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귀인 덕에 맨해튼 최고 한식집 되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85) #22. 결혼 ④

등록 2013.11.18 15:38수정 2013.11.1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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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옛 부산역, 부산은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로 수많은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도시다. 이 부산 역 건물은 1953년 11월 27일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 NARA, 눈빛출판사


평안도 음식

평양옥 창업자 조혜정 여사는 한식 비빔밥에 이어 준기 내외가 가장 관심이 많았던 평안도 음식과 평양냉면에 대한 강의와 실습도 했다.


평안도 동쪽은 산악지대로 험하지만 서쪽은 바다와 넓은 평야지대로 해산물도, 곡식도 풍부하다. 예로부터 평안도는 중국과 교류가 많아 대륙적인 기질로 사람들의 성품은 진취적이고, 스케일이 크다. 따라서 음식도 먹음직스럽게 크게 만들고 양도 푸짐하다. 곡물 음식 중에는 메밀로 만든 냉면과 만두 등 가루로 만든 음식이 많다. 겨울에는 매우 추운 탓으로 육류음식을 즐기며, 콩과 녹두로 두부나 부침개를 즐겨 만든다. 음식의 간은 대체로 심심하고, 맵지도 짜지도 않다. 평안도 음식으로 일반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냉면과 만두, 녹두빈대떡 등이다

해방 전에 평양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평양냉면'의 그 시원하고 구수한 맛을 잊지 못한다. 함흥냉면은 회냉면으로 유명한데 견주어 평양냉면의 핵심은 바로 시원하고 구수한 물냉면 곧 육수(국물) 맛에 있다. 진짜 원조 평양냉면의 맛은 추운 겨울밤에 사르르 얼음이 낀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는 메밀국수로 이가 시리도록 차고 시원한 맛일 것이다. 평양냉면을 제대로 만들려면 국물, 곧 육수 맛을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 그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평양냉면의 육수는 쇠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를 똑같은 비율로 섞어 찬물에 넣고 끓이면서 파, 마늘, 통후추를 함께 넣는다. 고기가 무르게 삶아지면 건져 젖은 행주에 싸서 눌러 편육으로 하고, 육수는 기름을 걷어내고 차게 식힌다. 동치미 무는 반달형 또는 길쭉하게 얇게 썬다. 오이는 반으로 갈라 어슷하고 얇게 썰어 소금에 절였다가 기름에 살짝 볶는다. 배는 껍질을 벗겨 납작하게 쓴다. 달걀은 노른자가 중심에 가도록 삶아 반으로 가른다. 눌러놓은 편육을 얇게 썬다.

차가운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합한 다음 식초, 소금, 설탕으로 간을 맞춘다. 꾸미와 육수(장국) 준비가 다 되면 물을 넉넉히 끓여 냉면 국수를 헤쳐 넣어 심이 약간 남을 정도로 잠깐 삶아 찬물에 여러 번 헹군다. 그런 다음 1인분씩 사리를 지어 채반에 건져 놓는다. 대접에 냉면사리를 담고 위에 편육 등 꾸미를 고루 얹은 다음 육수을 옆에서 살며시 부어 상에 올린다. 그때 따로 매운 맛을 내는 겨자즙, 설탕, 식초 등을 곁들여 낸다.

준기 부부는 이밖에도 만둣국 만드는 법, 녹두빈대떡 붙이는 법 등 석 달 동안 매주 수요일마다 평양옥에서 조 여사로부터 분점의 주방장들과 함께 강의와 실습을 받았다. 그래도 요리 강습이 부족한 듯하여 조 여사에게 간청한 뒤 다시 여섯 달 동안 평양옥 주방에서 실습생 요리사로 일했다. 준기 부부가 6개월의 실습기간이 끝나자 조 여사가 말했다.


"그만하면 됐수. 모든 음식은 만드는 이의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손끝에서 우러난 손맛이오. 아무쪼록 잔꾀 부리지 말고 성실하게 열심히 밥집을 운영하면 미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거요."

준기 부부는 조 여사에게 요리사로 합격 판정을 받자 뛸 듯이 기뻤다. 준기는 그제야 비로소 명장 요리사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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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 한국식당가(2004. 2. 15.) ⓒ 박도


동피골

그들 부부는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비행기 예약이 순조롭지 않아 일주일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들은 그참에 시침을 떼고 귀국한지 얼마 안 된 것처럼 친지와 친구들을 만났다. 준기는 이 세상 많은 분에게 빚을 졌지만 그 누구보다 남진수 독전대장을 빠트릴 수 없었다. 준기는 그에게 큰 감동과 빚을 지고 산다는 느낌으로 늘 마음이 무거웠다. 준기가 그 이야기를 순희에게 하자, 그 역시 그렇다고 했다. 순희는 유학산 부대에서 한밤중에 탈출할 때 독전대 남 대장에게 사과서리를 간다고 속였다.

