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7일, 재불 한국대사관 앞에서 프랑스 철도노조가 한국 철도노조의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함께 나부끼는 NPA의 붉은 깃발.
정운례
집회가 끝날 무렵, 프랑스 철도노조의 깃발 말고도 NPA의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깃발 아래,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젖은 머리칼 밑으로 조용히 빛나는 수줍은 웃음. 이렌느(가명)였다.
함께 만났던 NPA 멤버들 가운데서도 그녀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아시아인의 외모를 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적은 말수, 조용하게 응시하는 눈, 여고생 같은 수줍음 등 극좌 정당의 열혈 활동가에 대한 클리셰와 들어맞지 않는 면모들 때문이었다. 게다가 직업은 중앙정부 관료! 어색한 부조화를 이루는 각각의 조각들이 하나의 퍼즐 속에서 어떻게 조응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인터뷰를 제안했다.
중앙정부 관료는 어떻게 극좌 정당의 열혈 활동가가 됐을까 인터뷰는 2월 23일에 진행됐다. 작고 가느다란 몸, 미용사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수수한 검은 머리칼, 약간 그을린 피부의 그녀가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섰다. 바로 전날, 낭트에서 있었던 신공항 건설 반대집회에 갔다가 밤늦게 도착했다고 했다.
여러 언론들은 극렬 반대 시위자들이 거친 폭력을 행사했고, 경찰도 이에 엄중대응했다고 보도했다.(사실 이날의 약속도 100%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집회장에서 어떤 변수가 생길지 생겨날 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다행히 그녀는 무사했다.
앉자마자 그녀는 낭트 집회에 대한 언론 보도를 비판한다. 다수의 시위 참가자들이 단호하게 신공항 건설 불가에 대한 의지를 표했고, 경찰은 최루탄을 쏘았으며, 시위대의 머리 위로 감시용 헬기가 날아다니는 등 분위기는 삼엄했다고 한다. 하지만, 언론에 보도된 시위대의 폭력은 거의 소설 수준이라는 것이다.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데 첫 질문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라는 한마디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내 속을 단박에 읽은 듯 그녀가 먼저 털어놓았다.
"난 중국 사람이에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럼 저 묘하게 감도는 남도의 분위기는 뭘까? 하고 생각하는데, 또 답을 바로 던져준다.
"태어난 곳은 남태평양의 타이티 섬이에요." 타이티는 1847년부터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가 1957년부터 프랑스의 공식 해외 영토로 편입되었다. 국적은 물론 프랑스지만, 생물학적으로뿐 아니라 부모로부터 습득한 문화적 가치 또한 중국이라는 대륙의 그것이 그녀에게 깊숙이 새겨져 있음이 찬찬히 드러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고백.
"좌파가 된 건 불과 4년 전부터예요."
"그럼 그전에는요?" 설마하며 물었더니, 거리낌 없이 대답한다.
"우파였지요." 우파였던 사람이 4년 만에 프랑스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정당의 열혈 활동가가 되었다? 어떻게?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그녀에게 있었던 걸까?
중국, 타이티 섬, 그리고 파리 어떻게 그 전까지는 우파였느냐는 내 질문에, 이렌느는 자신의 가정사를 꺼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개인의 노력이 각자의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굳건히 믿을 뿐, 사회운동의 힘 따위에 전혀 기대를 걸지 않는 분들이다. 타이티 섬의 분위기도 예민한 정치의식이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1960~90년대 프랑스 정부가 타이티 인근 해안에서 핵실험을 거듭하는 동안 군사기지가 들어서고, 주민들을 현혹하기 위한 막강한 지원과 시설투자들이 이뤄졌다. 1995년에 이르러서야 주민들은 핵실험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파악하고 강력히 저항했다. 이후 실험은 멈췄지만, 타이티에는 예전의 활력이 사라졌다.
