 비빔밥의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비빔밥을 재현시켰다. 비빔밥의 밥은 질지도 되지도 않도록 고슬고슬하게 짓고, 쇠고기는 잘게 다져 볶고 전유어를 부쳐서 가늘게 채를 쓸었다. 거기에 그 철에 구할 수 있는 각종 나물들을 볶거나 무쳐 넣고 다시마튀각을 잘게 부수어 위에 뿌렸다. 그 다음 무엇보다 중요한 고추장 만들기다. 비빔밥에 넣은 나물과 전들에 조금씩 양념이 되어 있기에 고추장은 너무 맵거나 짜지 않게 마늘·파·참기름·깨소금 등 양념을 넣어 따로 만들어 두곤 입맛에 따리 양을 조절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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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의 허드슨 강 ⓒ 박도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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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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