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수업시간에는 별도의 '지정석'이 없다. 아이들이 매 시간 앞이든 뒤든 앉고 싶은 자리에 앉는다. 대개 모든 과목 수업이 학급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데 반해, 내 수업만큼은 도서관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도서관에서도 번호 순이든 키순이든 교사가 자리를 배정해줄 수 있지만, 먼저 오는 아이에게 '혜택'을 준다는 차원에서 자유롭게 앉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 혜택이란, 칠판과 스크린이 가까운 맨 앞자리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도서관이 좁고 긴 장방형이라서 뒤에 앉으면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학급 당 학생 수가 40명이나 되니, 맨 뒷자리에 앉게 되면 수업을 받는 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수업 중 굳이 마이크를 사용하는 것도 그래서다.
아뿔싸. 수업의 질을 과신한 탓일까. 혜택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아이들에게 맨 앞자리가 가장 인기 있을 거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단 한 학급도 예외는 없었다. 되레 맨 뒷자리부터 채워지기 일쑤였고,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전에 앉던 자리에 그대로 끼리끼리 모여 앉는 모습이었다. 마치 '지정석'처럼 말이다.
그나마 맨 뒷자리는 학급 내에서 이른바 '껌 좀 씹는' 아이들의 차지다. 대개 수업을 방해하려는 듯 키득거리며 소란을 피우거나, 수업 시작 채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리고 마는 아이들이다. 아무리 깨워도 이내 다시 쓰러지고, 벌점을 준다고 을러도 되레 코웃음 치기 일쑤다. 그들의 성적이 밑바닥인 건 불문가지다.
처음엔 오래된 '편견'이려니 했다. 왜 그런 것 있잖나. 시내버스를 타도 좌석의 앞뒤가 세대로 나뉘는 모습 말이다. 타는 문과 가까운 앞쪽은 주로 어르신들이 앉고, 맨 뒤는 어김없이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는다. 그들이 다 '문제아'일 리는 없지만, 솔직히 그들을 삐딱한 눈으로 쳐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교실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모둠의 벽'을 넘지 못하는 아이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그들의 자리가 뒷자리냐 앞자리냐가 아니다. 어떻게든 '친한' 친구들끼리 모이게 된다는 점이다. 모든 반 매 수업시간이 본의 아니게 '모둠 학습'으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처지라, 처음엔 안면이 있는 같은 중학교 출신끼리 앉더니,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자리가 재편되었다.
공교롭게도 중학교 내신 성적이 기준이다. 중학교 때의 학교생활을 서로 알았을 리 만무하지만, 모여 앉은 아이들끼리의 석차 백분율은 대동소이하다. 서로 말이 통한다고 느껴선지, 그들끼리는 잘 뭉치고, 청소를 시켜도 같이 하겠다고 나서는 등 '우애'도 좋다. 가만 보면 끼리끼리 모여 앉은 아이들의 옷차림과 머리모양, 심지어 눈빛마저도 비슷하다.
마치 유니폼처럼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같은 기종의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소속감을 그렇게 표현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점심시간 급식소에서도 같은 식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는다. 쉬는 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늘 함께 붙어 다니고, 집 방향이 서로 달라도 같은 버스를 타고 하교하기도 한다. 언뜻 보면 친구라기보다 친형제 같다.
그러나 모둠과 모둠 사이엔 넘기 힘든 벽이 있다. 차라리 물과 기름이라 해야 옳다. 웬만해서는 서로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얼굴을 마주할 일도 거의 없다. 같은 중학교를 다녔던 아이들끼리도 순식간에 멀어져 서로 소 닭 보듯 한다. 예전엔 담임교사가 누구인가에 따라 학급 분위기가 좌우됐는데, 요즘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모둠별 '이질감'이 그만큼 큰 탓이다.
이는 교사들이 수업하기가 해가 갈수록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우연히 올해 신입생들의 중학교 내신 성적 일람표를 본 적 있다. 예년에 비해 10% 이내의 상위권 학생 수는 크게 줄었고, 대신 100%에 육박하는 최하위권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이유인즉슨, 상위권 학생들은 자사고와 특목고로 향하고, 중위권 아이들이 과거 실업계와 전문계로 불렸던 특성화고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인문계고 슬럼화...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 인문계고와 특성화고는 개인의 적성과 흥미가 아닌 성적으로 구분 지어졌다. 일선 중학교마다 공공연히 인문계고 커트라인이 공지되기도 했다. 거칠게 말해서, 인문계고에 합격한 '꼴찌'가 특성화고로 가면 '1등'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문계고에 너끈히 합격할 상위권 학생들조차 자발적으로 특성화고를 선택하는 양상을 보인다.
