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시위하는 공원, 이게 바로 런던의 '품격'

[행복사회 유럽④] 공유지의 비극... 트라팔가와 광화문의 차이

등록 2015.04.14 16:50수정 2015.06.0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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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 패러다임과 시스템, 그 바탕에는 역사적 자산과 사회적 자본이 깔려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 자유와 평화, 협동과 연대, 자주와 자립, 이타심과 공동체 의식, 신뢰와 질서, 생태주의와 생명사상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한 유럽'은 이런 바탕을 가진 유럽 7개국(영국, 체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일상체험 여행기입니다. - 기자 말


개인적으로 서울특별시 같은 대도시를 '난민촌'이라 부르곤 한다.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몰려든 '난민'의 생활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도시에 가면, 공원이나 광장 같은 공유 공간에 유독 관심과 눈길이 많이 간다. 자기 땅 한 뼘 없는 대도시 난민에게,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고 위안을 주는 공유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도시 난민(또는 시민)의 행복한 일상과 안락한 휴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우울하고 을씨년스런 풍광과 장면이 공원과 광장 같은 공유지를 점유하고 있다.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라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공유지의 비극'이 일상적으로 연출된다.

서울 탑골공원은 노인들이 연중 상시 독과점하고 있다. 노인들은 공원 안팎을 정처 없이 배회하며 남은 세월을 마저 탕진하고 있다. 노인들을 상대로 육체와 영혼을 상거래하는 '박카스 할머니'(성매매하는 노년 여성)도 넘친다. 부산 용두산 공원도 마찬가지다. 졸시 '용두산 엘레지'로 안타까운 심정을 내뱉은 적이 있다. 

<용두산 엘레지>

한국의 공유지에는 비극적인 엘레지만 울려 퍼진다


누구나, 아무나,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부산에 갈 일이 있다면 
용두산공원을 한번쯤 들여다보는 게 좋겠다
이유는 묻지 말고 아무튼, 그냥 그러는 게 좋겠다

기왕이면 시내버스를 타고 자갈치시장 앞에 내리는 게 좋겠다
남포동, 광복동 거리를 파노라마처럼, 만화경처럼 
도보로, 아주 인간적인 속도로 무심코 스쳐 지나는 게 좋겠다
그러다 점점 용두산 자락으로 스며들거나 접어들기를 권한다


가서 보면, 용두산공원에는 늙은 부산이 한상 잘 차려져있다
근현대사에 시달린 햇볕에 찌든 벤치마다
부산의 낡은 노인들이 녹슨 너트와 볼트처럼 잘 접착돼 있다
태고의 잿빛 양치식물 군락지를 빈틈없이 이루고 있다
이승으로부터 철저히 은폐 엄폐하고 있다
쏜살같은 세월에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숨을 죽이고 있다
나락으로 휩쓸리지 않으려 이기적으로 기를 쓰고 있다
그저 온종일 죽치고 앉아 있다
이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만 찍어대는 최민식씨가 무차별적으로 찍어놓은
가난한 부산사람들이, 용두산공원 이곳저곳을 점거하고
마치 월세를 몇달 밀리지 않은 세입자의 자신감으로
은근히 찝쩍거리거나 치근대고 있다

오십년도 더 된 활엽수 낙엽같은 흑백 사진 속에서
이다지도 변함없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여전히 근무 중 아무 이상조차 없이
오로지 근면성실하고 용모단정한 영혼의 신분으로

말년의 간빙기를 날건달처럼 서성대고 있다

오늘도 시청 앞 광장이나 광화문 광장에는, 무소불위의 국가권력을 상대로 기약 없는 노숙투쟁이 힘겹게 이어지고 있다. 세월호 유족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리고 저마다 기가 막힌 억울한 사연들을 가슴에 비수처럼 품은 시민이 광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시민이 산책하고 휴식하고 위안받아야 할 공원·광장 같은 공동체 공간이 점점 소외의 음지나 투쟁의 전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 공원과 광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숙제가 저절로 떠오른다. 비감해진다.

