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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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세웠다가 3일 천하로 끝난 김옥균(1851~1894년).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조선주재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한 뒤부터 고종 임금은 김옥균을 잡기 위한 추격전에 돌입했다.
김옥균이 단 3일 동안 나라를 벌집처럼 쑤셔놓고 달아나자, 고종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김옥균의 신병을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병 인도를 거부했다. 그러자 고종은 때로는 사람들을 보내 김옥균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때로는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했다.
고종이 일본 정부에 신병 인도를 요구한 것이나 김옥균 본인에게 귀국을 종용한 것은 모두 다 똑같은 동기에서 기인했다. 김옥균을 죽이고자 그렇게 한 것이다. 갑신정변 이후 10년 동안 고종은 그렇게 집요하게 김옥균을 추격했다. 이 추격은 김옥균이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암살 당하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위의 풍경은 상당히 의외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동지 관계였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고종이 전략적으로 육성한 핵심 참모 중 하나였다.
철종 2년에 태어난 김옥균은 고종보다 한 살 위였다. 충청도 공주군에서 어머니 송씨와 아버지 김병태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어릴 적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학문적 능력을 발휘했다. 집안은 명문가인 안동 김씨였지만, 아버지 김병태는 가난한 서당 훈장이었다. 김병태의 '사설 학원 원장' 수입으로는 김옥균의 천재 기질을 발현 시키기 힘들었다.
이런 사정은 김병태의 육촌형제인 김병기의 구미를 당기게 만들었다. 김병기는 지방 사또였지만, 대과(제2단계 과거시험)에 급제하지 못하고 소과(제1단계 과거시험)에만 급제한 지방관이었다. 진사나 생원을 선발하는 소과에서 그는 생원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소과에도 급제하지 못한 채 지방 사또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생원 출신 사또라는 타이틀로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 높은 관직에 도달할 수 없었다. 생원이나 진사는 군(郡) 단위의 지방에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생원 출신 사또는 지방 양반들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사또들은 콤플렉스가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아들 대에서라도 대과 급제의 꿈을 이루고 싶었는지 김병기는 칠촌 조카인 김옥균을 양자로 삼겠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김병태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제안을 수락했다. 이렇게 해서 김옥균은 가족의 품을 떠나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가 여섯 혹은 일곱 살이었다.
스물두 살의 장원급제자 김옥균, 고종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