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입양홍보회 설립자 스티브모리슨
김지영
동생과도 헤어지고 홀로 길거리를 헤매던 그는 어느 신사의 도움으로 강원도의 한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아픈 다리를 수술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 고아원의 배려로 당시 서울 녹번동에 있던 홀트고아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다리 장애 때문에 동생과 헤어졌지만 그 다리 때문에 그가 홀트로 옮겨지게 되었다.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할 만큼 밥도 못 먹던 시절이었고,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국내의 다른 가정으로 입양이 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자기 가족들 먹고 사는 문제조차 당장에 해결이 어려워 하루 밥 세끼가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입양은 아예 바랄 수도 없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당시 다른 가정을 찾아 행복하게 다시 살 수 있는 방법은 해외입양이 유일했다.
홀트에 간 그는 행복했다.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아 헤맬 이유가 없었고, 때에 맞춰 옷도 신발도 새 걸로 입고 신을 수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도 어울려 병정놀이도 하고 구슬치기 딱지치기도 하며 즐겁게 생활했고, 홀트 할아버지 할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살 수 있었다.
무릎이 펴지지 않아 오른 손을 무릎에 짚고 걸어다녀야 했던 다리 수술도 곧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펴진 무릎이 구부려지지 않았다. 절름거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펴지지 않았을 때와는 다르게 손을 무릎에 짚지 않고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고 또 행복했다.
학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학교를 갔고, 성적은 잘 나왔다. 그렇게 행복한 고아원 시절을 보내면서도 그에게는 떨쳐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었다. 엄마와 동생이었다. 다섯 살 때 헤어졌지만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고 어머니가 주는 헌신적인 사랑을 알았다. 한 번은 고아원 울타리에 서 있는데 또래아이가 소풍가방을 매고 물병을 차고 양 손에 엄마 아빠 손을 꼭 잡고 웃음을 지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부러웠고, 목이 메었고, 그리움이 차올랐다.
미국으로 입양 가는 아이들처럼 나도 빨리 입양이 되어 엄마아빠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사이 많은 친구들이 미국으로 입양되어 떠났고 또 많은 친구들이 남았다. '왜 나는 입양이 되지 못하고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던 시절이었다. 정말이지 입양은 간절한 소망이었다.
중학교 1학년 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있을 무렵이다. 당시에는 법적으로 만 14세는 해외입양을 갈 수 없는 나이였다. 1970년 2월 27일이 지나면 입양되는 건 포기해야 했고, 고아원에서 살다 나이가 차면 거친 세상에 혼자 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입양은 그가 사회에 나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고, 그가 간절하게 꿈꾸던, 가정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고아원에서의 생활이 어린 시절 길거리를 배회하던 때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안겨주었지만 그는 엄마아빠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을 받고 싶었고, 안정된 공간에서 공부하고 싶었고, 사회에 나가 성공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1969년 말, 미국에서 발행되는 홀트 기관 잡지 뒷면에 인쇄된, 입양이 필요한 30~40명의 사진 속에 그의 사진이 들어갔다. 14살 입양 불가 연령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연이 함께 실렸고 11개 가정이 그를 입양하겠다고 나섰다.
1970년 5월 28일, 그는 성경책과 일기장이 든 가방을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나이 열네 살 때였다.
"미국 가족은 누나 둘과 저랑 나이가 같은 아들이 하나 있었고요. 그 밑으로 2년 전에 입양 와서 열두 살이 된 백인 혼혈아 동생이 하나 있었죠. 형제들 우애는 좋았어요. 거실에서 보드게임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아버지는 정부 소속 생물학 연구원이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셨지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중산층에 가까운 가정이었어요.아버지는 정말 검소하고 인자하고 겸손한 분이었어요. 어머니도 그랬고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를 많이 사랑해 주시고 5남매도 화목하게 잘 지냈어요. 적응하는 데 참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은 정말 신사다웠어요. 매일 뽀뽀해주시고 그러는데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정말 아름다운 거예요. 그러면서 제 생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거예요.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완전히 대비되는 가족의 모습이었어요. 제가 그 때 아버지 상을 배우게 된 거예요. 아내한테는 저렇게 사랑해야 되는구나, 자녀들은 이렇게 사랑해야 되는구나. 정말 멋진 아빠가 되고 싶었어요."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믿기 힘들었어요"그는 공부를 잘했다. 미국에 가서 그가 가장 잘한 과목은 수학이었다. 물리와 화학도 그에게는 맞는 공부였다.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발자국을 남긴 이후 영웅으로 부상했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시절 즐겨보던 어린이 잡지에 닐 암스트롱에 대한 이야기들이 연이어 나왔을 때 그는 우주를 동경하기 시작했고 닐 암스트롱과 같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꿈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앞으로 많은 대학의 입학허가서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닐 암스트롱이 다녔던 퍼듀 대학을 선택했고, 닐 암스트롱이 전공했던 우주항공과에 입학을 했다.
"대학 4년 동안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아버지 어머니에게 저는 자랑거리가 되었죠. 물론 저도 그런 아버지 어머니를 보며 기뻤어요. 1979년 졸업을 앞두고 굵직한 인공위성 관련 대기업으로부터 러브콜이 많이 왔어요. 이제 며칠에 걸친 졸업시험만 무사히 치르면 사회에 나갈 수 있었어요. 새벽까지 공부하며 졸업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며칠 남겨 두지 않고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아버지가 심장질환으로 병원에 계시는데 위험할 수 있다고요. 아... 그 때 그 심정은...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마지막 시험을 봐야 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매일 어머니께 전화하고 공부하고 전화하고 공부하고 그랬죠.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났고 아버지는 괜찮아지셨어요. 시험이 끝나고 졸업장을 받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 계신 병원으로 달려갔어요.방에 들어갔더니 (아버지는) 아직도 코에 이런저런 관을 꽂고 상당히 연약하고 창백한 표정이었는데 의식은 분명했어요. 제가 다가가서 아버지 손을 잡고 선물을 하나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졸업장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누워계신 그대로 졸업장을 열고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가시는데 제가 옆에서 그걸 지켜보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아버지는 나의 영웅, 나의 롤모델이었어요.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정말.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불과 9년 전에는 밥 한 공기도 못 사는 부모형제와 생이별한 그런 어린 소년이 이제는 최첨단 기술을 확보한 그런 연구소에서 좋은 보수로 나를 데려가고 대학원 공부까지 지원을 해주겠다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될 수 있나, 그러면서 옛날에 강원도에서 생활하던 모습도 떠오르고. 너무나 내가 뿌듯하고, 정말 감사하고, 홀트 할아버지가 흘린 땀을 생각하면 감동이 생기고, 미국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참 믿기 힘든 거예요.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그는 자신이 입양을 통해 자기 인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었던 반면에 입양되지 못하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없었던 한국 고아원 친구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자신보다 훨씬 똑똑하고 재능 있었던 장애인 친구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미국에서 장애는 그의 인생에 장애가 되지 못했지만 한국사회에서 장애는 모든 것에서 장애가 되는 현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그의 하나님과 약속을 했다. 그가 버는 수입의 1/10(십일조)을 지금의 그를 가능하게 해 준 홀트에 기부하기로 했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 기부는 비밀입양이 대세였던 그래서 음지라는 그늘 진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의 입양문화가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나도록, 그가 공개입양운동에 헌신하게 하는 인연이 된다.
13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