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회] 누가 목숨을 노리는 지 알지 못하겠구나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48회] 마차(1)

등록 2014.05.26 11:16수정 2014.05.2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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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장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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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도 48 無爲刀 ⓒ 황인규


관조운과 혁련지는 담곤에게 자신들이 모충연의 제자라고 정체를 밝히고는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경과를 이야기했다. 담곤은 두 명의 사형이 창졸간에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슬픔을 나타내면서도 한편으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관에게 쫓기고 있는 것에 깊은 염려를 보였다.


"자네들은 날 잘못 찾아 왔네."
사연을 다 듣고 난 후 담곤이 한 말이다.
"네?"
관조운과 혁련지가 동시에 물었다.

"대사형이 무극진경의 안전을 위해 자네들을 나에게 보냈다고 하지만 자네들이 대사형의 유언을 잘못 해석한 게 아닌가 싶네. 왜냐면 나는 진경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임종 직전에 저에게 읊어달라던 시는 단순히 감상을 위해서란 말입니까?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습니다."

관조운이 목이 메인 듯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우리가 사부님의 의도를 잘못 파악했을까요……?"
혁련지가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사형이 자네들을 나에게 보냈다면 적어도 내가 진경에 관한 약간의 정보나 어느 정도의 실마리라도 있어야 할 텐데, 지금 현재로선 나 역시도 자네들만큼이나 깜깜한 입장이라네."

"……"


관조운과 혁련지는 침통한 표정이 됐다. 위험을 무릅쓰고 기껏 넷째 사숙을 찾아왔더니 그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하니 그동안의 수고가 물거품이 됨은 물론 다시 암흑 속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관조운은 임종 직전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숨이 가빠오고 기력도 빠져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한가하게 한시(漢詩)를, 그것도 스승님이 평소 즐겨 읊던 시가 아닌 생뚱한 시를 읊어달라는 건 분명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춘계문답'이라는 시를 자신과 사매가 잘못 해석한 건가. 그의 머릿속은 메뚜기떼가 휩쓸고 간 들판처럼 휑해졌다. 혁련지 역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골똘해 있다.

"비천사운(飛天四雲) 중 남은 건 나 하나, 이제 노부가 표적이 될 차례 같군."
담곤의 침통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둘째 기 사숙어른도 계시지 않습니까?"
관조운이 물었다.

이때 혁련지가 관조운의 소매를 슬며시 잡아당겼다. 둘째 제자 운몽선객(雲夢仙客) 기승모(寄承募)는 내가수련이 잘못 돼 광인(狂人)이 되었다는 소문은 어제 강호에 발을 디딘, 검 손잡이의 무명베도 안 벗긴 애송이도 알고 있다. 기승모, 그의 육신은 아직 이승에 머물고 있지만, 무림이라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비천문 무공의 진수를 가장 깊이 체득했고, 무학에 관한 한 태허진인으로부터 은밀히 심인(心印)을 받았다는 기승모였다. 하지만 그의 무공과 수련의 경지는 이제 아스라한 전설로 남아 주루의 안줏감으로도 식상할 지경이 되었다. 그런 식의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숙이니 괜한 화제로 담 사숙의 심기를 또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아 혁련지가 관조운의 입을 슬며시 막은 것이다.

"기 사형보다는 내가 목표가 되겠지."
"사숙어른께서 달리 짐작가시는 일이 있으신지요?"
혁련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우리 네 제자들을 노리는지 나도 전혀 감이 잡히는 바가 없구나."
"왜 다음 표적이 담 사숙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혁련지가 물었다.

"일단 멀쩡한 사형들이 먼저 당했으니 다음으로 노부, 마지막으로 둘째 사형이 되진 않을까, 하고 추리해 본 거라네."
"진인 태사부님께서 승천하신지 이십여 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잠잠하다가 왜 이제야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습격을 한단 말입니까?"
관조운이 끼어들었다.

"나도 모르는 일일세. 현재로선 노부가 다음 표적이 될 것인지 혹은 여기서 그칠 것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네. 셋째 사형과 대사형이 근자에 갑자기 횡액을 당하셨다니 만약 우리 제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노부가 다음 표적이 되겠지."

"좀 전에 사숙어른께서 멀쩡한 사형들부터 당했다고 하셨는데, 혹시 사숙어른께서는 달리 다른 상태에 처해 있으신지요?"

