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숙소에서 머물었던 프랑스 청년 필립. 한숨을 푹푹 내쉬어가며 인도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처녀에게 푹 파져 있는 그와 일주일 내내 이웃사촌 처럼 지냈다.
송성영
모처럼 만에 묵직한 노트북을 꺼냈다. 그동안 손전화기 메모장에 틈틈이 기록했던 내용들을 노트북에 옮겨 적고 사진도 정리했다. 하지만 눈이 아파 원고 쓰기는 무리였다.
"하아~."노트북에서 손을 놓고 있는데 나와 같은 층에 기거하고 있는 프랑스 청년 필립이 공연히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한숨을 토해 낸다. 필립은 나보다 하루 먼저 숙소에 들어왔다. 내가 숙소를 잡았을 때 그의 바로 옆방에는 오스트리아 여자가 묵고 있었다. 헌데 내가 온 바로 다음날 필립과 언성을 높이고 나서 그녀는 홀로 떠났다.
필립에게 물어보니 다른 숙소로 옮겼다고 한다. 그는 종종 그녀와 전화 통화나 메시지를 주고 받아가며 바라나시 가트 어딘가에서 만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와 헤어져 돌아오거나 그녀로부터 전화가 올 시간이 다가오면 숨을 푹푹 내쉬어가며 베란다 주변을 정신 사납게 서성이곤 했다.
"하아~""왜 그래? 그녀에게서 전화가 안 와?""오늘은 여기로 찾아오기로 했는데 오지 않네요. 10분이 넘게 지났는데…." "좀 더 기다려봐, 혹시 다른 남자 친구가 생긴 거 아냐?""나도 모르겠어요." "네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찾아온다는 약속 시간에서 점점 멀어져 가자 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건물 바닥이 폭삭 내려앉을 정도로 한숨 소리가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녀를 애타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그녀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자 어둠에 싸여 있던 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덩달아 그녀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필립의 심정을 대변했다.
"필립이 그대를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정말이야, 필립?"오스트리아 여자가 필립을 바라보며 되묻었지만 그는 배시시 웃기만 한다. 나는 다시 엉터리 영어를 총동원해 필립의 간절한 마음을 전해 줬다.
"그대가 오늘 오지 않았으면 필립은 갠지스 강에 뛰어 들었을지도 몰라.""미안해."그녀는 내 엉터리 말을 대충 이해했던 모양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짧게 던져 놓고 나와 필립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필립을 꼬옥 안아준다. 두 사람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장문의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나서 환하게 웃으며 숙소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려온다.
20대 초반의 청춘들, 두 사람은 이곳 바라나시를 떠나게 되면 인도 여행길 어디선가에서 헤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훗날 인도를 떠올릴 때 마다 서로를 가슴 아리게 떠올리게 될 것이었다.
이제 게스트하우스 3층에는 아무도 없다. 나 홀로 있다. 갑자기 외로움이 숨 막히게 몰려든다. 나도 저렇게 가슴 졸이며 한 여자를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던가. 지난 시간들이 꼼지락거리며 일어선다. 내 젊은 청춘은 암울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학생운동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다. 문학도로서 글을 제대로 쓴 것조차 아니다. 그렇다고 절절한 사랑에 빠져 본 적도 없었다.
내 사랑 이야기는 늘 변두리에 머물러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단역 배우처럼. 열차에서 청춘 남녀가 비엔나 강가를 거닐다가 시를 써 주는 부랑자 같은 남자를 만난다. 시 써 주는 부랑자 남자는 두 사람에게 말한다. 자신에게 단어를 하나 건네주면 그것으로 시 한 편을 지어 선물하겠노라고. 내 젊은 청춘은 두 청춘 남녀 주인공 보다는 시 써주는 남자와 다름없었다. 사랑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늘 변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감동적인 사랑이야기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 단역으로 출연하는 부랑자에 불과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후덥지근하다. 앉아 있기도 서 있기도 불편했다. 그나마 눈의 붓기가 가라앉아 가고 있어 다행이다. 천장에서 픽픽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쏘이며 낡은 침상에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베란다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렇게 끈 묶인 개처럼 숙소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어영부영 늦은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메시지 한 통이 날아왔다.
"눈병은 좀 어떠세요. 어둔 골목길을 헤치고 숙소로 되돌아가려니 겁이 나네요. 여기 한국 사람들과 함께 있어요. 술 한 잔 할 건데 오실 수 있나요?"'달려라 하니', 그녀였다. 반가웠다. 같은 숙소에서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게 될 친구의 메시지처럼 반가웠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기쁘고 고마웠다. 오스트리아 여자를 기다렸던 필립처럼 나 또한 오후 내내 '달려라 하니'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신 술, 스스로에게 남긴 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