이렌느의 부모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핵실험이 이뤄지던 당시를 타이티의 '아름다운 시절'이라며 그리워한단다. 이렌느는 그들의 무지를 이야기하지만 비판하지는 않으려는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했다. 핵실험의 여파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국이 개방되기 직전, 중국을 떠나 타이티로 왔다.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그에게 당시 중국은 감옥 같은 곳이었다. 거기서 우두커니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다. 중국만 아니라면 세상 어디든 좋을 만큼 탈출이 간절했다. 그가 대륙을 떠나 필사적으로 다다른 곳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이티. 광활한 대륙을 떠나 자유와 기회를 찾아 도착한 곳이 작은 섬이라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중국에서 전기기술자로 일했지만, 프랑스령인 타이티에서 그의 자격증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식료품점과 식당 등에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타이티에서 만난 중국인 아가씨와 결혼해 6남매를 낳아 키웠다. 가장이 혼자서 음식을 납품하는 일로는 여덟 식구가 먹고 살아야 하는 삶에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살기가 빠듯했다. 부모의 삶은 세상이 결코 녹록한 곳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삶은 고달픈 것이다. 그러나 네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이 수렁에서 탈출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부모의 삶을 통해 보고 들었던, 그녀가 살아내야 할 삶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의심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이렌느의 아버지는 지옥 같았던 중국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타이티로 왔지만, 여섯 아이의 가장이 되었다. 가진 자산이라곤 몸 하나뿐인 그에게, 타이트 역시 점점 수렁이 되어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녀들이 수렁을 빠져나가도록 궁둥이를 밀어주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렌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어둡게 추억하지 않았다. 공부 외에 별다른 욕심이 없었고, 아낌없이 애정을 전해주는 부모와 우애가 돈독한 형제들 사이에서 소박하지만,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아버지는 불어를 거의 몰랐지만, 자녀들에게 길을 제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시는 분이었다. 이렌느는 늘 아버지를 의지했다.
"우리 형편이 어려워도, 네가 공부하길 원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까지 시켜주마." 70년대 한국 드라마에서 들어봄직한 대사를 이렌느도 늘 들으며 자랐다. 놀랍게도 이렌느는 내내 사립학교를 다녔다. 공부를 잘해서 언제나 프랑스 정부가 지원하는 장학금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하고 공부도 적당히 잘하는 아이들에게 주는 그 장학금을 못 탈까봐 걱정한 적은 없었다. 집은 언제나 형편이 어려웠고, 그녀는 늘 우등생이었으니까.
그랑제콜에서 인문학을 만나다고교 졸업 후 그녀의 삶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 이렌느는 타이티 섬을 떠나 파리로 건너온다. 대륙을 떠나 섬으로 온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길로 거슬러 올라갔다. 파리에서 그녀는 그랑제콜을 가기 위한 예비학교에 등록했다. 프랑스의 고교 졸업생 중 1~2%에 해당하는 최상위급 성적의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그랑제콜을 가기 위한 예비학교에 간다.
그랑제콜은 각 분야별로 소수의 엘리트들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국립학교다. 고급주택들이 밀집된 파리 16구의 기숙사가 딸린 예비학교에서, 2년간 기계처럼 그랑제콜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고, 2년 후, 예정대로 공공건축 분야의 학교에 합격한다. 산업자원부가 직영하는 이 학교는 리옹에 있다. 학비와 기숙사가 무료인 것은 물론, 입학과 동시에 산업자원부 공무원 채용이 보장되며, 3년간 급여까지 받는다.
이렇게 쉽게, 바로 그 아득해 보이던 고지에 올라서는가 싶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공부가 재미없었다. 선생도 학생도 열의가 없었다. 학우들 대부분은 3년 내내 파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수업 내용도 3년 뒤 현장에 투입될 예비 엔지니어를 위한 교육 치고는 구체성이 떨어졌다. 오로지 엘리트를 선발해내는 데만 교육의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유익하고 실질적인 관점에서의 교육은 완전히 미궁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미래가 보장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했다.
그때 이렌느의 숨통을 열어준 것은 다양한 인문학 강의들이었다. 학교에는 엔지니어 교육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문학 강의들이 많이 열렸다(프랑스가 지금만큼의 균형을 이루며 오늘까지 지탱해올 수 있었던 저력의 근원은 바로 전공 분야를 막론하고 폭넓게 행해지는 인문 교육이 아닐까).그랑제콜에서 사회학·철학·정치학·생태학 등을 폭넓게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는 동안 서서히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오느라 충분히 둘러보지 못했던 세상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연대!"를 말한 단 한사람사회학 시간이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각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세 가지를 적어내라고 했다. 거의 모든 학생이 개인의 성취, 자유, 성공과 관련한 단어를 적어낸 가운데, 단 한 사람이 '연대(Solidarité)'라는 단어를 적어냈다. 교수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요즘 세대로서는 매우 드문 가치관인데"라고 한마디 했다. 그렇다면 이렌느는 어떤 가치를 꼽았을까?
"인내, 공덕... 세 번째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연대를 말한 학생은, 쥘(Jules)이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잘난 줄 아는 그랑제콜 학생들 사이에서 쥘은 진작부터 도드라지는 존재였다. 같은 학교에 다니지만, 그는 분명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이렌느가 파리 16구의 안락한 기숙학교에서 그랑제콜 합격을 목표로 향해 매진하던 무렵, 그는 사르코지 정부가 청년실업문제 해법으로 내놓은 최초고용계약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며 일찌감치 거리에서 짱돌을 날렸다.
내가 아는 한 '연대'는 여전히 프랑스 사회를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떠받치는 현재적이고 충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가치다. 그런데 특정 계층이나 세대에게는 이것이 낯선 가치일까? 교수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 만큼? 이렌느가 고개를 끄덕인다.
