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년이 시작된 지 채 한 달도 안 됐는데, 교과서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적지 않다. 수업 시간 교과서가 없으면 수행평가에 감점을 한다고 수차례 엄포를 놨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다. 옛날과 달리 요즘 교과서 가격이 웬만한 참고서나 문제집보다 비싼데도,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교과서를 소홀히 여기는 건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책 귀한 줄 모르는 세대라서 그렇다고 두루뭉수리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학교수업이 오로지 수능 대비를 위한 문제 풀이 위주로 진행된 탓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런 까닭에 사교육비를 절감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EBS 방송 교재는 아예 교과서를 퇴출시킨 '일등 공신'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덜거나 더할 것 없는 적확한 지적이지만, 이따금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도 못할뿐더러, 그들이 느끼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보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교과서에 실린 용어를 자상하게 설명할라치면 코웃음 치며 조롱하기 일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답변에 교사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경제 단원의 '카페라테 효과'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시험에 출제된다고 하니 열심히 밑줄을 치기는 하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비웃었다. 여기 저기서 연신 "말도 안 돼"라며 중얼거렸다. '카페라테 효과'란 소액이라도 장기간 투자를 하면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걸 비유한 개념이다. 말하자면, 우리 속담으로 '티끌 모아 태산'과 비슷한 의미다.
지금 5천 원 정도 하는 커피 한 잔 값을 아껴 매월 적립식 투자로 개인연금 등에 가입한다면, 30년 후에는 2억 원 가까운 목돈이 생긴다는 '핑크빛 전망'이다. 다가올 고령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덕목이라는 말까지 친절하게 덧붙여 놓았다. 말인즉슨 나무랄 데 없이 옳지만, 아이들은 코웃음을 친다.
"저희 엄마가 담배 끊으라며 매일 아빠한테 하는 이야기와 똑같네요. '하루에 2500원이면, 한 달에 75000원, 1년이면 100만 원 가까운 돈이에요. 10년이면 조그만 자동차 한 대쯤은 너끈히 장만할 수 있는 목돈이죠. 몸에도 안 좋은데, 제발 좀 담배 좀 끊어요.' 하도 많이 들어 제가 다 외울 정도예요.
그러면, 아빠는 그때마다 이렇게 반격하죠.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부자 못 될 사람 아무도 없겠네'라고요. 그런데, 엄마는 아빠 앞에서 말만 그렇게 할 뿐,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로또를 사러 가시거든요."
"부동산 수익을 국가가 환수한다면?"... "그건 공산주의에요"
대개 아이들도 그랬다. '꾸준히 저축해서 부자가 된다는 건, 조선시대 때나 가능한 일'이라며 키득거렸다. 집을 사든, 땅을 사든, 아니면 로또를 사든, 부자가 되려면 큰 걸 노려야 한다며, 어차피 '인생은 한 방'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자린고비' 이야기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이해시키려야 이해시킬 수 없는 '전설'이자, 한편의 '개그'가 돼 버렸다.
그래서일까. 대부분 아이들이 정기적으로 부모로부터 적지 않은 용돈을 타고 있지만, 현재 조금씩 떼어 저축을 하고 있다는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가당키나 하냐는 듯, 저축이라는 말 자체를 낯설어했다.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정부와 학교에서 저축을 장려한 탓이기도 했지만, 푼돈 통장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들에게 저축이란 '대박'을 위한 '도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굳이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는 게 저축이라면,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저축 이라고 말했다. 어떤 아이는 한술 더 떠서, 안전하다는 은행도 부도나는 판인데다, 예금, 적금 들어 어느 세월에 목돈을 마련하겠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도발적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빚을 내서 집을 사는 게 저축일까? 거주할 목적이라면 몰라도, 시세 차익을 노리고 투자한 거라면?" 오로지 '인생은 한 방'이라고 여기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화두 삼아 던진 이 질문이 수업을 되레 '삼천포'로 빠지게 만들었다. 집이 과연 이윤을 추구하는 상품일 수 있느냐는 걸 생각해보자는 건데, 아이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이 세상에 사고팔지 못하는 게 어디 있을까요. 어디선가 읽은 건데, '교육은 사람의 상품가치를 높이려는 투자'라는 구절이 기억나요. 말하자면, 좋은 곳에 취직하고 싶으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는, 뭐 그런 메시지였죠. 사람의 몸조차 상품이라는 건데, 하물며 집이 상품이 아니면 뭐가 상품이에요?"
부동산을 사고팔아 돈 버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 아이는 없었다. 괜히 물었나 싶어, 한 걸음 더 나가봤다.
"살지도 않을 집을 사고팔아 얻은 이익이라면 불로소득 아닐까? 그 수익 전부를 세금으로 국가가 환수한다면 어떨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몇몇 아이들은 그 질문을 이 한마디로 뭉개버렸다. "그건 공산주의에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말문이 막혔고, 더 이상 토론다운 토론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긴 재작년인가 의료보험을 주제로 교내 토론대회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여러 토론 주제 중에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꼭지가 있었다. 토론 중에 반대 측 토론자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내놓아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내용인 즉슨 이랬다.
"우리 국민들 다수가 의무 가입해야 하는 국민건강보험 외에 수많은 민영보험에 가입하고 있는데, 보험료 때문에 가계의 경제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다. 민영보험 의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국민건강보험의 보험료를 올려 보장성을 높이는 게 대안일 수 있다."
찬성 측이 이렇게 주장하자, 반론 대신 이렇게 반문했다. "그건 공산주의적 발상이에요. 또, 그렇게 되면 민영보험사 직원들은 뭘 먹고 살아요" 이런 토론에서 공산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차라리 '도깨비 방망이'다. 또,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해주나. 정말 '심성이 고운' 아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요즘 들어 수업을 하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 아이들이 삶을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서만 배우는 건 아닐뿐더러, 또 그것이 진리인 양 모두 옳은 것도 아닐 테지만, 그들은 교과서 내용을 비웃을 만큼 세상에 대한 어른들 못지않은 편견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순수했던 그들이 현실에 순치되어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자본주의적 인간형'으로 길러지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 섬뜩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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