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의 변호사가 서초구에 위치한 자신의 법률사무소 사무실에 환한 표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는 삼성과의 싸움에서 승패보다 자신이 다치지 않도록 돌보는 일이 더 중요했다고 밝혔다.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를 잊지 않았기 때문일까. 지금의 그는 더이상 삼성전기 이은의가 아니지만 홀로 단단히 이 땅에 발 딛고 선 이은의로서 잘 살고 있다.
유성호
"나 진짜 간다, 잘 있어!"2010년 10월 31일, 은의씨는 삼성을 떠났다. 오래 살던 집을 나오는 기분이었다. 사원증을 반납하고 회사 현관을 나서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눈에 박혔다. 늘 밥 먹던 구내식당, 좋아했던 나무들… 버스를 타려고 뛰다가 넘어진 자신을 잡아준 사람에게 너무 창피해서 고맙다는 말도 못한 채 사무실까지 줄행랑쳤던 기억 등 지난 12년 9개월의 삶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끝이 보이지 않던 싸움에 이미 종지부를 찍은 뒤였다. 은의씨는 회사를 상대로 한 법정 다툼에서 모두 이겼다. 삼성전기는 성희롱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인권위의 차별시정권고는 부당하다며 취소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회사의 주장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며 기각했다. 은의씨가 제기한 손해배상금청구소송 결과 역시 그의 승소였다.
과정은 물론 순탄치 않았다. 그의 인사고과는 항상 C 마이너스(-)였다. 은의씨가 맡은 결연후원사업의 성과가 크게 높아졌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만년 '이 대리'였다. 왕따를 당하는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회사가 직장내 성희롱 고지자에게 불리한 조치를 했다며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고발한 사건은 공소시효 만료 탓에 기각 당했다. 그 사이 아버지도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내가 싸우지 않고 침묵했으면 진급이라도 할 텐데….''아빠가 살아 계셨다면….'후회와 외로움이 불현듯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늘 결론은 '이 싸움을 안 할 수 없어'였다. 은의씨는 자신에게 이 후회와 괴로움을 안긴 상황 자체가 잘못됐으니 답은 열심히 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옳았다.
싸움의 법칙 그의 싸움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에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첫째, 은의씨는 안에서 버텼다. 그는 '범죄 현장을 떠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제가 나가면, 회사 안에 남은 사람은 무조건 사측이 돼요. 10~20년 다녔어도 일단 (회사를) 나가면 사람들이랑 밥도 잘 안 먹고, 경조사도 챙기지 않잖아요? 정말 친한 사람들만 남는. 그런데 제가 회사랑 싸우는데 나간다면, 남은 사람들이 제 편을 들어서 싸워줄 이유가 없죠."
'내가 왜 나가야 해'라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월급이 나온다는 점이 중요했다. 싸움에는 돈이 필요하다. 은의씨가 민사소송을 시작하는 데에만 든 비용도 1000만 원가량이었다. 그는 "회사를 그만 두면 1년에 1000만 원도 못 벌 수 있지 않느냐"며 "회사에서 받는 돈으로 회사와 소송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또 다른 특징은, 그가 '이기적'이었다는 점이다. 은의씨는 싸움의 승패보다 자신이 망가지지 않도록 잘 다듬는 일이 중요했다. 평범한 행복을 포기하기가, 분노를 담고 살아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는 더 열심히 싸웠다.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의씨는 "자신이 망가질 것 같으면 싸우지 말아야 한다"며 "그건 이미 피해가 큰 상황에서 또 피해를 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삼성과 싸우느라 삶이 피폐해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삼성이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략)… 나의 싸움은 이런 소중한 기억들을 변질시키려는 것들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 <삼성을 살다> 본문 273쪽 중에서삼성이란 '센 놈'과 싸운 것 역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은의씨는 "저는 고질라와 싸우는 격이었다"며 "큰 활을 써보고, 때론 거기에 불도 붙여보고, 수류탄도 던져보면서 더 머리를 많이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잠재력이 폭발했다"며 "삼성이 센 놈이어서, 정식으로 싸워서 고마웠다, 삼성에서 싸울 수 있다면 다른 곳에서도 싸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내부고발의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