고학력 실업자가 늘어가는 시대에 이러한 현상은 바람직한 변화일 수 있다. 아이들의 이른 진로 설정은 권장할 일이지, 인문계고 교사들이 수업하기 힘들다고 해서 몽니부릴 건 못 된다. 다만, 과거 특성화고에서 벌어진 숱한 일들이 인문계고에서 횡행하고 있는데도 미처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다. 갑작스런 '쓰나미'에 속수무책이라고나 할까.
당장 인문계고의 성적 하락과 생활지도의 혼선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상위권이 대거 이탈하고 그 자리가 최하위권으로 채워졌으니, 성적 하락은 운운하는 것조차 새삼스럽다. 그러나 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없는 문제다. 평준화 이후 일반 고등학교의 '범칭'으로 불렸던 인문계고를 아이들 스스로 '2류'나 '3류' 학교로 폄하하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하나.
이제 명문대만 부러워하는 시대는 지났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명문대가 아닌, '명문고'를 목표로 학원을 순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성세대에게 신분과 위세를 뽐내기 위해 고급 외제차가 필요하다면, 아이들에게는 고등학교의 '이름'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성적 때문이든, 가정 형편 때문이든 '명문고'에 가지 못한 아이들은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좌절감과 열패감을 맛보게 되는 셈이다.
중상위권이 그럴진대, 하위권 아이들임에랴. 더욱이 최근 들어 '상상을 초월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타성에 젖다'에서 타성이 무슨 빗물인 줄 알고, '내재적 요인'이라는 말은 숫제 처음 들어본단다. '항변', '체화', '순응' 등 교과서에 나오는 기본적인 단어가 그들에게는 차라리 '영어'다. 문제를 이해하기는커녕 '추론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에, 그들이 고등학생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나마 '우리 말' 수업이니 그 정도지, 듣자니까, 영어나 수학 수업 때는 그야말로 '가관'이라고 한다. 떠들고 싶어서 떠드는 게 아니고, 피곤해서 자는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50분간의 수업이 너무도 '지루하고 괴로워서' 그런 것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인문계고에서 웬만해선 볼 수 없었던 낯선 풍경이다.
수업시간이 그 모양인데, 생활지도라고 멀쩡할까. 아이들이 담배 피는 건 더 이상 화제 거리도 안 된다. 워낙 많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끊어라'고, '부모님 모셔 오라'고 체벌을 하며 엄포를 놓았지만, 이젠 '제발 학교에서만은 피지 마라'는 게 사실상 금연지도의 전부다. 자녀의 흡연 사실을 몰랐다는 부모가 별로 없을 정도니,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일부에서는 학교폭력이 크게 줄었다고 호들갑 떨지만,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다. 물론, 신고 건수로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화자찬하기란 섣부르다. 요즘 들어 학교폭력의 양상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막상 신고해서 처리가 돼도 학교생활이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짱'인지 학년 초면 서열이 얼추 정해지고, 그들의 실체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팽배해있어 아이들은 '눈치껏' 처신하는 게 몸에 밴 상태다. 그걸 누구도 '굴욕'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학교폭력이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는 건, 학교폭력이 온존하는 또래 문화에 아이들이 시나브로 순치된 결과로 보는 게, 차라리 더 타당하다.
이런 생각도 든다.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지만, 교실 내에서 '소'가 '닭'을 따돌리고 괴롭히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대는 갔다. 스스로를 '밑바닥'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에게는 자존감이라는 말 자체가 사치스럽다. 어설프게 낮은 자존감은 폭력성을 띠기 십상이라지만, 자존감을 아예 상실한 아이들은 남을 해코지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말 그대로 '폐인'이 된다.
열패감에 고통 받고 자존감을 잃은 아이들이 동급생이랍시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이 무기력하고 '파편화'된 교실을 일컬어 호사가들은 '인문계고의 슬럼화'로 그럴 듯하게 지어 불렀다. 한때 멀쩡했던 인문계고를 스스로 희망도 접어버린 퇴락한 도시의 뒷골목에 비유한 것이다. 대체 누가 이 많은 아이들을 '좀비'로 만들었는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의 수를 세어보았다. 맨 앞자리에 앉은 여남은 아이들과, 뒤편 띄엄띄엄 자리한 십여 명이 전부다. 그래도 위안거리라면 딴청 피우거나 엎드려 자는 아이들보다는 많다는 거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역전될 게 뻔하다. 이러다 대학입시를 준비시킨다는 인문계고 간판을 내려야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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