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위패가 모셔진 도봉서원. 도봉산에 있다.
김종성
조광조가 좀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개혁을 추진한 것은 시대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기 때문이다. 그가 정권을 잡기 전에 조선을 지배한 세력은 이른바 훈구파라 불리는 세력이었다. 훈구파는 말 그대로 하면 '공훈을 세운 구세력'이다. 쿠데타나 정변에서 공로를 세워 집권층을 형성한 세력을 뜻한다.
정상적인 승진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정변을 통해 권력 핵심부에 진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국가 시스템이 그만큼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1392년 조선 건국 이후부터 1515년 조광조의 등장 이전까지 조선을 지배한 세력은 기본적으로 훈구파이거나 이와 유사한 세력이었다.
훈구파의 반(反)역사성은, 그들이 정상적인 승진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실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주로 서울·경기 등 수도권에 포진한 이들은 대토지 소유를 통해 경제력을 독점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정치권력을 이용해서 대기업을 소유하고 대규모 부동산을 보유했던 것이다. 농업경제 하에서 농토와 노비를 많이 소유한 사람은 지금의 대기업 주인과 같은 존재였다.
훈구파의 정치적·경제적 독점은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했다.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반에 재야에서는 홍길동의 반란 같은 반체제 운동이 나타나고, 조정에서는 사림파로 불리는 개혁세력이 두각을 보였다. 이것은 조선 사회의 양극화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훈구파가 나라를 망쳐 놓았기 때문에 재야와 야당 세력이 도전장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일기>나 <중종실록>에 묘사된 홍길동의 반란은 크나큰 여파를 남기기는 했지만 조선 왕조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홍길동의 반란이 진압된 1500년 이후에 훈구파의 대항마로 남은 것은 야당세력인 사림파뿐이었다. 하지만, 사림파도 연산군 시대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연산군이 무오사화·갑자사화 같은 정변을 일으켜 사림파를 집중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연산군의 행동은 결국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훈구파를 견제할 사림파가 약해지자 훈구파의 힘이 더 세졌고, 권력의 균형이 깨진 틈을 타서 훈구파는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훈구파는 사림파가 약해진 정치환경 속에서 한층 더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것이 조광조 등장 이전의 상황이었다. 재야의 반체제 세력도 약해지고 야권의 개혁세력도 약해진 상태에서 역사무대에 전격적으로 출현한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분명했다.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선을 정상적인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특권층만 잘사는 세상이 아닌, 전체 백성이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재야와 제도권의 비판세력이 취약한 상태에서 거대 여당인 훈구파에 맞서자면, 정상적이고 순차적인 방법으로는 개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마음이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노골적이면서도 급진적인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광조는 자신이 직접 왕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종의 참모가 되어 정치개혁에 도전한다. 이어지는 제2부에서는 조광조가 중종의 참모가 되는 과정, 제3부에서는 개혁을 추진한 구체적 과정, 제4부에서는 실패한 이유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8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