"최 동무, 이 밤에 어딜 가오?"
"사과서리 가요."
"뭬라구(뭐라고)?"
"김준기 동무랑 사과서리 가요."
"이 동무들이 도대체 정신이 있간."
"남 동무, 잠깐 눈 한번 질끈 감아 주세요. 어디 배가 고파 잠을 이룰 수가 있어야지요. 돌아올 때 사과 몇 알 갖다드릴 테니. 며칠 전에 보급투쟁 가면서 맛이 잘 든 것 봐 둔 게 있어요."

평북 정주 출신의 남진수 중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선심을 쓰듯 말했다.

"날래 다녀 오라우. 야간에는 거 누구를 막론하구 통행금지인데, 내레 최 동무니까 특벨히(특별히) 봐 주는 거야요."
"고맙습니다."

순희도 그 남 대장에게는 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남 대장 돌아가신 곳을 참배한다고 속죄할 수는 없을 테지만 기래도 요번 기회에 찾아봅세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매우 좋은 생각입니다. 사실은 나도 이따금 그분에 대한 죄의식을 지니고 있어요."

출국 사흘 전, 그들 부부는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오대산 동피골을 찾아갔다. 그새 그 일대는 산림이 매우 우거져 천연동굴을 찾느라 꽤 헤맸다. 마침내 준기가 은신했던 천연동굴을 찾은 그들은 준비해간 과일과 부침개 그리고 남진수 대장이 좋아했던 막걸리 술잔을 동굴 앞에 두고 깊은 묵념을 드렸다. 

'너덜 사는 모습 보니까 내레 흐뭇하다야. 아무튼 열심히 살라.'

남 대장이 흐뭇이 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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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동피골 계곡 ⓒ 박도


맨해튼의 용문옥

미국에 도착하자 순희가 제의했다.

"우리 이제 아주 통 크게 시작합시다. 이참에 플러싱을 떠나 맨해튼으로 가요."
"머이, 맨해튼으로? 거기서 개업하려면 돈이 수태 들 거야요."
"왜 우리 한식이 맨해튼으로 가면 안 되나요. 미국의 역사는 5백 년도 안 되는데, 우리나라 한식의 역사는 자그마치 반만년이에요. 개업 준비자금은 제가 꾸려볼게요."
"당신은 언제나 나보다 배포두 크구, 앞두 잘 내다봅네다. 까짓것 한번 도전해 봅세다. 나두 한번 알아보디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티기디요(까무러치기지요). 맨해튼에서 크게 시닥(시작)하자면 아무래두 주방과 홀에 사람이 더 필요하디요. 우리 존 부부를 불러다 용문옥 매니저로 씁세다."
"네?"
"걔들이 아주 착하구 성실하더라구요."
"당신이 걔네까지 생각해 줘 고마워요."
"기런 말 마시라요. 다 우리 자식이 아니우."
"하긴 요즘 걔네가 무척 힘이 드나 본데 …그래도 그들 자존심이 허락할지."
"내레 걔들의 의사를 물어보디요."
"그러세요."

준기가 주말에 존 부부를 만나 정식으로 같이 일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그들도 한식 레스토랑은 매우 흥미 있는 사업이라고 깊이 생각해 보겠다고 하더니 다음 주에 만나자 쾌히 승낙을 했다.

1987년 봄, 마침내 준기 부부는 맨해튼 매디슨 가에다 한식집 용문옥 간판을 내걸었다. 개업자금은 대부분 순희가 끌어들였다. 순희는 그동안 미국에서 성실하게 산 까닭에 동포들뿐 아니라 미국인에게도 많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순희의 개업자금 모금에 꽤 여러 동포가 출자했고, 나머지 부족한 돈은 준기가 이따금 나가는 뉴욕이북도민회, 평안도민회에서 소문을 듣고 소매를 거둬줬다. 준기는 뜻밖에도 이곳 뉴욕이북도민회에서 윤성오 상등병을 만났다. 그는 1966년 동대문 옆 창신동에서 목사로 만난 뒤 꼭 21년 만이었다. 그는 1970년대 초에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민 온 뒤 뉴저지 주 한인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윤 목사는 준기의 개업에 축하와 함께 적극으로 앞장서 도와주었다. 그는 준기가 개업 자금이 부족한 줄 알고 재미 동포들에게 그 사정을 널리 광고하여 모금해 주었다. 대부분 이북 실향민들은 미국 이민생활에서도 악착같이 산 탓인지 알부자들이 많았다. 아마도 맨주먹으로 38선을 내려왔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그들은 준기의 성실성을 알고 예상 외로 큰돈을 투자했다. 언저리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장 큰 장애물이 해결되었다.

순희는 용문옥 실내장식을 모두 한국의 들꽃과 열매로 꾸몄다. 손님이 용문옥에 들어서면 한국의 여느 양반집 안방에 앉아있는 착각에 빠지도록 그렇게 실내 장식을 꾸몄고, 용문옥 안팎 빈 공간에는 한국의 꽃나무로 심었다. 또 용문옥 실내는 가야금이나 해금 소리가 은은히 울리게 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이 용문옥에 오면 마치 고향에 찾아온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외국인이 용문옥에 오면 한국의 여염집을 찾아온 듯 이국적인 분위기로 꾸몄다.