공원이 80개가 넘는다는 '공원의 도시' 런던의 공원과 광장을 스칠 때마다, 어김없이 그 숙제가 떠올랐다. 런던을 상징하는 관광명소 켄싱턴 공원이나 트래펄가 광장(Trafalgar Square)에서 그저 유유자적한 구경이나, 산책이나, 휴식에 몰입할 수 없었다.    

공유지의 어원은 영국이다. 사전적 의미는 말 그대로 "한 사회의 구성원이 공동으로 소유권을 가지고 이용하는 공간"을 뜻한다. 봉건제 사회였던 영국에서 비롯된 용어다. 영주의 장원에 있는 미개간지를, 소작인들이 공동으로 방목지나 땔감 채취지로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5세기 중엽 이후 영주나 대지주가 중소 농민들이 공유하던 농지를 사유화하는 '인클로저 운동'을 감행한다. 중소 농민들은 농업 노동자나 공업 노동자로 전락했다. 농촌 붕괴의 비극, 도시의 난민촌화, 국가 양극화의 비극이 여기서 배태되었다.

영주나 정부가 소유하고 남은 공유지는 주로 시민들이 여가생활을 위해 이용되는 공공 토지가 되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사용하거나 도시의 광장 혹은 녹지로 변했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아메리카 등 유럽의 식민지에서도 '공유지의 비극'은 발생했다.

공유지는 소유권이 설정돼 있지 않은 공유자원이다. 그래서 과다하게 사용되고 훼손되거나 고갈되고 만다. 미국의 미생물학자 하딘(G. Hardin)이 1968년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논문에서 이를 처음 제기했다.

런던의 공원은 평화롭고, 광장은 자유롭다

 켄싱턴 궁전의 안주인, 다이애나 비 초상화(National Portarit Gallery)
켄싱턴 궁전의 안주인, 다이애나 비 초상화(National Portarit Gallery)정기석

그런데 공유지의 역사적 원조인 런던에서, 공유지의 비극은 좀처럼 목격하기 어려웠다. 공원은 평화롭고 자연스러웠다. 광장은 자유롭고 활기찼다. 런던 시민이 공유지를 함부로 사용하거나, 훼손 혹은 고갈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관광객과 런던 시민이 적당히 뒤섞인 런던의 공원과 광장은 산책·휴식·만남·토론 심지어 시위 등 공유지 본연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런던은 녹지의 면적이 도시 전체의 1/4을 차지한다고 한다. 공원 때문이다. 가히 공원의 도시라 부를 만하다. 서울 역시 공원녹지가 도시 전체 면적의 30.2%(2014, 환경부)를 차지한다. 오히려 런던보다 높은 수치다. 하지만 런던의 녹지와 서울의 녹지는 질이 다르다. 런던의 녹지는 시민의 주거단지, 생활공간과 인접해있다. 하지만 서울의 공원녹지는 70% 이상이 외곽 산악지역에 몰려있다. 서울시민들의 생활현장과 멀리 떨어져 있거나 너무 높은 곳에 있다.

나는 런던의 수많은 공원 가운데 켄싱턴 가든스(Kensington Gardens)와 홀랜드 파크(Holland Park) 두 곳을 골라 가 보기로 했다. 런던을 떠나는 날 오전 일정은 전적으로 공원 산책에 집중하기로 작정했다. 트래펄가 광장이야 런던의 중심이고, 무엇보다 내셔널 갤러리 앞마당이니 안 가볼 도리가 없는 곳이었다.

굳이 그 두 공원을 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일단 숙소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10여 분 거리의 주택가 옆에 붙어있는 근린공원이다. 그만큼 런던 시민의 생활터전은 공원 등 녹지공간과 밀착해있다. 특히 켄싱턴 공원을 가면 서로 연결된 하이드 파크도 먼발치서나마 조망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름조차 낯선 홀랜드 파크는 페이스북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교포가 권유했다. 런던에 아주 특별한 숨은 명소가 있다며, 아무나 알려주는 게 아니라며 적극 추천했다.

