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왕이 된 남자> 포스터.
리얼라이즈 픽처스
개혁파 정권인 광해군 정권은 여타의 개혁파 정권과 비교할 때 색다른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정권 핵심부가 비주류의 집합소라는 사실이다.
정권 제1인자인 광해군은 서자 출신이었다. 2인자인 김개시(김개똥·김가희)는 여성이며 공노비 출신이며 궁녀였다. 3인자인 이이첨(1560~1623년)도 그랬다. 이이첨 역시 많은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정권은 '콤플렉스 집합소'였다.
혹자는 "김개시가 아니라 이이첨이 광해군 정권 2인자가 아니었나?"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인조 1년 9월 14일자(양력 1623년 10월 7일자) <인조실록>에는 '이이첨이 김개시에게 빌붙었다'라든가 '이이첨이 김개시와의 협의를 거쳐 인사권을 행사했다'는 식의 표현들이 나온다. 이런 점을 근거로 김개시가 2인자, 이이첨이 3인자라고 말한 것이다.
이이첨의 콤플렉스는 조상 때 생긴 것이었다. 이 가문이 잘나가던 연산군 때가 그 시작이다. 이이첨의 5대조인 이극돈은 연산군 정권의 거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훈구파라 불린 보수세력의 거물이었다. 그는 개혁파 소장 그룹인 사림파를 탄압했다. 그가 일으킨 정치 탄압을 '무오사화'라 부른다. 선비들에게 화를 입힌 무오년 사건이라는 뜻이다.
신진세력을 탄압할 정도로 막강한 가문이었지만, 연산군 정권이 1506년에 쿠데타로 붕괴하면서 이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극돈 이후로는 과거시험 급제자도 나오지 않았다. 1567년에 선조의 등극과 함께 사림파가 집권하면서부터 이 집안은 한층 더 암울해졌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비유하자면, 고려시대 최충헌 가문은 4대 60년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던 데 반해, 이극돈 이후 이 가문은 4대 60년간 기는 새도 못 잡을 정도였다.
사림파를 탄압한 이극돈의 후손이니, 1567년 이후의 사림파 세상에서 살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사림파 정권 탄생 7년 전인 1560년에 출생한 이이첨은 그래서 극도의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벽의 흙을 갉아 먹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개천에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주변 사람들은 이이첨을 보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이첨은 총명하고 유능했다. 또 의지도 대단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거시험에 도전했다. 도전은 결실을 맺었다. 23세 때인 1582년에 그는 과거시험 소과(小科)에 급제했다.
소과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구성된다. 생원시는 경전 이해능력이 우수한 사람에게 생원이라는 타이틀을 주는 시험이고, 진사시는 시 쓰는 능력이 우수한 사람에게 진사라는 타이틀을 주는 시험이었다. 둘 중 하나만 붙으면, 다음 단계인 대과(大科)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이첨은 1582년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를 모두 통과했다. 집안환경을 고려하면 이것은 경이적인 일이었다.
이 정도 실력이었으면 몇 년 내에 대과에도 급제했을 것 같은데, 그는 오래도록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극돈의 후손이라는 점이 족쇄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대과 급제자는 단번에 중간 간부직에서 출발할 수도 있지만, 소과 급제자는 말단직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소과 급제자의 승진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소과 급제자는 하급 관직을 받기보다는 어떻게든 대과에 급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이첨은 자기 처지로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였는지 아니면 먹고 사는 게 급해서였는지 종9품 말단직인 광릉참봉직을 받아들인다. 광릉참봉은 세조(수양대군)의 무덤인 광릉을 관리하는 공무원이다. 이때는 1582년 이후의 어느 시점이다.
도요토미의 임진왜란, 이이첨의 인생을 바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