동방의 귀인들

하지만 준기 부부의 맨해튼 상륙작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개업 초기에는 뉴욕 이북도민회, 평안도도민회, 윤성오 목사 교회의 신도회 등에서 적극으로 도와줘 반짝했지만 연고 손님은 한계가 있었다. 새로운 손님, 곧 한인 외 미국인이나 다른 외국인들을 끌어들여야 했다. 거기에는 크다란 벽이 있었다. 그렇다고 짧은 밑천으로 신문이나 방송에 광고를 할 수 없었다. 막대한 투자에 견주어 수입이 별로 신통치 않아 개업 일 년이 지날 무렵에는 파산직전에까지 몰렸다. 그런데 구세주는 뜻밖에도 아들 존이었다.

존은 어린 시절부터 농구를 좋아했다. 시카고 고교시절에는 한때 농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시카고를 연고지로 하는 미국 프로농구팀 시카고 불스의 열성팬이었다. 존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다녔는데, 농구선수 마이클 조단은 대학 후배로 잘 알았다. 1984년 마이클 조단이 시카고 불스에 입단하여 좋은 성적을 내자 열성팬인 존은 그를 응원코자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원정 경기 농구장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자 개인적으로 마이클 조단과 식사도 할 만큼 아주 친한 사이였다.

어느 날 마이클 조단이 원정경기로 뉴욕에 왔을 때 존은 그를 용문옥에 초대하여 푸짐하게 접대했다. 그때 마이클 조단은 한국 음식, 특히 불고기 맛에 매료되어 '원더풀!'을 연발했다. 그날 이후 마이클 조단은 뉴욕 경기가 있을 때 이따금 혼자, 또는 한두 동료들과 조용히 용문옥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준기 내외는 정성을 다해 접대했다. 이런 사실이 한 언론에 가십으로 나가자 갑자기 손님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조그마한 가십 기사는 백만 불짜리 광고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준기는 용문옥 실내에 장애인을 위한 특별실을 만들었다. 용문옥 바깥문에서 거기로 가는 통로는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게 넓히는 등 조그마한 불편함도 없도록 세심한 배려했다. 그리고 용문옥 수입의 5%를 장애인단체에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기부하는 한편, 계산대 옆에 불우이웃돕기 성금 저금통을 마련하여 매월 말일에는 그 성금을 자선단체에 보냈다.

어느 하루 미8군 출신의 한 칼럼니스트가 장애인 아들과 용문옥에 와서 한식을 먹고 갔다. 그는 한국에서 먹었던 지난 날 매운 한식, 곧 코리언케첩(고추장)을 토마토케첩으로 알아 잘못 먹고는 혼이 나 눈물 흘린 추억을 이야기하며 장애인 특별실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며칠 뒤 이런 이야기를 한 신문에 칼럼으로 소개하자 미담을 좋아하는 미국 손님들이 계속 줄을 이었다. 그래서 용문옥은 동부 미국인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미국인도 뉴욕에 오는 경우 일부러 들러가기도 했다. 유엔에 파견된 북한 대표부의 사람들까지도 이따금 들렀다. 용문옥은 곧 뉴욕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준기 부부는 수입이 많아지는 대로 그에 비례하여 기부액을 늘렸다. 그러자 그만큼 수입도 따라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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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이 공산군 포로를 잡아 검색하고 있다(1951. 2. 4.) ⓒ NARA, 눈빛출판사


워싱턴의 용문옥

개업 이듬해에는 88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서울올림픽 열기는 뉴욕 맨해튼 용문옥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올림픽 기간 동안 용문옥은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 고객들로 늘 북적거렸다. 어떤 손님은 기다리다 못해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입소문으로, 가십으로 계속 보도되자 그때부터 맨해튼 용문옥은 미국 동부지방 최고의 한식집으로 알려졌다. 워싱턴 일대에 사는 동포들이 용문옥 분점을 권유했다.

"금오산 아홉산골짜기 해평 할머니가 '고사리도 제때에 꺾어야 한다'고 했어요.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아요. 우리 워싱턴에도 용문옥 분점을 냅시다."
"까디것, 기럽세다."

1993년에 개업한 워싱턴 용문옥 분점은 뉴욕 용문옥의 이름 탓인지 단시간에 궤도에 올랐다. 준기는 뉴욕 용문옥은 아들 존에게, 워싱턴 용문옥은 딸 영옥에게 지배인 직으로 운영 전반을 맡긴 뒤, 그들 부부는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며 두 곳을 관리했다.

준기는 미국이민 16년 만에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지만 어딘가 허전하고 심장이 저렸다. 그것은 두고 온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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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 명의 정치범들이 동굴에 불법 감금되어 질식해 죽어 있었다(함흥, 1950. 10.). ⓒ NARA, 눈빛출판사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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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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