"보통 관광 오면 하이드 파크, 그린 파크 등 가는데 홀랜드 파크라는 숨은 명소는 잘 모른다. 홀랜드 파크 하루 산책 하면서 영국 사람들 사는 모습 구경하면 좋겠다.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나오는 <노팅 힐>의 '노팅 힐'도 가깝다. 홀랜드 파크는 아주 특별하다. 런던의 수많은 공원이 있지만 나는 단연 '홀랜드 파크'를 꼽는다. 주변에 노팅 힐 마켓이 가까이 있어 공원도 구경하고 이곳저곳 둘러보기도 좋다."

런던을 떠나는 날 아침, 페친의 간곡한 권유대로 없는 시간을 쪼개 홀랜드 파크를 가 봤다. 그리고 사람마다 개인적인 취향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켄싱턴 궁전의 정원, 켄싱턴 공원

 다이애나 비가 살던 켄싱턴 궁전의 정원, 켄싱턴 공원
다이애나 비가 살던 켄싱턴 궁전의 정원, 켄싱턴 공원정기석

켄싱턴 공원은 초입부터 분위기가 살벌했다. 자칫 입구를 잘못 찾은 줄 알고 뒤돌아 나갈 뻔했다. 입구부터 자동소총으로 중무장한 경비병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다. 런던의 최상류층이 산다는 고급주택가라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켄싱턴 공원을 경비하는 게 아니라 공원 안에 있는 켄싱턴 궁전을 지키는 병사들이다. 켄싱턴 궁전(Kensington Palace)은 1605년부터 영국 왕실의 궁전으로 사용된 왕가의 공식 거처다. 한때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여기에 살았다고 한다. 궁전에는 지금 왕세손 부부가 살고 있다. 그 경비병들은 최상류층 부자들의 재산이 아니라, 영국왕실의 안전과 존엄함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켄싱턴 궁전의 정원이나 다름없는 켄싱턴 공원에는 구경거리가 많다. 1794년, 앤 여왕이 만든 오란제리(오렌지 온실) 카페와 애프터눈 티(영국 홍차), 죠니 뎁과 케이트 윈슬렛이 출연한 영화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촬영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 공 기념비, 클래식 공연장 로열 앨버트홀 그리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백조와 오리가 사는 맑은 호수까지…. 하지만 나는 넓고 넓은 켄싱턴 공원의 한 귀퉁이, 빙산의 일각밖에 보지 못했다. 

트래펄가 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시위

 넬슨 제독 기념탑이 솟대처럼 서 있는 트래펄가 광장
넬슨 제독 기념탑이 솟대처럼 서 있는 트래펄가 광장 정기석

서울의 시청 앞 광장이나 광화문 광장에 해당하는 런던의 공간은, 트래펄가 광장일 것이다.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광장으로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을 기념하여 만들었다. 넬슨 제독의 기념비가 런던의 수호신처럼,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처럼 우뚝 서 있다.  

특히 높이 4m의 초대형 파란색 수탉상이 인상적이다. 영국 해전의 승전을 기념하는 트래펄가 광장에 전쟁 상대국 프랑스를 상징하는 조각상이라니. 그것도 넬슨 제독을 퍼런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 바라보고 있다. 독일인 여성 미술가 카타리나 프리치의 작품이라 한다. 작가의 변은 분명하다. 넬슨 제독, 사자상 등 역사적인 조각상으로 둘러싸인 광장의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자하는 취지란다. 풍자는 풍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트래펄가 광장은 사람이 많다. 내셔널 갤러리 앞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정치연설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주말마다 다양한 집회가 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이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시스템의 구축을 촉구하는 침묵시위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한글과 영어로 '가만히 있으라(Stay Put)'고 적힌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며 전단을 뿌렸다. 런던 시민과 세계 각국 관광객의 공감을 크게 얻었다고 한다. 시민들에게 광장이라는 공유지가 필요한 분명한 사례이자 이유다. 지상에서나마 이렇게 호소한다.

"한국 정부는 평화로운 공원과 자유로운 광장을, 안전하고 쾌적한 여가생활의 공유지를 시민들에게 허하라."

○ 편집ㅣ곽우신 기자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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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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