혁련지가 조심스런 말투로 물었다. 멀쩡한 사숙들이 먼저 당했다고 표현했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멀쩡하지 않냐고 물은 것이다.

"혁련 사질이 매우 예리하구먼."
듣기에 따라선 무례한 질문이 될 수 있지만, 담곤은 개의치 않은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 자네들이 나의 사질(師姪)이 되고, 크게 보아 비천문의 제자에 속하니 내 진실을 말해 줌세. 실은 나도 무공을 잃었다네."
담곤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무거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네?"
"아니, 어쩌다가?"
관조운과 혁련지의 입과 눈이 동시에 동그랗게 됐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차차해주지. 당장은 여기서 빠져나가 게 급선무야."
담곤이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모으더니 다시 말했다.

"이렇게 하지. 여기서 말로 하루거리에 운부산(雲斧山)이 있는데, 그곳에 나의 산장(山莊)이 있어. 일 년에 한번 정도 찾는 곳인데 내 개인적인 은가(隱家)랄까. 표국에서는 오직 총관사만 알고 있지. 예전에 모 사형도 이곳에 몇 달 씩 머무르기도 했던 곳이기 때문에, 사형께서 관 사질에게 나에게 가라고 했다면 어쩌면 이곳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네? 사부님이 이곳까지 왕림하셨단 말입니까?"

관조운이 놀란 듯 물었다. 그가 알기론 스승 모충연이 외지에 출타를 할 적엔 일정과 경로를 자신에게 꼭 말씀 해주셨다. 허나 그가 들은 바로는 정주나 운부산에 들린다고 한 적은 없었다. 사년 전 계절이 두 번 바뀔 정도로 장기출타를 한 적은 있지만, 섬서나 사천 지역의 무림문파를 방문한 줄로만 알았다. 비영문의 연 장문인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사부님은 금의위의 무예교본 저술에도 참여한 것 같았다. 결국 사부님은 은거 생활을 하시면서도 강호의 끈을 완전히 놓은 게 아니었다. 다만 무림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선 자신에게 일부러 얘기하지 않은 것이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스승님의 유언을 나름대로 추리해 담곤 사숙을 찾아왔건만, 담 사숙은 그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유를 모르는 눈치였다. 애초에 담 사숙에게만 가면 모든 의문이 풀릴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른 무엇이 있어야 했다. 담 사숙은 답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또 다른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방금 담 사숙의 말을 듣고 보니, 예전에 스승님이 몇 달 씩 머무르고 계셨다는 운부산 별장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래야만 될 것이다. 어차피 이곳에선 안팎으로 감시가 심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담 사숙의 의견대로 운부산 별장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들어 올 때와 마찬가지로 들키지 않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표국을 나갈 때도 표물에 숨어서 가는 방법 밖에 없겠군."
담곤이 나직이 말했다.
"혹시 규모가 큰 상단의 표물이나, 숨기에 알맞은 짐이 있겠습니까?"
혁련지가 말했다.

"나가는 짐은 금의위들의 순검(巡檢)이 있을 지도 모른다네."
"그 자들이 직접 짐들을 수색합니까?"
"그렇진 않겠지. 그들 자체도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입장이라, 될 수 있는 한 눈에 띠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네. 따라서 일일이 짐 검사를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겉보기에 수상쩍다거나 의심스러운 짐이라고 생각하면 따로 검사를 하지 싶네."

관조운과 혁련지 그리고 담곤은 말이 없이 생각에 잠겼다.

창고의 벽 틈 사이로 햇살이 사선으로 비췄다. 먼지들이 햇살을 타고내리며 춤을 추었다. 하역장에서 짐 부리는 소리가 이곳 창고까지 소란하게 들렸다.

"오, 좋은 생각이 났어."

담곤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오늘 잉어를 실은 수조마차가 나갈 예정이야. 거기에 숨으면 감쪽같을 거야."
"마차에 숨을만한 공간이 있습니까?"

관조운이 말했다.

"암, 마차의 구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알아채기 힘들 거야."

담곤은 관조운과 혁련지에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어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소곤댔다. 하역장에선 아까보다 더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표국의 분주한 일과가 시작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월 목 연재합니다
#무위도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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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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