3년 내내 파티만 하다가 그랑제콜을 마친 학생들이 정부 관료가 되면, 그들은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는 일에만 관심을 갖지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에는 무관심하다. 실패를 알지 못하고, 편안하고 매끄러운 길만을 걸어온 그들에게 '연대'란 매우 낯선 단어다.
그런 와중에 연대를 말한 희귀종 쥘은 그날, 이렌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이렌느의 삶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전환한다. 재미없는 파티에 억지로 몸을 들이미는 대신 쥘과 세상에 대해 토론하는 일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좌우 양극단에서 온 듯한 두 청년은 세상사, 인생사를 두 개의 시선으로 해부하면서 날마다 진검승부를 펼쳤다.
무려 3년 동안. 그리고 마침내 이렌느는 완패를 선언했다. 자본주의가 세상에 모순을 축적해 왔으며, 자기모순으로 결국 해체되리라는 것, 그러나 더 많은 자본주의의 폐해가 삶을 유린하기 전에, 다시 전쟁이나 인종 학살 같은 참혹한 재해로 인류가 너덜너덜 찢겨나가기 전에, 저항하고 저항하여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쥘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NPA의 당원이 되었다. 3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싹텄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렌느는 둘의 러브스토리가 가져온 격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털어놓지 않았다.
NPA 입당 그리고 지나온 모든 삶의 가치와의 결별. 이렌느로서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리라. 그녀의 꿈은 온전히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가족을 등지고 타이티 섬으로 날아온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바깥세상으로 보낸 중국의 가족들의 꿈까지 함께 등에 지고 서 있을 터였다. 쥘의 말이 옳다 한들 머리로만 동의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렌느는 주말의 모든 시간을 당을 위해 헌납하는 활동가의 삶으로 투신했다. 부모의 꿈을 대신 실현해야 하는 사명을 지고 파리에 왔던 이렌느. 지금 자신의 선택에 아무런 후회도 없을까?
친구들은 이렌느가 쥘에 매혹된 나머지 사상마저 그를 따라간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극좌 정당 활동가로의 변신이 가끔은 본인 스스로도 믿기 힘들지만, 지금의 삶은 냉철한 이성과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고 선택이었다.
"과거에 나는 우파였다. 과거에 내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바라시던 그대로. 물론 학창시절에는 학업의 성취가 목표였다. 개인의 노력으로 일의 성패가 갈린다고 믿었다. 물론 이건 전형적인 우파적 사고다. 사회구성원이 사회에서 반듯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1차적 책임은 본인에게, 2차적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제도를 탓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분히 모럴리스트이기도 했다.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으로 세상과 사람을 구분했다. 가족에 큰 의미를 부여해 가족공동체에서의 내 역할을 늘 생각했다. 그 점에선 여전히 그러하다. 부모가 내게 도움을 청한다면, 나는 기꺼이 힘 닿는 데까지 그들을 도울 것이다." 이렌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런 것이 우파였나,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녀가 말하는 우파는 좀 고리타분할 뿐, 지극히 상식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이지 않은가. 지금 한국의 정치지형을 지배하고, 한국사회를 온갖 기형적 현상과 행위들로 분탕질치는 자들, 자신들이 우파인 줄 알지만 실은 극우 혹은 기회주의자들인 그들을 떠올리자니, 지금 한국사회에 아쉬운 것은 좌파가 아니라 오히려 진중한 가치를 추구하는 건강한 우파라는 생각이 든다.
김구, 장준하 같은 정의로운 우파가 전통적 가치를 진득하게 지켜주고, 조금은 삐딱하고 자유로운 좌파들이 좀더 멋진 유토피아를 향해 파격적이고 매력적인 사고들을 사회에 흩뿌려놓는 그런 사회라면 그 새는 얼마나 좌·우의 날개를 멋지게 펼치며 날 것인가. 잠시, 망상에 잠긴다.
지식인의 양심으로 행동하라! 이렌느는 생산성재건부(올랑드 집권 이후 산업자원부는 이렇게 코믹한 이름으로 간판을 갈았다)에서 일한다. 그녀는 도시개발과 공공건축 프로젝트들을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검토하는 일을 한다. 쥘 역시 정해진 길을 가서, 두 사람은 정부 관료이자 열정적인 NPA의 활동가 커플이 되었다.
모든 집회와 회의에 필요한 문건을 만들고, 회의 자료를 작성하고,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한다. 당에 사람은 적고, 그 적은 사람들 또한 저마다 이 자본주의가 쳐놓은 그물망을 비껴가지 못해 고단한 생존 전쟁을 치르면서 당 활동을 하는지라 비교적 상황이 여유로운 이렌느와 쥘이 많은 일을 맡아 처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