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라르작 투쟁에 참석한 미테랑.
목수정
이 싸움은 반드시 이긴다, 아무도 진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음악가이면서 동시에 오랜 생태주의자인 어머니의 영향도 받았다. 솔렌은 대체의학, 유기농업, 반핵운동 등 모든 환경을 둘러싼 생태주의적 삶의 태도와 환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다. 요즘 솔렌이 가담하고 있는 신공항 건설 반대운동의 참여 동력은 본질적으로 어머니로부터의 뿌리에서 온 것인 셈이다.
이미 공항이 하나 있는 낭트 주변에 대규모 신공항을 건설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노트르담 데 랑드(Notre dame des Landes) 투쟁에 솔렌이 나섰을 때,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길고, 힘든 싸움이 될 거라고. 그러나 말리진 않았다. 바로, 아버지가 솔렌의 나이였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낭트의 신공항 건설 계획과 이에 맞서는 반대 세력의 투쟁은 이미 15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긴 싸움이다. 낭트 시장 출신인 장 마크 에로가 사회당 정부의 총리로 기용되면서, 소강상태에 있던 이 프로젝트는 다시 활력을 얻었고, 이와 더불어 이에 맞서는 투쟁의 힘도 가열되었다.
이 투쟁에 합류하기 위해 낭트로 향했던 솔렌은 여기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얻고 돌아왔다고 술회한다. 이탈리아·노르웨이·스위스…. 여러 나라에서 찾아온 수많은 낯선 운동가 4만여명이 함께 인간 띠를 이루며 공권력에 저항하고, 밤에는 벌판에 텐트를 함께 치며, 오로지 성장과 속도와 삽질에 몰입하는 무리들과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벌이는 일은 마치 광적인 축제에 참여하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원시의 땅에서 인간들이 그들의 땅과 그 땅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지키기 위한 순수하고도 열정적인 싸움이었다.
"난 대책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반드시 이긴다. 아무도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돌아와, 끓어오르는 분노는 사회당 담벼락에 갈겨쓴 '에로포트(Ayrault-port)' 사건으로 표출된다. 에어포트 대신 총리의 이름인 에로에 'port'를 붙여서 에로포트라고 부르며, 공항 건설에 매달리는 이 우매한 정부를 비웃어주려 했다. 그래피티가 예술로 취급되고, 카르티에 재단이라는 고급스런 공간에 이 거리의 낙서들을 위한 대형전시가 마련되는 마당에, 이 정도의 낙서를 썼다고 유치장에서 사흘간 구류를 살고, 재판을 받게 될지는 몰랐다.
세월은 무섭게 후퇴했다. 그의 아버지가 스물한 살이던 때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솔렌에게 내려진 죄목은 공직을 수행하는 주요 책임자에 대한 모독죄. 결국 벌금형을 받았고, 부모님과 노트르담 데 랑드 투쟁을 함께한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었다. 물론 이 형벌은 그의 투지에 작은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그가 싸워야 할 대상들의 생리를 확인하고, 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다.
최초고용계약 키즈"중·고등학생 시절엔 언제나 문제아였어요." 솔렌을 문제아로 만든 건, 세상에 대한 조숙했던 문제의식이었다. 군대를 가야 하는 의무에 복종할 수 없었던 아버지처럼, 솔렌은 학교가 아이들을 질서라는 이름으로 가두는 것에 저항했고, 늘 벌을 받았다. 학교에서 벌을 받는 아이들의 무리에서 익숙하게 이민자의 자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저항의 불씨를 나누어 가졌고,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졌다.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이민자들이 사는 아파트단지가 있었다. 거기에 사는 아이들에게서 랩 음악을 배웠다. 그 가사를 알기도 전부터, 그 안에는 뭔가 폭발적인 것이 들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랩 음악은 지금까지도 솔렌에게 저항의 피를 끓게 하는 원초적인 힘을 제공한다.
그러다가 중학생이던 2006년의 어느 날, 학생들 사이에 거대한 저항의 물결이 일었다. 당시 사르코지 정부가 최초고용계약(CPE:Contrat Première Embauche)을 청년 고용을 위한 부양책이랍시고 내놓았던 것이다. 26세 이하의 청년을 고용한 기업은 2년 안에 그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마음껏 해고해도 좋다고 하는, 청년들에 대한 무한대의 고용 유연성(!)을 기업들에 '팍팍' 제공하는 이 법은 고교생부터 대학생에 이르는 학생들의 활화산 같은 분노에 부딪힌다.
2주일간 프랑스 전역에서 강하게 타올랐던 이 불꽃들은 최초고용계약을 완벽히 불사르는 데 성공한다. 도미니크 드 빌팽(Dominique de Villepin) 총리는 이 법안을 거두고, 머지않아 사임하기에 이른다. 바로 그때 솔렌은 중학생 신분으로 친구들과 집회에 참여하여 훨훨 날아다녔다. 고등학생들이 뒤돌아보며, 함께 거리에 나선 꼬꼬마 중학생들의 출현을 눈으로 반겨주었다. 완벽한 승리의 짜릿한 첫 경험, 연대의 힘, 사회참여의 카타르시스가 온몸으로 스쳐갔다. 고등학교 때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임기 중에 무려 6만여명의 교원 수를 감축한 사르코지는 이번에도 솔렌을 거리로 나서게 한 장본인이었다. 솔렌이 다니던 고등학교에도 감원이 이뤄졌고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거리로 나섰다. 그때는 솔렌과 그의 친구들뿐 아니라 200여명이 함께했다. 많은 학생들이 파업을 주도하는 학생들을 오해했다. 이들이 교육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교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수업을 방해하는 것으로.
그때 솔렌은 알았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에게 지금의 저항, 학교를 파업하는 것은 수업을 받고 싶은 아이들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교육이 정말 중요한 문제이며, 교사들이 감원되는 것은 교육의 질적 향상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득했다. 결국 그의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끝내 이해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두 사건은 솔렌과 또래 학생들에게 정치의식의 씨를 뿌린 계기가 되었다. 솔렌은 "그때 나보다 훨씬 더 앞서 있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벌써 그들보다 한 발 늦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웃으며 당시를 술회한다.
대학에 가서 잠시 전국프랑스학생연합(UNEF)를 기웃거리다 찾은 곳은 반자본주의신당(NPA)이었다. 고교 시절, 새로 창설되는 반자본주의신당의 포스터를 눈여겨봐둔 기억이 있고, 그 어떤 당보다 생각에서 앞서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에서 모순을 찾아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세상 모든 기업주가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솔렌은 생각했다. '좋은 기업주, 나쁜 기업주…… 그들이 어떤 기업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착취하는 사람이 있고, 착취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홍보와 IT 분야의 전문가로 일하면서, 승승장구해왔다. 아버지는 이제 부르주아의 생활에 안착했고, 세상과 수입이 그에게 제공하는 편안한 삶에 흡수되어버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근본적으로 휴머니스트이며 좌파의 이상에 가깝지만, 더 이상 현실 정치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게 무뎌지는 부모를 보면서, 솔렌은 다짐한다. '나는 결코 세상의 안락함에 흡수되어버리지 않겠다'고. 부모의 뿌리로부터 나왔지만, 이제 솔렌은 새로운 가지를 죽죽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너에게 대체 좌파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