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진의 남장포대에서 바라본 초지진 앞바다. 멀리 초지대교가 보입니다.
이승숙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은 우리의 법질서가 미치지 못한다. 소위 '소파'협정에 의해 미군은 주둔국의 법질서를 따르지 않아도 되고 미군 주둔지는 치외법권 지역이다. 그래서 미군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물적, 인적 피해를 입힌 경우에도 우리의 법체계 안에서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나라 법에 따른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 미군과의 관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정당한 배상이나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한미행정협정이 불평등조약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한미행정협정 이전에도 우리나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바로 강화도조약이 그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인 1876년 2월 26일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근대적인 첫 조약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불리한 조약이었다. 조약의 제1조를 보면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일본인이 개항장에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조선 관헌이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관헌이 심판한다고 제 10조에 명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부산과 인천 그리고 원산 등 세 곳에 달하는 개항장은 치외법권 지역이 되어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140 년 전의 잘못된 조약 체결이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전례를 남긴 것이다.
'강화도 조약'은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이 맺은 조약을 말한다. 병자년인 1876년에 맺어졌다고 해서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하는 이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다. 수호(修好)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이니, 조일수호조규란 조선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맺은 나라 사이의 약속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과 일본은 선린외교를 펼치면서 300년 이상 잘 지내왔다. 그런데도 왜 굳이 새로이 수호조약을 맺어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던 것일까.
잘못된 선례 남긴 강화도조약 강화도조약은 1871년에 체결된 청일수호조규와 함께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대교린 질서에서 근대 국제법 질서로 옮겨가기 시작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서구식 근대 국가로 진입한 일본은 조선과의 관계도 서구 근대의 외교적 관습에 따라 바꾸려고 하였다. 그 전까지는 대마도의 영주와 부산의 관리 사이에 이루어져왔던 외교 업무를 새롭게 만든 외무성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부산의 왜관도 일방적으로 일본의 외교 공관으로 접수해 버렸다.
임진왜란 후 일본을 믿지못한 조선은 일본 사신이나 무역상인을 부산 이상 올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 대일 외교와 무역은 모조리 부산에서만 이루어졌다.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이러한 흐름 속에 이루어져왔는데 일본은 조선과 충분한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외교 관례를 무시하는 처사를 했다. 더구나 부산의 초량왜관까지 일본의 외교 공관으로 접수해 버리자 조선은 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